조금 곤궁하면 나중에 크게 폄 소굴대신과 화재 화상흉터치료
정민 교수님의 기사 칼럼 기고를 보면 소굴대신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이 진사 왕참원(王參元)의 집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썼다. "집이 다 탔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놀라고 중간에는 의심하다가 나중에는 크게 기뻐하였소. 장차 위로하려다가 외려 축하를 드리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축하가 웬 말인가? 김흥락(金興洛·1827~1899)은 '답조원가(答趙圓可)'에서 "크게 형통하기 전에 조금 굽힘이 있다(以大亨之先有小屈也)"는 의미니, 이번 불행을 장차 크게 형통할 조짐으로 알아 상심을 털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라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유종원(柳宗元, 773년~819년)은 중국 당나라의 문장가·시인이다. 자는 자후(子厚)이며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가까이로는 당(唐) 고종(高宗) 때의 재상인 유석(柳奭)의 후손. 멀리는 서초(西楚) 황제 의제(義帝)의 후예이다. 진사 시험을 거쳐 33세에 상서예부원외랑이 되었다. 그 해 정월 덕종이 죽자 순종이 즉위하고, 유우석 등과 함께 왕숙문, 왕비 등의 정치개혁운동에 가담했다. 그 운동은 환관이나 그들을 이용하는 귀족의 세력을 누르고 쇄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격한 정치개혁운동은 성공하지 못했고, 8월에 순종 재위에 수반되어 개혁파는 모두 물러나고, 유종원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는 중앙에 돌아오지 못하고, 43세 때에는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겨져 47세로 그 곳에서 죽었다. 유종원은 봉건사회 구조를 의문시한 합리주의자였다. 그의 〈봉건론(封建論)〉이라는 제목의 글은 유명하다. 그는 합리주의 정신을 알기 쉽게 제시하고자 우화 성격을 띠는 기법을 사용한 산문을 즐겨 썼다. 그의 글은 한유의 글에서 보는 듯한 원리론에서부터 서술을 진행하는 이론상 장점은 없으나 세상이나 사람의 바람직한 자세를 주제로 한 비판정신을 늘 내포한다. 지방관리로 좌천된 이후 산수를 제재로 한 시를 지어 자신을 위로했다. 시인으로서는 왕유, 맹호연, 위응물과 함께 왕·맹·위·유라고 칭해졌다.
보통 불이 나면 속설로도 업이 흥기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전 1960-1980년대에는 개업선물로 성냥을 한 적이 있다. 실제 성냥의 의미는 불씨가 불로 확 일어나는 것처럼 많이 번창하라고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성냥공장이 없어지고 소화기가 개업선물로 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불이 나는 것이 전화위복이 아니라 가게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필자가 다녔던 대학교 한의학 한문 원전학 교수님도 한의원이 번창하게 잘 되다가 갑자기 불이 나서 한의원을 접고 교수직으로 옮기신분이 있다. 만약 세속의 말처럼 불이 나면 더 잘되 하는 것은 위로의 말이지 실제는 다른 의미가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침을 b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자극 재생해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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