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자는 장경(長卿), 호는 완산(完山) 또는
연려실(燃藜室)이며, 한성부 출생이다. 이광사의 아들이다.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조선의 제2대 임금인 정종의 서자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어려서 아버지 이광사에게 수학하여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실학을 제창하고 고증학파 학자로서도 유명하였다. 그의 집안은 소론에
속하였는데, 노론의 집권으로 여러 번 귀양살이를 했으며 온 집안이 크게 화를 입었다. 많은 책을 저술했으나 여러 번 귀양살이를 하느라 대부분
유실되고, 조선 왕조 야사(野史)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만 전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그의 아버지가 유배되었던 곳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집필하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에 걸쳐 편찬한 조선시대
야사(野史)의 총서이다.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로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원집(原集), 속집(續集), 별집(別集)의 세 편으로 되어
있는데, 원집은 총 33권으로, 조선 태조 때부터 18대 왕 현종 때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왕조별·사건별로 수록하고, 각 왕조 기사의
끝에는 그 왕조의 상신(相臣)·문형(文衡)·명신(名臣)의 전기를 쓰고 있다. 속집은 총 7권으로, 제19대 왕인 숙종의 재위 47년
동안(1674년 ~ 1720년)에 있었던 일들을 원집의 형식대로 수록하고 있다. 별집은 총 19권으로, 조선시대의 관직을 비롯하여
전례(典禮)·문예(文藝)·천문·지리·변위(邊圍)·역대 고전 등으로 편목(篇目)을 나누어 연혁을 수록하였고, 인용서명을 부기하고 있다.
원집·속집은 정치편이라 볼 수 있고, 별집은 문화편이라고 볼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서 흐르고 있는 기본 정신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이다. 그러기에 가능한 자료만을 나열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자신의 견해는 거의 밝히지 않은 특색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인용된 서책을 취사선택했다는 점에서는 저자의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매우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사서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사모하던 유향(劉向)이 옛글을 교정할 적에,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에 불을 붙여[燃] 비춰주던 고사를
사모했는데, 선군으로부터 ‘연려실’(燃藜室)이란 세 글자의 큰 수필(手筆)을 받아 서실의 벽에 붙여두고 그것을 각판하려다가 미처 못했다.
친지들이 서로 전하기를, “그것이 선군의 글씨 중에서 가장 잘된 글씨라고 서로 다투어 모사(模寫)하여 각판을 한 이도 많았고, 그것으로 자기의
호를 삼은 이도 있다” 하니,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책이 완성된 후 드디어 <연려실기술>이라고 이름
짓는다.(<연려실기술> 의례) 이긍익의 燃(사를, 타다 연; ⽕-총16획; rán)+藜(나라 이름 려{여}; ⾋-총19획;
li) ‘명아주 지팡이를 태운다’는 뜻으로 옛날 류향(劉向)이란 사람이 밤에 책을 교정하고 있는데 ‘태을(太乙)의 정기(精氣)’라는 노인이
나타나서 불을 피워준 것이라 합니다. 밤늦도록 책을 읽고 저술을 하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멋진 호이다. 예전에는 전기가 없던 시절
촛불로 불을 밝히는데 지팡이를 태우는 등 하면 화재를 유발하기 쉽다. 사실 화상 때문에 화상흉터란 남모를 고민을 안고가는 사람이 많다. 이런
화상흉터는 이미지한의원의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아무리 오랜 화상흉터라도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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