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0일 목요일

송강 정철과 기축옥사 불쏘기개 화상흉터치료

송강 정철과 기축옥사 불쏘기개 화상흉터치료


정철 (鄭澈, 1536년 12월 18일(음력 12월 6일) ~ 1594년 2월 7일(1593년 음력 12월 18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별명은 총마어사이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국문을 주관하던 형관으로 사건 추국을 담당하였으며, 기축옥사 수사 지휘의 공로로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책록되었다. 훗날 심문 과정에서 기축옥사로 동인과 그 일족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하여 동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정여립의 난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세자 건저문제를 계기로 귀양에 위리안치되었고, 임진왜란 직후 복귀하였다. 전란 초기에 양호체찰사 직을 수행하였으나, 복귀 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일로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에 우거하던 중 사망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기대승(奇大升) · 임석천 · 송순(宋純)·김인후(金隣厚) · 양응정(梁應鼎)의 문인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가사와 한시를 지었으며, 당대 시조문학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1589년(선조 22년) 10월에 정여립의 옥사가 발생한다.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에게 위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게 했다. 그러나 송익필의 권유로 입궐한 정철이 차자를 올려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는 그해 11월 정언신 대신 정철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위관으로 삼았다. 정철은 동인들의 죄상을 추궁하였다.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도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여 죄가 감해졌으나,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고,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이후 3년 간의 과정에서 정여립의 친구, 일가족과 자주 교류한 사람, 일족과 편지를 주고 받은 사람들까지 색출하여 처벌함으로써 1천여 명의 동인계 인사들이 처형되고 옥사하였는데,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정철은 이듬해 2월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동시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그해 8월에는 종계의 변무로 3등 광국공신, 난을 바로잡은 공으로 2등 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에 녹훈되었다. 좌의정이 되면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주도적으로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그가 동인을 죽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정철은 동인 중에 평소에 과격한 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 때문에 조정이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로 복귀한 성혼과 '흉혼독철'(凶渾毒澈)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며, 동인의 화살이 그들에게 집중된다. 이때 정철은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사주해 이산해를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호남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이산해, 유성룡, 나사침, 나덕준, 정인홍, 정개청이 정여립과 한몸과 같은 사이였다고 하면서, 그들을 진퇴시킬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이산해, 유성룡을 면접해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에게 죄를 줄 것을 명했다. 이에 양사가 계사를 올려 죄주지 말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응하지 않았다.
이산해는 정철이 옥사를 빙자해 자신의 세력을 제거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뜬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임금이 간단한 명령을 적은 문서를 승지에게 내려 의금부에서 옥사를 다스리고 있던 정철을 쫓아냈다. 사헌부와 사간원도 함께 정철의 죄상을 논하는 글을 올려 그를 멀리 강계로 귀양을 보냈다. 정철에게 또 벌을 더하고자했으나 이산해가 옳지 않다 하여 그만두었다.
후에 서인들은 이발의 가족들이 옥사할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유성룡이라고 주장하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열한 정치공세로 이해하고 원한과 의혹을 한층 더 쌓게 되었다.
정철은 인종이 죽고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매형인 계림군이 윤임에 의해 추대받았다는 이유로 역모죄로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그의 맏형은 곤장을 맞고 전라남도 광양군으로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정유침은 함경북도 정평으로 유배되었다. 그 역시 계림군의 처가 일족(一族)으로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유배될 때 정평으로 따라간 이후, 아버지의 배소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곧 아버지 정유침은 유배가 풀려서 되돌아왔다.
1547년(명종 2년) 전라도 양재역에서 벽서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관련자로 지목되어 아버지 정유침은 경상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형은 다시 붙잡혀와 형문을 당하던 중 곤장을 맞고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길에 형독으로 32살의 나이에 장살했다. 이후 그의 둘째 형 정소는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남도 순천으로 은거하였다. 그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정철이 옥사를 주관하고 술을 매우 좋아했던 것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말처럼 자신 가족이 당한 정치적 옥사 원한을 사람을 죽여 풀려고 한 것인데 결국 정철은 정치인으로써는 0점짜리 흉악한 자이다.
2014년 11월 20일 드라마 ‘왕의 얼굴’ 2회를 보니 도치(신성록 분)에게 유언을 남기는 정여립(최철호 분)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도치의 용안비서 절도 욕심 때문에 정여립은 역도로 몰렸고 결국 송강 정철에 의해 도치는 역도로 몰려 죽음을 맞았다. 또 서자 출신으로 왕이 되고 관상학책에 왕이 될 팔자가 아니었던 선조는 왕권 탈취를 두려워하였다. 결국 정철과 짜고 임해군을 역모죄로 고발하게 하며 정철은 선조를 위해 자신이 불쏘시개가 되어 자신을 희생하고서라도 선조를 위해서 거짓 충성을 맹세한다.
불쏘시개로 불을 내면 당장은 따뜻할지 몰라도 화재등의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를 치료하는데 특별히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엉키고 설킨 잘못 배열된 콜라겐을 재생하고 기혈순환을 촉진시켜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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