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5일 금요일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백탑파 백색 튼살치료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백탑파 백색 튼살치료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백탑파 백색 튼살치료
 
탑골은 지금은 많은 노인의 안식처가 된 탑골공원 가운데 유리 보호각 속에 있는 '원각사지10층석탑'은 조선시대 도성 한복판에 우뚝 솟아 흰 자태를 뽐내던 탑이었다.
이 탑을 배경으로 연암 박지원 등 18세기 한양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백탑파'를 형성했다.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홍대용 박제가 백동수 등이다. 이들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눴고, 조선사회의 변혁을 꿈궜다. 북학파는 조선 후기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한 일련의 실학자를 말합니다.
백탑파는 북학파라고 하는데 북학은 '맹자(孟子)' 등문공장(藤文公章)에 나오는 말로 17, 18세기 청에서 일어난 학문을 가리켜 우리나라에서 불렀던 용어인데,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북학을 이용후생지학(利用厚生之學)이라고도 하며, 북학파를 이용후생학파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서울 종로 230번지, 현재의 탑골 공원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고 이 탑을 배경으로 연암 박지원을 비롯하여 18세기 한양의 진보적인 북학파 지식인이 이웃해 살면서 백탑파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이 당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고, 조선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백탑파의 핵심 인물은 탑골에 살았던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과 남산 자락에 살면서 이들과 교유하였던 홍대용, 박제가, 백동수이다.
호란을 경험하고 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의 한양 분위기는 반청숭명(反淸崇明)의 북벌운동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운동은 조선이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소위 조선-중화주의와 주자성리학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는 명나라를 높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자인 청나라를 끝까지 도덕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조선의 문화적 우위성을 확인하려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1705(숙종 31) 창덕궁 안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한 것이나, 노론의 영수이던 송시열의 유지(遺志)에 따라 충청북도 괴산(槐山)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1703)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낸 것, 그리고 정조~순조 때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여 왜란·호란 이후의 숭명반청운동을 총정리한 것도 그러한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로 서울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노론의 일각에서는 주자성리학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다. 이 학풍은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흔히 북학(北學)’이라고 한다. 이때는 청이 강희(康熙, 1662~1772)~건륭(乾隆, 1736~1795)의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시기로서, 중국 역대 문화의 정수가 총정리되고, 산업 성장과 서양 과학 기술 문명 도입도 앞서 있었다.
따라서 청의 주인인 여진족은 여전히 멸시하되, 그 안에 담긴 중국문화와 산업, 기술은 수용한다는 유연한 자세가 바로 북학(北學)이다. 이러한 북학의 대표자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이다.
북학은 청문화만을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상업 도시로 변모한 18세기 후반의 수도의 환경과, 탕평책을 추진하던 영조와 정조의 사상 포용정책도 노론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초 침류대학사(초기 실학자)들이 추구한 절충적 학풍과 17세기 후반 근경남인들(야당)이 제기한 고학(古學) 및 농촌경제에 대한 관심도 적극 수용하였다.
이제 한양의 일부 노론은 상공업발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농촌문제 해결도 아울러 고려하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높이자는 북학으로 선회한 것이다. 북학의 철학적 기초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있었다. 사람과 만물의 본성이 같다고 보는 이 주장은 만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만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후생에 끌어들이는 발상을 유도하였다.
이것이 보통 북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라는 저술에서 말미암은 것이지만, 박제가·박지원·홍대용·이덕무 등이 대표적 존재였다. 이들은 대체로 연경(燕京), 북경에 다녀온 일이 있어 기행문들을 남기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들은 청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청조의 문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저서에는 당시의 양반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이 있었으며, 반면에 상공업이나 농업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경세치용학파가 복고적인 것과는 달리,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꾀하는 전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 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탑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2호이다. 석탑은 1467(세조 13)에 세워졌으며 3층의 기단과 10층의 탑신으로 되어 있고 인물과 화초 무늬 따위가 양각되어 있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2000년에는 표면 훼손이 심각해 유리 보호각을 씌워 놓은 상태다.
북학파가 백탑파라고 불리는 것은 원각사지 10층석탑이 매우 높고 흰색으로 서울 어디서나 눈에 띠게 되므로 북학파의 회동 장소로 쓰였던 것이다.
우리 몸에서도 흰색 튼살이 발생하면 살구색인 몸의 색과 대비되어 매우 눈에 잘 보이게 된다. 물론 처음 튼살이 시작할 시기인 적색도 눈에 잘 띠게 되겠지만 말이다. 이런 흰색의 튼살은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과 한약 재생약침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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