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일 일요일

닭의 저승 여행과 삼계탕 끓은 탕 화상흉터

닭의 저승 여행과 삼계탕 끓은 탕 화상흉터


, 돼지, 닭이 이승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저승엘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이 이승에 있을 때 한 착한 일 세 가지를 들어보라고 하면서 만약 대지 못하면 뜨거운 가마솥에 넣고 삶아 버리겠다고 했다. 먼저 소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착한 일을 했느냐?” 
소는 생각이 나지 않자 머리를 벽에 꽝꽝꽝 세 번 박더니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저는 이승에서 인간들에게 고기도 되어 주고, 밭 일, 논일도 해주었습니다.”
염라대왕은 착한 일을 많이 했다며 소를 칭찬하였다. 그 다음으로 돼지한테 물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자 소처럼 머리를 벽에 쿵쿵 100번이나 박고 나서야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승에서 인간들의 고기도 되었고, 음식찌꺼기도 먹었고 인간이 하라는 대로 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닭에게 물으니 이 닭대가리가 생각이 날 리 없었다. 그러나 돼지도 100번 박고 생각이 났으니 자기는 한 200번 정도 박으면 생각이 날 것 같아 벽에다 대고 정신없이 머리를 박았다. 닭은 헤롱 헤롱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윽고 닭은 염라대왕에게 말했다. “에잇! 물 끓여!”
 
삼계탕의 역사는 길지가 않으며, 복날에 삼계탕을 먹는 문화도 1960년대 이후에 와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조선시대에서 복날에 서민들은 주로 개고기를 넣은 개장국(보신탕)을 즐겨 먹었고, 양반들은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은 육개장을 즐겨 먹었다. , 삼계탕의 원형으로 보는 닭백숙은 조선시대에서도 이미 존재하였다. 특히 고기가 귀했던 시절 그나마 흔한 닭고기를 이용하여 널리 이용하였던 고기 요리의 하나였다.
삼계탕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시절 여러 부자집들이 닭백숙이나 닭국에 백삼가루를 넣어 만들면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1940년대 후반에서 이를 식당에 파는 경우가 늘어났고, 1950년대 전후로 계삼탕이라는 별개의 요리로 정착되었다. 처음에는 인삼가루를 사용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에 냉장고의 보급으로 인삼의 장기보존화가 가능해지면서 인삼을 말린 것을 넣는 것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삼계탕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60년대 즈음 부터였다. 이후 현재에는 개장국을 밀어내고 복날 음식의 중심이 되는 요리가 되었다.
삼계탕의 조리법은 내장을 꺼낸 닭의 뱃속에 깨끗한 헝겊으로 싼 찹쌀·마늘·대추 등을 넣고, 물을 넉넉히 부은 냄비나 솥에 푹 삶아 고기가 충분히 익었을 때 건져낸다. 인삼을 헝겊에 싸서 국에 넣고 푹 고아 인삼의 성분이 우러나게 하여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국물만을 마시거나, 국물에 양념한 고기를 넣어 먹기도 한다. 그러나 인삼을 찹쌀 등과 함께 섞어서 닭 속에 넣어 고면 닭 뼈에 인삼의 영양분이 스며들어 인삼의 영양분이 감소된다. 인삼 이외에도 옻나무,엄나무,전복 등을 넣어 먹기도 한다. 삼계탕에 자라, 전복, 잉어 등 몸에 좋고 값비싼 재료를 넣은 "용봉탕"이란 것도 있으며, 한 그릇에 닭을 세로로 반을 쪼개, 양을 반으로 줄인 "반계탕"도 있다.
삼계탕에 재료로 닭은 영계(軟鷄), 인삼은 6년근을 넣는 것을 정석으로 보고 있으나, 실제 많은 음식점에서는 이런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재료비가 비싸지기 때문에 웅추(雄隹)4년근 인삼을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4년근 인삼은 인삼의 유효 성분인 사포닌이 6년근과 큰 차이가 없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의견이 있다. 일부 업체에서는 1~2년근 인삼을 쓰거나 비슷한 맛이 나는 황기로 대체하기도 한다.
 
삼계탕은 건강에 좋은 음식이긴 한데 재료가 한약성분으로 더운 것이라 소양인은 금기이며 특히 몸의 위장이 차지는 여름철에 먹는 것이 좋다. 하지만 우리나라 탕문화의 문제가 있는데 탕을 요리하거나 운반하는 과정에서 화상을 입기 쉽다. 이미지한의원에서도 음식점에서 삼계탕을 먹다가 피부가 화상을 입고 익은 뒤에 화상흉터로 BT침 치료를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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