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崔鳴吉, 1586년 ~ 1647년 6월 19일(음력 5월 17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양명학자,
외교관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완성군에 봉작되었다가 부원군으로
진봉하였다. 1605년 생원시에 입격한후 그해의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14년 병조좌랑에서
삭직된 뒤 복권되었으나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퇴했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발하여 그 뒤 1623년 인조 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군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화의론을 펼쳤으며 항복이 결정된 후 항복문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청나라와의 협상을 성사시켜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대명, 대청 외교를 맡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했다. 1636년 정묘호란 때는
청나라군 선봉장을 만나 시간을 끌어 인조의 남한산성 피신 시간을 벌었다. 그 뒤 화의와 항전을 놓고 김상헌 등의 척화신에 맞서 화의론을
주장했다. 이때 직접 항복문서를 지었는데, 척화신 김상헌이 이를 찢고 통곡하자 항복문서를 다시 모았다. 1637년 의정부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된 직후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심양에 가서 조선인 포로의 석방과 송환, 척화신(斥和臣)의 송환을 교섭, 성사시키고 1638년 초에
귀국하여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 1640년 김류, 김자점 등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다가 1642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직했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비공식적 외교관계가 발각되어 1643년 청나라에 끌려가 억류되었다. 1643년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하였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2년간 억류되었다가 소현세자 등과 함께 풀려났다. 1645년 귀국하여 완성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다. 사후 화의와 타협을 주장했다 하여 성리학
명분론자들에 의해 심한 비방을 받았다. 숙종 때에 잠시 긍정적인 여론이 나타났으나 곧 사라졌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야 그의 화의론, 협력론이
현실적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병자, 정묘호란 당시 주화론의 대표론자로, 전쟁 중 주화론(主和論)을 주장, 화의가 끝나 청나라군이 돌아간 후
많은 지탄을 받았으나 인조의 각별한 신뢰를 받았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도 위험을 무릎쓰고 활약하여 공로를 인정받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론을 주장하여 주전론을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 선원 김상용 등과 맞섰다. 그의 사상과 정책은 주화론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양명학에도 큰 호감을 보였다. 유학과 문장에 뛰어나며 글씨를 잘 썼다. 최기남, 윤두수, 윤근수, 이항복, 신흠(申欽)의
문인이다. 1636년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에서 강화를 주관하였다. 1636년 음력 12월 청군의 재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병자호란 직후 그는 강경대응해야 한다는 김상헌, 홍익한(洪翼漢) 등의 척화론(斥和論)에 맞서 명분보다 현실적 정세를
감안하자며 현황으로는 확전은 불가능하다며 주화론(主和論)을 폈다. 그는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홀로 주전론자들 사이에서
주화론을 주장하였는데, 청나라의 첩자 혹은 뇌물 매수의 의혹을 받았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정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화의론을 좇는
자가 많아져 드디어 1636년 12월 말, 최명길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선언하고 화의 교섭을 주관한다. 병자호란 초기에 청나라의
기동대가 들이닥쳤을 때는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에게 침략을 항의함으로써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 외교에서 패전국으로서 겪는 굴욕과 수치심을 모두 감내하고 당당하게 교섭에 참여하여 조선 백성들은 청나라를 침략할
의지가 없음을 유창하게 설득하여 조선에 적개심을 가진 청나라 장수들을 설득,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미리 청나라 등의 침략에
대비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적의 기마군단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어 기근과 질병, 약체 병력 등 여러가지 문제가 복합되었음을 확인한 그는 병자호란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들어 청나라에 항복할 것을 주장했다. 인조는 그의 분석을 수용하여 항복을 결정하고 최명길에게 직접 항복문서를 작성하게
했다. 이때 그가 작성한 항복 문서를 주전론자인 김상헌이 울면서 찢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이 일에 대해 원망하거나 다른 조처를 취하지는
않았다. “나라에는 문서를 찢는 신하도 필요하고 나처럼 붙이는 신하도 있어야 한다.” 김상헌이 그가 지은 화의 교서를 찢어버리자 그는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그는
김상헌, 송시열 등의 생각이 자신과 다르지만 그들의 생각도 애국심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또한 김상헌과의 개인적인 알력은 심양의 연금생활 중
풀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는 찢어버리는 김상헌의 용기보다는 남이 예스할 때 홀로 아니오 하는 최명길의 용기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국서를 찢을 용기가 있으면 무력으로 나가 창칼로 싸워야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 몸에서도 문서를 찢어서 다시 붙이듯이
이상하게 피부가 변형되는 경우가 있다. 화상으로 흉터가 발생하면 이식흉터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예를 들어 팔이나 발이 화상이면 엉덩이나
허벅지 피부가 쓰이는데 옮겨 이식하는 과정에서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지고 착색이 발생하게 된다. 또 인체 각부위 피부 두께는 다르기 때문에
미묘하게 피부의 색이나 질감 차이가 느껴지게 된다. 약간 옮겨심은 곳 피부는 돈까스 모양처럼 이상해지고 결국 피부 흉터만 면적이 2배가
된다. 이렇게 화상이식수술보다 차라리 화상흉터가 오히려 이미지한의원의 BT침 시술이 잘 치료된다. 왜냐하면 화상이식수술은 인위적인 흉터가
되어서 더욱 치료기간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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