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일제의 전시체제령에 따른 쌀 배급제
실시로 정주영의 경일상회는 문을 닫게 됐다.
쌀가게 단골이자
서울 최대의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이던 이을학씨는 정주영에게 아현동에 있던 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애프터 서비스'의 일본식 표현)'를 해보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고,
산골 소년은
정비업체 사장이 됐다.
서울 북
아현동에 있던 ‘아도서비스’라는 조그만 정비공장을
1940년 그의 나이 25세 때 당시 돈으로
3천5백 원을 주고 인수하면서 자동차정비업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인수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공장은 정주영의 열성과 신용 때문에 일거리가 쏟아져 들어와 당장에 흑자로 올라 개업 20일 만에 친구와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모자라서 빌린 돈의 절반과 인수 잔금을 갚을 만큼 잘 되어 나갔다.
돈을 갚고 난
5일 후인 새벽에 밤새도록 일을 하고 난
한 공원이 기름투성이 손을 씻기 위해 시너로 불을 지펴 물을 데우다가 그만 잘못해 불이 나고 말았다.
불은 것 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번져 공장은 물론 수리하던 트럭 3대와 순정효 황후의 숙부였던 윤덕영씨의
자가용인 미국차 올즈모빌 등 4대를 몽땅 태우고 공장 밖 길거리에서
수리하던 트럭 두 대도 반이나 타버렸다.
정주영은 눈앞이
캄캄했다.
공장재건보다
타버린 자동차를 배상해 줄 돈이 부족했다.
생각다 못한 정
사장은 거래했던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평소에 정사장의
신용과 사람됨을 믿던 고리대금업자는 1천원을 빌려주었다.
겨우 타버린
자동차를 배상했으나 공장을 다시 세울 돈이 없었다.
정비업의 미련을
떨칠 수 없었고 장소를 찾아 며칠 해매다가 신설동 뒷골목에서 조그만 빈 공터를 빌릴 수 있었다.
이곳에다가 겨우
자동차 앞머리만 들여놓고 엔진을 수리할 수 있는 닭장만한 목조공장을 짓고 무허가 정비업을 시작했다.
정비사업은 시작 4년만인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문을 닫게
됐다.
호구지책으로
뛰어든 운수업마저 3년 만에 손을 놔야
했다.
정주영 전 회장은 화재가 일어났지만
다시 재기하였고 오뚜기처럼 다시 정비사업이 문을 닫았지만 현대자동차로 다시 일어났다.
그런데 화재의
재산적 손해는 다시 돈을 벌어서 보상을 할 수 있지만 인체에 화상을 한번 입게 되고 화상흉터를 가지면 자연적으로 없어지기 매우
어렵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화상후 흉터침인
BT침으로 피부의 진피부위를 재생해서 아주
정상적 피부와 똑같은 모습보다 원래 모습에 근사하게 치료한다.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