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일 일요일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왕전과 튼살치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왕전과 튼살치료


왕전 [王翦]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장수(將帥)로서 빈양(頻陽) 동향(東鄉, 지금의 陝西省 富平) 사람이다. 아들인 왕분(王賁)과 함께 시황제(始皇帝)의 천하통일(天下統一)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백기(白起), 염파(廉頗), 이목(李牧) 등과 함께 전국시대(戰國時代) 4대 명장(名將)으로 꼽힌다.
출생 연도는 확인되지 않으며 기원전 236년부터 그와 관련된 기록이 사서(史書)에 나타난다. 이 해에 왕전(王翦)은 나중에 시황제(始皇帝)가 되는 진왕(秦王) 정(政)의 명을 받아 조(趙)의 알여(閼與, 지금의 山西省 和順)를 공격해 장수이[漳水] 유역의 아홉 개 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기원전 229년 다시 조(趙)를 공격하여, 이듬해에 기원전 228년에 한단(邯鄲, 지금의 河北省 邯鄲)을 점령해 조(趙)를 멸망시키고 진(秦)에 합병했다. 기원전 227년, 연(燕)의 태자(太子) 단(丹)이 형가(荊軻)를 자객으로 보내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왕전(王翦)은 연(燕)을 공격해 기원전 226년 연(燕)의 도읍인 계성(薊城, 지금의 北京市)을 함락시키고 연(燕)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연왕(燕王) 희(喜)는 랴오둥[遼東] 지역으로 물러났으며, 진(秦)은 연(燕) 지역에 어양군(漁陽郡), 북평군(北平郡), 요서군(遼西郡) 등을 설치했다.
기원전 224년, 시황제(始皇帝)는 신하(臣下)들을 소집하여 초(楚) 정벌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젊은 장수인 이신(李信)은 20만의 병력이면 정벌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왕전(王翦)은 60만의 병력이 아니면 어렵다고 했다. 시황제(始皇帝)는 왕전(王翦)이 이미 늙었다며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을 장군으로 삼아 20만의 병력으로 초(楚)를 공격했다. 왕전(王翦)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갔다.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초(楚)를 공격하였고, 초기에는 큰 승리를 가두었다. 하지만 이신(李信)의 부대가 항연(項燕)이 이끈 초군(楚軍)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진(秦)은 오히려 초군(楚軍)의 역공(逆功)을 받아 위기에 빠졌다. 시황제(始皇帝)는 직접 빈양(頻陽)으로 찾아가 왕전(王翦)을 다시 장군으로 삼았다. 왕전(王翦)은 60만의 병력을 이끌고 초(楚)로 출병(出兵)하였으며, 시황제(始皇帝)는 직접 파상(灞上)까지 나와 환송(歡送)하였다. 당시 왕전(王翦)은 시황제(始皇帝)에게 출병(出兵)의 대가로 가장 좋은 논밭과 저택을 하사해 달라고 청하며, 진군(進軍) 도중에도 여러 차례 이를 다시 강조하였다. 부장(部將)이 지나친 행동이 아니냐고 하자, 왕전은 시황제(始皇帝)가 의심이 많아 남을 잘 믿지 않으므로 재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후환(後患)을 없앨 수 있다고 밝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초군(楚軍)과의 전투에서 왕전(王翦)은 나아가 싸우지는 않고 성채(城砦)를 굳건히 하여 지키기만 했다. 초군(楚軍)이 싸움을 걸어와도 응하지 않았으며,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과 음식을 주며 체력을 쌓을 수 있도록 했다. 진군(秦軍)이 싸우려 하지 않고 방어만 하자 초군(楚軍)은 방심하여 병력을 동쪽으로 철수시켰는데, 왕전(王翦)은 전군(全軍)을 이끌고 퇴각하는 초군(楚軍)을 기습했다. 진군(秦軍)은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초(楚)의 도읍인 수춘(壽春, 지금의 安徽省 壽縣)까지 쳐들어가 초왕(楚王) 부추(負芻)를 사로잡고 초(楚)를 멸망시켰다. 왕전(王翦)은 여세를 몰아 장강(長江)을 건너 남진(南進)하여 백월(百越)까지 공략(攻略)하였다.
왕전(王翦)은 조(趙), 연(燕), 초(楚) 지역을 합병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무성후(武成侯)로 봉해졌다. 그의 아들인 왕분(王賁)도 위(魏), 연(燕), 제(齊) 지역의 합병에 큰 공을 세워, 왕전(王翦)과 왕분(王賁) 부자(父子)는 몽무(蒙武), 몽염(蒙恬) 부자와 함께 시황제(始皇帝)의 천하통일에 가장 큰 군공(軍功)을 세운 인물들로 꼽힌다. 손자인 왕리(王離)도 진(秦)의 무장(武將)으로 활약했지만, 기원전 207년 거록(鉅鹿) 전투에서 항우(項羽)에게 패하여 사로잡혔다. (두산백과)

길을 떠나기 전에 황제가 베풀어준 술자리에서 왕전은 진 시황에게 많은 전답과 호화로운 집을 요청했다. 진시황이 말했다. “장군, 걱정 마시게, 설마 장군을 가난하게 살도록 내버려둘까 봐 걱정인거요?” 이에 왕전이 말했다. “저는 대왕님의 장군으로서 전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결국 귀족으로 봉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저를 이렇게 중용해 주시니 이 기회를 이용해 전답을 하사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저도 제 자손에게 물려줄 유산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시황은 그의 말을 듣더니 너털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왕전은 군대를 이끌고 무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다섯 번이나 자녀들을 장안으로 보내 진 시황에게 田地전지를 구했다. 그의 부장 몽무는 그 이유를 물었다. “왕 장군, 전답과 집을 구하는 데 너무 집착하시는 것 아닙니까?” 왕전이 대답했다. “사실을 그런 것이 아닐세. 대왕은 겉으로 볼 때는 도량이 큰 것 같지만 속으로는 샘을 잘 내고 인정이 없고 쌀쌀 맞으신 분일세. 대왕께서는 지금 전군을 나 한 사람에게 위임해 지위하게 명령하셨네. 그러니 내가 자손에게 물려줄 유산을 꼬투리로 잡아 전답과 집을 내려주십사 간청하면서 대왕을 위해 힘껏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만 대왕께서는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의심하지 않으실 것이네.”

죽기 전에 사기를 공부하고 삼국지를 통하고 홍루몽을 즐겨라, 김세중, 스타북스, 161-162페이지

위 내용을 보면 왕전은 매우 사소한 돈에 집착하여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야심을 감추고 명철보신하는 지혜를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타인이 보기에는 사소한 것에 목숨거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인에는 절실한 문제가 존재할 수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튼살을 치료하는데 튼살이 종아리나 허벅지에 발생한 경우 치마를 못 입거나 찜질방, 수영장을 못가는 등 남모르는 고민을 안고 사는 경우가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튼살을 ST침이란 튼살침으로 치료한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