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2일 월요일

이토 히로부미의 영국대사관 방화와 화상흉터치료

이토 히로부미의 영국대사관 방화와 화상흉터치료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일본어: 伊藤博文 いとうひろぶみ, 18411016~ 19091026)는 일본 제국의 정치가이다. 1대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의 통감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5·7·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3·8·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 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從一位)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niv. of London)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87년부터 1889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자 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명은 토시스케(利助),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 춘무)창랑각주인’(일본어: 滄浪閣主人, 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한국에서는 을사늑약과 관련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로, 일반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초기 근대 정치인의 한사람이자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1909614일 통감직을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1026일 하얼빈 역에서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 안중근에게 피격당하여 사망하였다. 사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충정군(忠貞君)에 추봉되었고, 대한제국 순종 황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성씨인 이()씨는 남한에서 두음법칙이 사용되도록 하여 마치 오얏 리()와 같은 성씨인 양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숨어 살아서 한국에 900여명의 이()씨들이 생존해 있으니 한국의 성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1016일 일본의 제후국인 스오 국 구마게 군(지금의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 촌(周防國村)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그의 성은 하야시로, 하야시 가문 출신이었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林十藏)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였다. 아버지가 조슈 번의 주겐(中間)계급인 이토 다케베에(伊藤武兵衛)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伊藤)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 할아버지의 성을 따서 이토 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에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에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과 교제하게 된다.
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
1863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準士雇)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영국에 파견된 5명의 유학생 장주 5, 좌측 상단에 앉은 이가 이토 히로부미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에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킨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등 이른바 장주 5걸이라 불리는 청년 지사들과 함께 영국에 파견 되었다.
이때 이토의 짐은 단순하여 1862년에 발행된 오류 투성이의 "영일 번역 사전" 1권과 잠옷 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여생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매우 닮아 있다. 즉 평민 출신으로 일왕 다음의 최고자리에 올랐다는 입지전적의 상황인데 일본은 신분제가 공고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수 없다. 게다가 방화범을 영국 유학까지 시켜주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즉 약점을 가진 이토를 프리메이슨이 이용해서 보수주의자를 개화론자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덴쇼 10(1582) 음력 62일 주군인 노부나가가 교토 혼노지에서 **회 선교사에게 포섭당한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정복하고 정권을 잡은 풍신수길처럼 절대 일본에서는 신분제 변동이 거의 어려운 사회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풍신수길과 이토 히로부미도 공통적으로 한국을 발판으로 중국을 넘봤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이는 풍신수길은 직접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국만 피해를 준 것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을 반대해서 전쟁이 아닌 회유로 한국을 병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서 이이제이 방식으로 일본은 중국을 사냥하는 사냥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냥을 잘하기 위해서 사냥개를 키우듯이 임진왜란 전에 조총등 신식 무기기술을 이전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 근대화를 도와주었지만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중국과 일본이 대결해서 同歸於塵동귀어진식으로 모두 다 피폐해지고 결국 그 전쟁의 이익을 서양인들이 챙기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 한신 토사구팽의 고사처럼 석유를 막아서 일본의 진주만 침공을 고의적으로 유발해서 사전정보를 입수했는데 진주만 습격을 방치하고 또 원숭이처럼 민간인들을 마루타처럼 이용해서 리틀보이를 히로시마에 팻맨을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 놓고 사과하는 군인은 한명도 없다. 심지어는 폭격기 이름을 자기 어머니 이름으로 하고 폭탄에 애칭을 붙여줘 놓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눈꼽만큼도 없다. 더 가소로운 사실은 원자폭탄 피해에 대해서 일본정부나 민간인 차원에서 한명도 미국에 대해서 손해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 참으로 역사를 잊은 무식한 이해 안가는 짓을 하고 있다. 그 역사를 잊고 또 중국을 향하여 군사대국화를 주장하고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는 척하고 몰래 막후에서 군사협력을 맺는 대한민국 정보 모두 반성해야 한다.
이등박문은 1863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까지 저질러 사형시켜야 할 약점많은 자가 총리대신까지 오른 것은 그 약점과 신분상승에 대한 강한 욕구를 이용한 배후의 전쟁광 조종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갑신정변때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 공사는 1116일자 보고 문서에서 정변이 나면 그(김옥균)를 보호할 방침이며, 정변이 나더라도 우리의 1개 중대로써 청국의 현재 병력(단지 5~6백 명으로 추산됨)을 격퇴함은 지극히 용이한 일입니다.”라고 장담하였다. 우리나라 우정국 낙성식을 빌미로 방화를 저질러 갑신정변을 일으킨 홍영식, 김옥균, 서광범등[단체 사진을 보면 한 손을 품안에 넣고 있음]도 일본 프리메이슨 세력에게 이용당해 도와준다던 일본군이 오지 않고 청나라 군에게 소탕당해 개화파가 거세되고 씨를 말려 1894년까지 10년동안 근대화가 늦어지고 결국 일본에 병탄되고 말았던 것이다. 알렌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1881년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안대학교(Wesleyan University)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18833월 신시내티에 있는 마이애미의과대학(Miami Medical College)을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였는데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직접 획득해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넘긴 2년제 의사에게 자기 몸을 맡긴 민영익이란 수구파도 한심스럽다.
아무튼 방화로 불이 발생하면 화상흉터가 발생하고 흉터 치료에 대해서는 이미지한의원에서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화상흉터 치료를 받을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화상의 이유는 라면처럼 국물이 있는 음식을 걸음마를 막 뗀 어린 시절에 걷다가 실수로 발로 걷어차서 화상이 발생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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