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9일 수요일

조혼한 화정 정명공주와 만혼 배튼살치료

조혼한 화정 정명공주와 만혼 배튼살치료


정명공주는 1603627(음력 519)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 사이에서 선조의 21번째 자식이자 10번째 딸로 태어났으며, 선조에게는 유일한 적녀이다. 선조는 52세의 나이에 본 늦둥이 딸 정명공주를 무척 귀여워했으나 이복오빠 광해군이 즉위한 뒤 정명공주의 외할아버지 김제남과 동생 영창대군은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어머니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되면서 정명공주도 함께 감금되었다. 인목왕후를 폄손하는 절목에 정명공주와 관련하여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은 옹주의 예에 따른다"고 규정했다. 당시 정명공주의 폐서인 여부를 놓고 류간(柳澗)'대비(인목왕후)를 후궁으로 대우한다면 그 딸인 공주도 옹주(翁主)로 강등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이첨이 그 말을 듣지 않고 공주를 폐서인하되 오로지 늠료와 혼인만 옹주의 예에 따르도록 했다.
이미 아들을 잃은 인목왕후는 딸마저 잃을까 두려워 광해군이 정명공주의 일을 물으면 죽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명공주는 공주로 복권되고 어머니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정명공주는 21세로, 이미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주를 서둘러 시집보내기 위해 부마간택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전국에서 단 아홉 명만이 부마단자를 내어 간택령에 응했다. 결국 부마단자를 받는 기한을 늘리고 신랑감의 나이 제한을 약화한 끝에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을 부마로 간택했다. 그 과정에서 인목왕후는 사위 홍주원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말인 어승마를 타고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 조정에 문제를 일으켰으나 인조는 반정의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를 벌하지 못했다. 인조는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내어주어 정명공주의 살림집을 짓게 하고 또 정철을 내어주는 등 그녀를 후대하였다. 본래 경국대전에서는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렀고, 경상도에만 8,076결에 이르는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엄청난 호사를 누렸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를 닮아 선이 굵고 힘이 넘치는 한석봉체를 잘 썼는데 조선 후기의 서예가 남구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정명공주의 글씨를 칭찬하기도 했다. 인목왕후 또한 한석봉체를 잘 써 생전의 선조를 기쁘게 했는데, 정명공주도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당시 아버지 선조를 닮은 글씨를 쓰며 어머니를 위로하였으나 30대와 40대 때에는 붓글씨를 끊었고, 한문도 쓰지 않았다. 인조의 의심을 살 것이 두려워 바느질과 가사에만 전념하며 의도적으로 정치를 외면하였다. 인목왕후 사후 궁중에서 발견된 무도한 백서(帛書)로 인해 인조와 효종의 의심을 산 적도 있으나,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인조. 효종 죽고 나자 현종, 숙종 2대 동안 정명공주는 종친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남편 홍주원과의 사이에 71녀를 두었으며 168598(음력 810)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공주 가운데 가장 장수한 기록이었다.
 
조혼을 한 경우는 고려 시대의 원 간섭기 때 공녀로 차출되는 걸 최대한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자식들을 결혼시켰다. 조선에선 주자가례와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 17, 16세 이후에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보통 이 즈음부터 성인으로 간주했는데, 저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사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꼬마신랑은 조혼풍습으로 빨리 자손을 보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대략 신랑이 12살 정도이고 신부는 신랑의 나이보다 6~10살 가량 많았다.조선시대에는 남자의 경우 18~21세에 결혼했으며 늦어도 20대 중반이면 결혼했으며 여자의 경우 그보다 이른 15~18세에 결혼했으며 늦어도 20대 초반이면 결혼했다. 21세의 정명공주가 노처녀로 간주되어 부마가 될수 있음에도 장가들지 않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서울 남성의 평균초혼연령은 2002년에 30세를 넘겼고, 여성의 초혼연령도 20년 전 20대 중반에서 2011년에 처음으로 30세에 진입하는 등 평균결혼연령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남성의 평균초혼연령은 199328.5세에서 201332.6세로 20년 새 4.1세 높아지고 여성의 평균초혼연령은 같은 기간 25.7세에서 30.4세로 4.7세 상승하였다. 최근은 노총각 노처녀란 말은 없어지고 골드미스등의 미혼을 추켜세우는 신조어가 더 유행한다.
초혼연령이 높아질수록 출산율과 여성의 유방암 발생률이 늘어난다. 우리나라의 최저 출산율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출산율이 적어질수록 국가 경제에는 먹구름을 드리운다.
최저 출산율과 이미지한의원과 상관이 없을 듯하지만 출산을 적게 할수록 출산후에 배나 가슴의 ST침으로 튼살을 치료할 확률이 적어지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정책적으로 더욱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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