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일 수요일

카롤루스 대제의 흰 수염과 적색 튼살치료

카롤루스 대제의 흰 수염과 적색 튼살치료


카롤루스 대제(740, 742년 또는 747~ 814128, 라틴어: Carolus Magnus 카롤루스 마그누스, 독일어: Karl der Große 카를 데어 그로세, 영어: Charlemagne 샬리메인, 프랑스어: Charlemagne 샤를마뉴, 스페인어: Carlomagno 카를로마뇨는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서부, 중부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확장했다.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80012월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반대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카롤루스 대제의 국내외적인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신성 로마 제국 등의 재임연표에서는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발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 인물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 시켰으며 또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후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대제'로 번역되는 마그누스(라틴어) 또는 마뉴(프랑스어)의 칭호를 얻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카롤루스 대제 또는 샤를(라틴어 이름 카롤루스의 프랑스어 발음)마뉴라고 불린다. 또한,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라고 부른다.
카롤루스 대제가 살던 시기에 쓰인 그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위대한 카롤루스의 삶(Vita Karoli Magni)을 쓴 아인하르트는 제 27장에서 그에 대해 상세히 썼다.
“7피트에 달하는 장신에 매우 튼튼한 체격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크고 또렷한 눈에 코는 보통 사람보다 약간 컸으며 흰머리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밝고 명랑한 목소리를 내서 청명한 느낌을 주었으며 보통 남자의 목소리보단 조금 더 높은 음을 내었으며 짧고 굵은 목에 조금 배가 튀어나왔다. 대제는 몇 년간 몸살 때문에 운동을 못했지만 그 이전엔 즐겨했다. 대제는 의사들의 조언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끝까지 매달려 하고야 말았다. 그는 의사를 매우 혐오했는데, 그 이유는 의사들이 고기를 구워서 먹지 말고 삶아서 먹으라는 조언을 계속해댔기 때문이다.
아인하르트의 묘사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대제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와 8인치짜리의 동상을 보면 이와 일치한다. 또한 카롤루스 대제가 7피트(현재 단위로 환산하면 6피트 3인치, 190.50센티미터)에 이르는 장신이라는 것도 그리 부풀려 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1861년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대제의 무덤을 열어 뼈를 다시 맞추어 본 결과 카롤루스 대제의 키는 정확히 74.9인치(192센티미터)였다.
아인하르트의 글에 따르면 카롤루스 대제는 화려하고 귀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프랑크족의 전통의상을 입었다고 한다.
대제는 한 마디로 말해 프랑크족의 전통의상을 입었다. 리넨섬유의 셔츠와 바지, 그 위에 실크로 만든 가두리 장식의 튜닉을 걸쳤으며 또 벨트를 차고 있었고 추위에 대비해 수달가죽과 담비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몸에 꼭 맞게 입고 있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파랑망토를 매고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 대개 그 칼자루에는 금이나 은 장식이 박혀있었는데 대제는 연회를 열 때나 사절단을 환영할 때만 화려한 칼들을 찼었다. 대제는 아무리 그 옷이 멋지고 화려하더라도 외국의상이라면 무조건 경멸했다. 또 그런 옷들을 전리품으로 수집하는 것도 금지했다. 대제가 외국의상을 입은 적은 딱 두 번인데, 한 번은 교황 아두리아누스의 요청으로, 또 한 번은 아두리아누스 교황의 다음인 교황 레오를 기쁘게 하려고 로마양식의 신발, 튜닉과 망토를 입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화려한 의상을 입지 않았는데, 그가 그러한 의상을 입을 때는 연회나 사절단 환영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 날에는 자수와 보석이 박힌 옷과 신발 입고 황금색 단추가 달린 망토를 걸치고 왕관을 썼는데, 아인하르트가 언급했듯이 그는 그런 의상을 싫어했다. 평소 카롤루스 대제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수수한 의상을 입었다고 한다.
샤를마뉴는 제국의 영토 확장에 대한 열의만큼 와인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에 관한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샤를마뉴는 당시 번성했던 로마의 방향과 반대쪽인 라인 강변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은 뫼즈(Meuse)계곡의 아헨(Aachen)에 궁전을 건설했다. 그리고 라인강을 항해하면서 봄에 일찍 눈이 녹는 따뜻한 장소를 선택했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게 하였다. 이곳은 라인가우(Rheingau)의 최초의 포도밭이 되었다. 이런 장소는 부르고뉴 지방에도 있었고, 꼬르똥(Corton)의 언덕에도 있다. 꼬르똥의 포도밭은 솔리유(Saulieu)의 주교에게 하사되었는데 이곳을 꼬르똥 샤를마뉴(Corton Charmagne)라고 부른다. 이곳은 원래 레드 와인 포도 품종을 재배하는 지역이었으나 화이트 와인을 제조하기 위한 포도 품종을 심게 된다. 이는 샤를마뉴 대제가 흰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레드 와인을 마시면 수염이 붉게 물들기 때문에 화이트 와인제조용 포도를 심었다고 한다. 그는 위생도 중요시 여겨 와인 제조시 밟지 못하게 하였고, 와인 용기로 동물 가죽 사용을 금지하였다.
 
샤를 마뉴는 흰색 수염을 붉게 물들기 때문에 피를 먹은 듯 이상하게 보이게 되어서 부인이 말을 해서 결국 화이트 와인만 제조했다고 한다. 우리 몸에서도 이유가 있는 듯 없는 듯 붉은 발진이나 두드러기등도 있고 붉은 튼살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은 붉은 튼살은 잘 인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붉은 튼살은 몇 달이 있다가 결국 흰색 튼살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적색 튼살 시기에는 튼살이라는 것 자체를 인지를 못하고 치료를 할 생각을 못한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다양한 방법과 튼살침인 S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재생하고 기혈 순환을 보조하여 튼살을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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