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30일 화요일

책 피타고라스와 벌거벗음 튼살치료

책 피타고라스와 벌거벗음 튼살치료


피타고라스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옷을 입은 채 목욕하는 여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왜 옷을 입고 목욕을 합니까?”
그녀는 대답했다. “간단해요.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 하나님이 너를 살펴보고 계시니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체가 될 수 있겠어요.”
그대는 도대체 안에 얼마나 추한 것을 감추고 있길래 신 앞에서도 나체가 되지 못하는가?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하루 스물네 시간 나체로 지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마하비라는 그렇게 했다. 그는 40년 동안이나 벌거벗고 지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종류의 극단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추울 때는 옷을 벗지 말라. 옷을 입어야만 존중받는 사회 속에서 활동할 때는 나체가 되지 말라. 그러나 나는 목욕을 할 때도 옷을 입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하나의 극단적인 경우다.
나는 소박함과 중용을 가르친다. 그런데 그대는 내 말을 오해했다. 그대는 이 아쉬람에서 누드를 보았나 보다. 여기에 온 일부 사람들은 그런 장면을 보려고 사방을 기웃거린다.
특히 인도인들이 그렇다. 그들은 알몸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알몸을 본 적이 없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알몸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운 곡선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알몸에 대한 집착과 강박 관념을 갖고 있다. 그들은 여기에 와서 사방을 기웃거리고는 다소 실망한다. 벌거벗은 사람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 또한 이런 생각을 갖고 왔음에 틀림없다. 그렇다. 간혹 테라피 그룹[단체 치유과정]에서는 나체가 되는 일이 있다. 단체 치유과정은 그대의 위선을 파괴할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은 그대의 위선을 떨쳐 버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옷을 벗는 것은 그대의 몸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대는 왜 옷 벗기를 두려워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추한 몸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몸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도록 허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옷은 추한 몸을 가릴 수 있는 훌륭한 도구다. 사람들은 나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신의 몸이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로는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이 그대의 몸에 대한 수용성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이것은 아름다운 몸을 갖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옷을 벗음으로써 그대는 자신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자신의 알몸을 눈여겨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자신이 육체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대는 너무 많이 먹거나 적게 먹는다. 그대의 생활 방식이 건강을 해친다.
나체가 되는 것은 완벽하게 좋다. 친구들과 함께 나체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나체로 지내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나체를
보고 자란 아이는 육체에 대한 강박 관념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몸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몸이 무엇인지 안다. 그는 엄마, 아버지, 형제의 나체를 통해 몸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는 이런 일조차 불가능하다. 깊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는 나체가 되어야 한다.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나체가 되는 것이 좋다. 가끔씩 이것은 엄청난 도움을 줄 것이다. 그대를 자연과 더 친밀하게 만들 것이다.
지금 그대는 내 말을 임의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대는 자신의 편견을 통해서 듣는다. 그대는 귀머거리에 가깝다.
온갖 편견과 관념들이 그대의 마음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다.
세 명의 여자가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손으로 모양을 그리며 플로리다에서 먹은 포도를 설명했다.
두 번째 여자 또한 자마이카에서 먹은 바나나의 모양을 손으로 그려 가며 설명했다.
그러자 가는 귀가 먹은 세 번째 여자가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말했다.
“어떤 남자 것인데?”

나는 그레이프 프루트[포도]에 대해 말하는 데 그대는 ‘어떤 남자 것인데?’하고 묻는다. 그대의 마음은 잡동사니로 가득 찼다. 어쩌면 그대는 그 잡동사니를 신성한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똥은 소똥이다. ‘신성한 소똥’으로 부른다고 해서 소똥이 금이 되지는 않는다.
그대의 마음은 소똥으로 가득 찼다.
그대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 마음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편견 없이 듣는다면, 그대의 관념들을 옆으로 밀어 놓고 침묵 속에서 듣는다면 내가 말하는 진리는 너무나 자명하다.

피타고라스2, 오쇼 라즈니쉬, 젠토피아, 74-77페이지

라즈니쉬는 극단적으로 말했지만 옷을 입는 것은 문명화이며 나체로 사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혼자있을 때 시도해 볼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데 옷이란 몸을 가리는 역할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서는 몸을 보여주는 구실도 한다. 예를 들어 노출이 심한 걸그룹의 옷을 보면 옷을 벗으려고 입는것인지 모를 정도로 너무 극단적인 선정적인 노출을 하는 경우가 있다.또 아마존에 원시부족의 다큐등을 보면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완전히 노출을 하는데 야하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요즘에는 치마 자체가 너무 짧게 나오는데 사실 짧은 치마가 원단등을 줄이는 경제적 효과가 있어서인지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치마를 거의 본 적이 없다. 또 사회나 미디어 자체가 노출을 부추기는 선동의 역할을 한다. 짧은 미니를 입고 싶어서 못입는 경우는 허벅지나 종아리가 두꺼워서일수도 있고, 튼살이 발생해서 일수도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ST침 튼살침으로 튼살을 치료한다.

라즈니쉬와 나체 부끄러움 튼살치료

라즈니쉬와 나체 부끄러움 튼살치료


당신은 왜 사람들에게 나체가 되라고 가르치십니까?

그대는 이 곳에서 벌거벗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눈이 멀었는가? 나는 진리를 가르친다. 진리는 당연히 나체가 될 수 밖에 없다.
진리는 자신을 숨기지 못한다. 나는 나체주의를 가르치는 게 아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벌거벗은 영혼이다. 때로는 옷이 방해가 된다. 옷이 그대를 은폐하고 방어한다. 간혹 그대가 벌거벗어도 방해받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벌거벗어라.
내 말은 벌거벗고 시장에 나가라는 뜻이 아니다. 태양과 바람. 비 속에서 벌거벗을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벌거벗어라. 옷을 벗어 던지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엄청난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 옷은 그대의 문명과 세뇌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옷은 단순히 옷이 아니다.
옷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부터 그대를 감춘다. 새와 동물. 나무들은 벌거벗고 산다.
때로는 그들처럼 완전히 벌거벗는 것이 좋다. 지금 나는 벌거벗고 직장에 나가거나. 벌거벗고 앉아서 가게를 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가끔씩 자연 그대로의 나체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그대는 아주 소중한 무엇인가를 놓칠 것이다.
지금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대의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오른 것일까? 신이 나체의 인간을 창조한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신은 그대에게 옷을 입혀서 세상에 내보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나체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가 보다.

윙클트롭은 매력적인 노년의 여자였다. 그녀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물고기들을 키우며 혼자 살고 있었다. 이 물고기들이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온 집안을 가득 메운 수족관마다 물고기들이 비늘을 반짝이며 날렵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욕조에까지 수백 마리의 물고기가 살았다. 어느 날. 목사가 이 집을 방문했다가 이 기가 막힌 욕조를 보게 되었다.
목사가 말했다. “목욕을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걱정 없어요. 안대로 그들의 눈을 가리면 되니까요.”
피타고라스2, 오쇼 라즈니쉬, 젠토피아, 73-74페이지

이 내용을 보면 성경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뒤에 하나님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생각난다. 또 아주 어린 아이들은 누드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는데 나이가 먹고 성인이 되어갈수록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움으로 발생하는 대표적인 것이 안면홍조증이 있는데 사실 안면홍조증이란 의학적으로 판단이 어려운 매우 주관적이며 실제 치료를 해보면 호전도가 객관적이지 않다. 그런데 튼살도 부끄러움이란 마음 때문에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튼살 자체가 질병도 아니고 본인이 쑥스럽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튼살 치료는 차라리 이미지한의원에서 S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재생시키는 치료를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하고 최선의 방책이 될 수 있다.

서북청년회와 백색테러 백색 튼살치료

서북청년회와 백색테러 백색 튼살치료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또는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는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보수운동단체로 반공주의 청년단체였다. 서북청년회의 사무실은 한국 민주당 본부가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대공투쟁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해 선우기성(鮮于基聖)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여 설립한 우익청년운동단체이다. 1946년 8월경부터 대한혁신청년회·함북(咸北)청년회·북선(北鮮)청년회·황해도회(黃海道會)청년부·양호단(養虎團)·평안(平安)청년회 등의 각 대표 사이에 통합협의가 진전되어 서울 종로 YMCA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창단하였다.
강령으로는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균등사회의 건설, 세계평화에의 공헌 등을 내세웠고, 기구는 중앙집행위원장 외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로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결성된 지부는 강계(江界) 출신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울종로지부로서 김이협(金履浹)이 위원장이었다.
1947년 1월 이선파(李鮮波)를 위원장으로 한 서울중구지부, 평안북도 청년들의 서부지구, 청단지부(靑丹支部), 인천지부 등이 잇따라 결성되었고, 1947년 6월 10일 임일(林一)을 위원장으로 하여 대전에 남선파견대본부(南鮮派遣隊本部)를 설치하였다. 서북청년회는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우익진영의 선봉역할을 하였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행진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 공산주의를 찬양·고취하던 민족예술제를 광복청년회와 합동으로 저지시킨 부산극장사건, 부산좌익청년운동의 본부격인 민주애국청년동맹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북청년회 부산지부의 간판을 건 좌익단체사무실점령사건 및 대북공작 등이다. 이러한 격렬한 반공투쟁은 모두가 공산치하의 학정에 못 이겨서 자유를 찾아온 그들의 과거경험이 크게 작용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렇게 서북청년회가 대공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7년 4월에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지청천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이 만든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과의 갈등 속에서도, 전국 청년의 대동단결을 전제로 한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단체들의 통합공작을 시도하였다.
통합공작에 참가한 단체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비롯하여 광복청년회·대한독립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서북청년회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文鳳濟)·김성주(金聖柱)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였다. 이 조직은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이승만은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보존하고 있다.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한 이 대통령의 발언록이 보존돼 있다. 이승만은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라는 대통령령도 공포(49년 1월 18일)했으며,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기념관엔 전시돼 있다.
1947년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자,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서북청년회에서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261~264 :53~54 그러나 독자적으로 서북청년단의 간판을 사용하던 이들도 있었다.
한편 서북청년단 해체 요구가 나오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조병옥 역시도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하였다. 1947년 3월 3.1절 당시 활동과 관련해 장택상은 서북청년단에 5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서북청년회는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탄압 혹은 살해했다. 서북청년회 중에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
또한 1973년 문봉제는 증언을 통해 선우기성이 장택상에게 불려가 쌀한가마니에 해당되는 액수의 봉투를 받았다고도 했다.한편 좌파와의 무력충돌에서 승리하자 장택상은 그들에게 특별히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한편 한민당·이승만로부터도 후원을 받았으나 자금의 대부분은 서북 출신 재산가들이 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최창학·박흥식 등 친일파의 경우에는 협박을 통해 자금을 얻어내기도 했다.
일부는 군으로도 들어왔다. 조선경비대 통위부장 류동렬, 경찰청 경무부장 조병옥, 서북청년회 위원장 선우기성 사이에 합의가 있었는데 당시 서북청년회 내부에서도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파와 재건파 사이에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서 제3의 길을 선택한 사람(서청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부터 가장 규모가 큰 극렬 우익단체로 활동하였고 1948년 12월 19일 이후 해체되었는데 의외로 서북청년단의 단원 중에서 성공한 사람은 얼마 안되며 한국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점차 한국사회에서 잊혀져 갔다.

서북청년회는 제주 4.3 사건등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단체인데 최근 재건 움직임이 있어서 우려가 든다. 이런 서북청년회 활동을 백색테러라고 하는데 백색 테러(white terror)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하여 암살·파괴 등을 수단으로 하는 테러의 일종으로서 그 행위 주체가 극우 내지 우파인 경우 좌파에 의한 적색 테러(Red Terror)와 구별하여 사용한다. 역사적으로 1795년 프랑스 혁명중에 혁명파에 대한 왕당파의 보복이 그 시작으로 꼽힌다. 미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테러단체인 KKK단이 현대의 대표적인 백색 테러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즉 보수우파의 폭력 테러 행위가 백색테러이다.
우리 몸에서도 백색이 이유 없이 발생하면 좋지 않다. 허벅지 튼살, 종아리 튼살등도 마찬가지이다. 또 공산주의 테러인 적색 테러도 발생하면 적색테러처럼 문제인데 붉은색 튼살도 몸에 발생한다. 이런 흰색이나 붉은색 튼살은 이미지한의원에서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해야 한다.

야스나리의 설국과 흰색 튼살치료

야스나리의 설국과 흰색 튼살치료


《설국》(일본어: 雪国 유키구니)은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소설이다. 1935년부터 '분케이슌주'(文藝春秋) 등의 잡지를 통해 연재되었으며, 1937년 처음 간행된 이래 내용 보강을 거쳐 1948년에 완전판이 공개되었다. 작가는 1968년 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온천 마을을 배경으로 게이샤 고마코(駒子), 소녀 요코(葉子)와 주인공 간의 인간관계가 일본적인 관점의 서정적인 표현으로 묘사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시마무라(島村) - 물려받은 유산으로 무위도식의 생활을 보내고 있는, 외국 무용의 비평이나 프랑스 문학의 번역 등을 하고 있는 문필가. 기혼.
고마코(駒子) - 동기 시절 몸 값을 지불해준 남편의 사망 후 온천으로 들어옴. 춤 스승의 아들인 유키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게이샤로 일함. 유키오와 혼담 얘기가 있었음. 요코와 설명하기 어려운 동질감을 갖고 있음.
요코(葉子) - 유키오의 새로운 애인. 유키오를 간호하기 위해 간호사 공부를 함. 유키오가 죽고 나서 온천에 정착. 화재 사건 때 사망.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
        — 소설의 첫 문장
소설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무용 연구가이다. 그는 북쪽 지방 눈이 많이 내리는 온천 거리의 고마코라는 기생에 끌려 몇 년 동안 계속 온천장에 찾아오곤 한다. 물론, 적극적으로 그 여인에게 구애를 하기 위함도 아니요, 헛되고 보람 없음을 알면서도 시마무라의 마음은 그녀에게 끌린다. 그때, 고마코를 통해 알게 된 젊은 요코. 시마무라에 대한 고마코의 사랑이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시마무라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깊이 매혹되면서도 요코의 신비스러움과 지순함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끼게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화재로 인한 여인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죽음 자체도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처럼 그려지고 있다.
《설국》이 전개되는 구체적 무대는 니가타 현의 에치고유자와(越後湯澤) 온천으로, 작가는 이곳에 직접 머물면서 작품을 집필해 나갔다. 이는 자연 풍경 묘사에 대한 작가의 관심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며 집필했다.
어려서부터 부모, 누나, 조부모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혼자 남은 쓸쓸함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던 가와바타는 중학 시절, 화가가 되려던 꿈을 바꾸었다. 그러면서 그는 1924년 《문예시대》를 창간하면서 가와바타가 요코미쓰 리이치와 함께 하면서 전개한 '신감각파 운동'은 소박한 현실 묘사와 재현에만 머물러 있는 종래의 문학을 벗어나, 현실을 주관적으로 파악하여 지적으로 구성된 새로운 현실을 풍부한 감각의 세계로 창조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설국'에 적용했다고 흔히 본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의 스톡홀름에서의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美しい日本の私) 그 서론」을 행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 - 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 >

터널은 어둡고 캄캄함의 흑색, 눈은 흰색으로 대비가 이루어진다. 보통 흰색이 선이며 좋고 검은색은 나쁘다고 생각되지만 예를 들어 몸에 백반증이란 원인불명의 흰색이 발생하면 좋지 않다. 또 종아리 튼살이나 허벅지 튼살도 마찬가지이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흰색 튼살을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하며 진피 콜라겐을 생성하고 원래 모습으로 피부재생을 하여서 치료한다.

오토바이의 여러 이름과 오토바이 교통사고 흉터

오토바이의 여러 이름과 오토바이 교통사고 흉터


Autobike오토바이란 두 개, 혹은 세 개의 바퀴를 가지며(ATV중에는 4바퀴도 있다.) 내연기관을 통해 얻은 동력으로 바퀴를 굴리는 탈 것으로 자동차의 일종. 오토바이라는 이름은 일본식 조어(저글리쉬). 이미 대한민국에서는 이게 굳어버려서 국어사전에서조차 표준어로 싣고 있다. 미국 등 서양에서는 보통 Motorcycle 또는 Motorbike라고 부른다. 프랑스는 moto(모토), 독일은 motorrad(모토라트), 러시아는 Мотоцикл(모터찌클)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원동기(125cc미만)' 혹은 '이륜차(125cc이상)'라고도 부르긴 한데 도로교통법에 관련된 사항이 아니라면 이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정작 요즘 일본에서는 바이크(bike)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남북한의 두가지 단어비교표를 보면 남한은 모터사이클, 북한은 모터찌클로 되어있는가 하면 또 다른 남북한 단어비교표는 남한은 오토바이, 북한은 모터찌클로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한에서도 일본식 조어인 오토바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래서 남한만 오토바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기보다는 남북한이 모두 오토바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특히 북한은 도로교통법에서도 오토바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싣고 있고 뉴질랜드의 오토바이 여행단원이 북한에서 남한까지 가는 내용의 관련보도자료도 보면 북한도 오토바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쓴다는것을 알수있다.(2004년 북한 도로교통법. 이륜차, 원동기라는 용어가 없고 실제로 오토바이라는 단어가 실려있다, 뉴질랜드 오토바이 여행단의 한반도종단 관련 국내기사, 여기에서 북한방송자료가 나오는데 북한방송에서도 오토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게 나온다)
중국어권에서는 Motorcycle 에서 유래된 말인 머투어처(摩托車/摩托车, 마탁차)를 사용하는데, 대만에서는 機器脚踏車를 줄여쓴 말인 지처(機車, 기차)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지붕 및 외벽이 일절 없고 크기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승용차보다 작아서 프레임이 훨씬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경량화가 가능하여 적은 출력으로도 높은 속도를 얻을 수 있고 구조가 비교적 간단하여 흔히 말하는 네 바퀴 달린 자동차보다 유지 및 수리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오토바이의 원형은 다른게 아니고 그냥 자전거에 작은 엔진을 단 탈것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의 자동차랑 맞먹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20세기 초 유럽 대륙에서도 지금의 동남아처럼 자동차보다 오토바이가 훨씬 많았던 때도 존재했다. 오토바이는 싸고 실용적이고 좋은 이동수단이었지만 자동차는 비쌌기 때문이다.
오토바이의 역사를 대변하는 일례로 BMW는 바이크를 100년넘게 만들어온 오토바이 제조사였다. 자동차는 70년됐다. 그리고 지금도 오토바이를 만든다. 할리 데이비슨도 100년이 넘었다.
흔히 승용차보다 빠르다는 인식이 퍼져있으나, 정확히는 기동성이 좋은 것이지 승용차보다 아주 빠르진 않다. 승용차의 경우는 덩치가 있어서 제한적인 이동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속도가 안나지만 오토바이는 덩치가 작아서 승용차에 비하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 또한 가속력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신호등이 즐비한 도심지에서는 똑같이 출발해도 저 멀리 사리지는 오토바이 때문에 그런인식이 생긴듯. 실제로는 승용차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이는 민간 차량업계 뿐만 아니라 전문 경주용 차량업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지간한 국산차로는 성능 좀 되는 오토바이를 따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자동차가 빠르다는것도 프로들끼리 서킷에서 렙타임을 잴때의 이야기지 도심지가 아니라 구불구불 와인딩 로드에서도 일반적으로 흔히 볼수있는 자동차 가지고 오토바이를 따돌린다는건...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예외의 상황은 있는데, 오토바이는 코너링 스피드가 매우 느린탓에, 난다긴다하는 슈퍼바이크일지라도, 고갯길 내리막(다운힐)에서는 종종 동네고수가 운전하는 갤로퍼나 무쏘를 따돌리기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하고 추월당하는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토바이의 엔진은 상당한 숏 스트로크 엔진으로, 일반적인 자동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회전으로 돌아가는데, 보통 국산 125cc 오토바이들도 레드존이 시작되는 회전수가 기본 10,000rpm 이상이며 한 때 고딩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엑시브의 경우 단기통 공랭 엔진 주제에 13,500rpm까지 올라간다. 600cc급 외제 스포츠 바이크의 경우 15,000~16,000rpm까지 올라가기도 하고... (예외는 물론 있다. 대표적으로 할리 데이비슨은 2000-3000rpm 정도.)
안 그래도 배기량에 비해 엔진이 작고 가벼운데, 높은 회전수 때문에 배기량에 비해 출력이 어마어마하다. 예컨데 1000cc급 스포츠 바이크라면 2013년 기준으로 200마력을 넘나드는 흠좀무한 출력을 자랑하는데, 그나마 터보도 아니고 자연흡기 엔진이다[2]. 그런데 오토바이 무게가 180~190kg대이니 가속은 그야말로 축지법 쓰신다. 제대로 된 라이더를 만나면 100km/h까지의 가속이 2초 극초반대로 어지간한 스포츠카의 뺨을 왕복으로 쌔려갈길 수 있다.
반면 공기저항계수가 커서 초반 가속에 비해, 160km/h가 넘었을때의 고속 가속력이나, 최고속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고속으로 갈 수록 엔진출력 이상으로 공기저항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데, 오토바이는 유선형으로 만드는 데 한계가 있어 제로백 2.1초의 R차라도 실측속도 300km/h를 크게 넘기기 어려웠다.
http://bit.ly/1DToZsT

그런데 오토바이는 신호위반, 과속등을 해서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오토바이는 안전벨트가 없어 교통사고가 나기 쉽다. 실제 필자가 대학다닐 때 한 학우가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일이 있다. 그 형은 집이 멀어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날 오토바이가 도난당해 오토바이를 잠깐 타고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 오토바이 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책값을 제본을 떠서 그 비용으로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정차중 트럭에 치어 사망한 경우가 있다.

오토바이는 흉터를 만들기 매우 쉬운데 전신에 흉터가 발생하기 쉽다. 특히 골절등으로 철심을 박아서 정형외과에서 흉터가 발생하기 쉬운데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흉터침, 한약재생약침, 침등으로 치료한다.

오토바이 교통사고와 교통사고 수술흉터치료

오토바이 교통사고와 교통사고 수술흉터치료


위기탈출 넘버원 451회는 2014년 9월 29일 (월) 오후 08:55 방송했는데 위기를 탈출하는法 [인터넷 악성댓글] / 안전사용설명서 [등산화] / 산업안전 [오토바이]가 방영되었다.
오토바이 헬멧 세척 요령 헬멧의 턱 끈과 내피를 모두 분리, 미지근한 물에 중성세제를 풀어 손세척한다. 내피와 헬멧은 직사광선을 피해 그늘에서 말린다.
2014년 넘버원 중국집 꽃미남 배달원! 비투비 민혁군이 배달 일을 시작한 이후 전화기엔 불이 날 정도로 주문 전화가 쏟아졌다. 하지만 민혁은 바쁜 와중에도 5년 무사고 운전자답게 헬멧이나 무릎보호대등 안전 장비를 꼼꼼히 챙기고 안전운전의 정석을 보여준다.
그러던 중 배달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민혁은 자동차와 추돌사고가 발생해 크게 다치고 말았는데 안전운전을 하던 민혁씨가 사고가 난 이유는 안전수칙을 지켰지만 오토바이와 추돌사고 위험이 높은 주행 위치에서 운전을 했기 때문인데 추돌사고 위험이 높은 주행 위치는 자동차 옆이 사각지대가 가장 높았다. 실제 실험을 하니 오토바이가 바로 옆에서 따라오는 경우 자동차가 차선변경을 할 때 사고가 발생했다.
오토바이는 브레이크를 잡았을 때 0.5초가 걸리는데 시속 50km로 주행하면 7m 이상의 거리를 주행하게 된다. 모퉁이나 교차로를 돌때는 서행이 아니라 정지해서 좌우를 확인해서 운전한다. 오토바이 사고를 줄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헬멧이며 잘맞는 헬멧의 턱끈을 잘 조여야 한다.
필자도 오토바이로 교통사고 난 환자가 치료받는 경우가 있는데 정형외과적인 통증등 치료가 아니라 교통사고 이후에 사고로 생긴 흉터와 정형외과적인 수술 흉터가 있다. 특히 젊은 남자의 경우 객기등으로 과속이나 신호위반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토바이 흉터로 이미지한의원에서 치료가 많이 발생한다. 또 오토바이 머플러의 뜨거운 곳에 잘못 신체를 접촉해 피부 화상흉터로 이미지한의원에서 화상흉터침 BT침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2014년 9월 25일 목요일

TSARION Live in Manchester

어허 둥둥 내사랑 -조선말은 동서언어의 뿌리 (7강)

어허 둥둥 내사랑 -조선말은 동서언어의 뿌리 (7강)

김창옥교수 특별강연

문체반정과 문자의 옥 작은 차이와 흉터치료

문체반정과 문자의 옥 작은 차이와 흉터치료


개혁군주라고 하는 정조가 새롭게 유행하는 소품체 문체를 걱정하며 고전의 문체로 돌아가라고 신하들과 선비들에게 명했다. 이를 위해서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패관소설과 잡서 등의 수입을 금하였으며, 중국의 고문들을 신간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조가 책과 사상을 탄압하는 등 보수적인 면모라고 평가하는 주장도 있는 반면에, 단순히 정조가 남인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노론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박지원을 볼모로 삼기 위한 정치적인 노림수였다는 주장이 있다.
정조는 문체반정으로 인해 5년 뒤에 김조순에게 자송문을 쓰게 한다. 김조순은 자송문을 정조의 마음이 흡족하게 잘 써냈다. 그 덕분에 김조순은 정조로부터 신임을 얻어 순조롭게 출세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결국, 정조 사후에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시작한 인물이 되었다. 사실 자유로운 문체에 대해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성리학의 규범을 따르고자 한 노론의 세력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관심이 많은 남인의 세력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저항했던 인물로 박지원과 이옥을 꼽고 있다. 박지원은 집안이 어려워서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우게 된다. 덕분에 그의 글은 다른 사람들보다 고전 문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정조는 박지원에게도 자송문을 쓰게 시켰다. 하지만 박지원은 너무 죄가 커서 자송문을 쓸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옥은 과거에서 장원했지만 소품체 문체를 쓴 것을 정조가 찾아 꼴찌로 처리하였다. 하지만 이옥은 소품체 문체를 버리지 않고 결국 벼슬 길에도 오르지 않았다.
문자의 옥(文字-獄)은 강희·옹정·건륭 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필화 사건이다.
청조는 이민족(만주족)으로서 중국 한족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특히 반청적 경향이 흐르고 있던 강남 향신층의 비판적 동향에 과민하여 사소한 이유로 필화사건을 일으켜 억압하였다. 그 시발은 1663년의 장정롱 사건인데 옹정제 시대에는 청조를 이적이라 비판한 여유량·증정의 사건이 있고, 옹정제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저작하여 청조 지배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건륭제 시대에 들어서면 탄압은 더욱더 가혹해져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집도, 그 목적의 일단은 내용의 검열에 있었다고 하며,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금서로 전부 훼손된 것도 수천 부에 달하고, 일부분을 뽑아내어 태워진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첫째 문사집략 사건이 있는데 명 제국에서는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남겼는데,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면서 숭정제 연간이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당시 편찬을 담당했던 주국정(朱國楨)이란 신료는 미완성인 기록들을 가지고 강남으로 피난하여 살다 죽었는데, 그의 후손이 궁핍하여 이를 지방 유력가 장정룡(莊廷鑨)에게 팔았다.
장정룡은 이 명사를 자신이 완성시켜 자신의 가문을 그냥 돈 좀 있는 유력가가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로 발전시켜, 명성을 얻고자 했다. 장정룡은 초기 작업 중에 급사하고 동생 장정월(莊廷鉞)이 이 작업을 마무리했는데 본인이 워낙 학식이 없어 주변의 여러 학자들과 명사들을 초빙하여 서문과 평론을 달고 미완인 부분을 보충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장정월이 초빙한 학자와 명사들은 하나같이 학식과 명성이 드높았지만, 동시에 청나라에 이를 가는 반청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의뢰받은 명사 편찬작업에서 신나게 명나라 만세청나라 나쁜사람  오랑캐넘들 수준의 글을 마구 써댔고, 장정월은 제대로 안 읽어보며 이거 팔면 명성도 상승하고 돈도 번다는 생각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렇게 출간한 책에는 청조로서는 당연히 아연실색할 내용들로 가득찼다. 우선 청 황제들을 묘호가 아닌 이름으로 호칭했고, 청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명과 청의 전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명의 연호를 쓰고 후금/청군을 반란군으로 칭했으며 항장 출신 상가희와 경정충을 나라팔아먹은 도둑놈이라 비판했다. 지방 관아에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장정월이 막대한 뇌물을 주어서 문제이던 내용을 삭제하고 출간하는 선에서 해결했으나 끝내 이 책은 강희제에게까지 올라갔다. 이 책을 정독한 강희제는 이 역적하면서 연루자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장정룡의 의도와 달리 장씨 집안은 멸족했고, 본인도 부관참시를 겪었으며 편찬에 관여한 학자와 명사들 본인은 물론 그 가족과 친척, 제자들까지 싸그리 다 처형을 받았다. 강희제는 뇌물을 받고 책의 개정출간을 허용한 지방 관리들, 심지어 단순히 책을 인쇄한 사람과 책을 받아서 시장에서 판매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처형시켰다.
명사집략은 워낙 대놓고 반청기조 였던 책이기에 청도 이만한 탄압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본격적인 문자의 옥을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둘째 대명세 사건 (1711년) 이란 청 초기 산문계에서 이름높았던 대명세(戴名世)라는 사람이 명 시절 역사와 저집을 연구하고 참고하면서 자신의 저작 남산집(南山集)을 냈는데, 그 과정에서 남명 최후의 황제 소종 주유랑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썼다라 드러났다. 끝내 남명의 연호 사용은 명나라 추종 세력이며 반역수괴라는 논리로 대명세는 처형받고, 저서들은 모두 불살라졌으며 가족은 만주 외곽으로 유배를 겪었다.
셋째 사사정 사건 (1726년) 옹정제 6년 향시의 감독관이던 사사정(査嗣庭)이라는 문인이 시험문제를 출제하면서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문구를 넣었다. 사실 이 문구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 나온 문구이다.
유(維)자와 지(止)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이니, 유민소지의 뜻은 황제인 옹정제를 참수하겠다는 의도를 담아 반역음모라며 사사정을 체포하고 그 구족을 멸하였다. 사사정은 체포 이후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옥사했는데, 잠시 땅에 묻혔다가 끝내 부관참시 당했다.
넷째 증정-대의각미록 사건 (1728년)이 있는데 옹정제 8년이던 1728년에는 천섬총독 악종기(岳鍾琪)를 충동하려 한 증정이라는 인물의 반란미수 사건이 있었다.
증정(曾點)은 반청사상가를 자처했지만 흔해빠진 백면서생으로 사실 명망높은 학자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반청사상의 지주 가운데 1명이던 여유량(呂留良)의 저작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여유량을 추종하였고, 여유량이 이미 죽은 뒤라 그의 아들로부터 여유량의 저작 몇 권을 더 구해 읽으며 열렬한 여유량 추종자&반청주의자를 했다. 이후 증정은 섬서총독 악종기를 충동하여 반청복명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제자 장희(張熙)를 거쳐 서신을 보내 반란을 일으키라 권유했다.
섬서총독 악종기는 한인팔기 출신으로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고 만주족만 임명받던 천섬총독 자리에 올라 만주출신 귀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냐면 만주귀족들이 아예 작당해 악종기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라 모함할 지경이었고, 그럼에도 옹정제는 “누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악종기를 믿었으니 악종기는 당연히 충성했다.
그런 청조의 충신 악종기를 왜 증정이 골랐냐면, 악종기는 중국 역사상 악씨 성을 가진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송의 애국명장 악비의 21대손이라는 까닭에서였다. 당신의 조상은 한족 왕조를 위해 충성하고 끝까지 싸워 금나라 여진족 오랑캐들을 물리쳤으니, 당신도 조상을 본받아 여진족 오랑캐들을 토벌하고 한족의 증흥을 이뤄달라는 소리였다. 악종기는 즉시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 옹정제는 증정과 장희를 당장 북경으로 압송했다.
옹정제는 증정과 장희를 방면하고, 자신과 증정의 키배를 기록으로 남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출간해 전국적으로 보급시켜 청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증정에게 있던 서찰을 모조리 압수하고, 사상개조한 증정의 진술을 토대로 여유량의 후손 및 반청사상을 가진 명망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옹정제는 여유량을 부관참시했고 여유량의 제자 엄홍규까지 걸리자 두 집안의 직계후손 중 16세 이상을 모조리 처형했으며, 그 이하는 노비로 바꿨다. 여유량의 저작을 출판한 사람들도 반역죄로 처형시켰고, 그 저작을 보유했다는 까닭만으로 모조리 감옥에 끌려갔다. 그리고 증정은 사상개조로 참회록을 출간해 벼슬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다가 건륭제 원년에 이 때의 일을 까닭으로 처형을 겪는다.
4. 건륭제 시기는 대표적으로 시문을 적으면서 탁청(濁淸)이란 문구를 썼는데, 감히 국호인 청 앞에 탁이라는 부정적 글자를 썼다는 까닭에 반역혐의로 처형한 사건이 있고, 강희자전의 문자가 너무 어렵다고 한탄했다면서 반역죄로 처형도 했으며, 그보다 더 막장인 사례로는 순치제 시기 시인이 쓴 구절에 순치제보다 후대인 건륭제의 시호와 어명을 피휘하지 않았다고 그 시인의 고손자가 끌려와 고문도 겪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전국의 모든 서책과 기록을 긁어모으라 지시하고, 그 가운데 청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기록은 모조리 불태웠다. 단순히 당대의 서책와 기록만이 아니라 명 말엽의 기록들도 그 대상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명 말기 장수들이 여진족과 후금/청을 상대로 하면서 이민족/오랑캐/반란군이라 쓴 표현이 있으면 모조리 날려버렸다.
명나라의 태조는 젊을 때 잠시 중이 된 일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것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는데 이것을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이처럼 글자 한 개를 잘못 써서도 문제가 되듯이 잘못 새겨진 상처로 발생한 흉터도 잘못 쓴 글자와 같다. 문자옥으로 사형까지 당한 것을 봐도 조그만 글자 하나같은 작은 흉터가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긁히거나 베인 흉터 뿐만 아니라 점뺀 흉터, 수두 흉터, 대상포진 흉터를 흉터침, 침, 한약 약침으로 치료한다.

스타북스 - 한비자의 관계술(김원중)

스타북스 -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김정미)

일본 전국시대 3명의 새와 이쑤시개 코끼리 튼살치료

일본 전국시대 3명의 새와 이쑤시개 코끼리 튼살치료


일본 전국시대 말엽 세 명의 영웅이자 '3대 천하인'이라 일컬어지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명의 성격을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의 반응에 비유한 이야기. 어찌 보면 한국에도 있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과 좀 비슷해 보인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도 소개되어 한국에도 잘 알려졌다.
다만 이 이야기의 출처는 현대의 유머 같은 것도 아니고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본인들이 직접 한 말도 아니라 에도시대에 적힌 센류(川柳: 에도시대 시가의 한 종류)가 그 출전이다. 의외로 제법 오래된 얘기. 정확한 출처는 에도시대 히라도 번주 마츠라 키요시(松浦清, 1760~1841)의 수필 '갑자야화(甲子夜話)'. 여기에 적힌 원문은 이렇다.
なかぬなら 殺してしまへ 時鳥 - 織田右府(울지 않으면 죽여버릴 터이니 시조야 - 오다 우후)
鳴かずとも なかして見せふ 杜鵑 - 豊太閤(울지 않으면 울려 보이마 두견새야 - 호타이코(도요 태합))
なかぬなら 鳴まで待よ 郭公 - 大權現様(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마 곽공이여 - 다이곤겐사마)
뒷부분의 시조(時鳥), 두견(杜鵑), 곽공(郭公)은 전부 '호토토기스(두견새/뻐꾸기)'의 별칭이며 현대 일본어로는 이렇게 표기한다.
鳴かぬなら 殺してしまえ ほととぎす(울지 않으면 죽여버릴 터이니 두견새야) -노부나가
鳴かぬなら 鳴かせてみせよう ほととぎす(울지 않으면 울려 보이마 두견새야) - 히데요시
鳴かぬなら 鳴くまで待とう ほととぎす(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마 두견새야) - 이에야스
이 센류는 일반적으로 3대 천하인의 성격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혈질이고 성질이 급한 노부나가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고, 꾀가 많은 히데요시는 새를 어떻게든 울게 만들려 하며, 느긋하고 신중한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야기.

코끼리를 이쑤시개로 죽이는 3가지 방법

1. 죽을 때까지 쑤신다!-오다 노부나가
2. 한번 푹 쑤시고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도쿠가와 이에야스
3. 죽기 바로 전에 한번 푹 쑤신다!-도요토미 히데요시

필자가 튼살침으로 종아리, 허벅지 등의 튼살을 없애는 방법도 다음과 같다. 튼살이 치료될까지 튼살침 ST침을 자입하며 여러번 푹 찌르고 또 튼살이 생긴뒤 진피 재생되는데 기다린다. 사실 튼살은 자연적으로 좋아지지 않기 때문에 튼살이 치료되기 직전에 자침하는 방법은 아니다.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백남준 예술은 사기다와 튼살화장품의 사기

백남준 예술은 사기다와 튼살화장품의 사기


1965년 11월 26일 저녁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5개국친선 프로레슬링대회의 메인 이벤트는 한국챔피언 장영철과 일본 오쿠마선수와의 3전 2선승제 경기에서 벌어진 돌발상황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한 경기씩 주고 받아 1대 1 상황에서 벌어진 세 번째 경기에서 오쿠마가 장영철을 코너에 몰아붙여 새우꺾기를 시도했다. 그러나...원래 각본상 장영철이 2대 1로 승리를 거둬야 했으며 이 공격을 풀어야 했으나 오쿠마가 각본을 무시하고 계속 보스턴 크랩을 가했고 링사이드에서 지켜보던 장영철의 후배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 링에 올라가 오쿠마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리치고 난투극을 벌였다.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 속에 경기는 중단됐다. 이 사건은 다음날 전국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한 큰 사건이었다. 왜냐면, 그 해 한일협정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프로레슬링은 각본의 이해도와 완성도라는 것이 부족했으며 지금과 달리 다른 단체간 선수들이 경기를 했기 때문에 각본을 무시하고 상대를 진짜 때리는 선수들도 많았으며, 폴리스맨과 시멘트 매치는 심심하면 있었다.
그런데 경찰조사과정에서 장영철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설명했는데 프로레슬링에 대한 이해가 없던 경찰이 그럼 다 짜고 하는 거냐라며 장영철을 심문했고 이 때문에 프로레슬링의 내부 사항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당시 장영철은 오쿠마가 과도한 플레이를 한 배후에 김일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순수 국내파인 장영철, 천규덕, 여건부 선수등과 다르게 김일은 일본 프로레슬링을 배우고 온 유학파로 당시 김일의 인기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이 심했으며 국내파 vs 유학파의 내분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런 내부사정은 상관없이 언론이 흥미 위주로 포장하면서 프로레슬링은 쇼다라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사태가 커졌다.
백남준(白南準, Nam June Paik, 1932년 7월 20일 ~ 2006년 1월 29일)은 한국 태생의 미국 미술가, 작곡가, 전위예술가이다. 여러가지 매체로 예술 활동을 하였고 비디오 아트를 만들어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예술가로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백낙승이고,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1932년 7월 20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서린동에서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보통중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음악사학으로 전공을 정하고, 주로 작곡과 음악사학를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1956년 백남준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자유로운 음악적 실행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1950년대 말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음악 퍼포먼스의 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린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을 만나 플럭서스 활동을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음악에 주력했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백남준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특히 레이더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받아 2년여 동안 홀로 TV 실험에 착수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 TV를 통해 비디오 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 전시에는 ‘총체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같은 실험적 음악의 시도와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 같은 파괴적 에너지의 설치 및 참여적 형태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내용을 ‘동시성’, ‘참여’, ‘임의접속’ 등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종합적인 큐레이팅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연구자들 사이에 점차 활발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을 거쳐 뉴욕으로 이주했고,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설치 작업을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자연물을 음악적으로 혼합하여 테크놀로지로 물든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판을 얻었다.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많이 알려졌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했고, 이는 예술 세계의 영역 확장이었다. 나아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위성 아트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 이브 몽탕 등이 참여했으며, 전 세계 2천 5백만명(재방송 포함)이 시청하였다. 이후에도 ‘위성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이 이어졌다.
1993년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최고 전시관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전시에서 그는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 라는 명명 하에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한 ‘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다수 내놓았다.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INFO art’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한국 미술이 세계 진출을 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1996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때 백남준은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을 전시한 바 있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75세로 별세, 유해가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인생 자체가 예술'
'예술가는 절반은 재능이고 절반은 재수'
'표현은 인간의 자유를 뜻한다. 예술은 인간의 배설적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
'애국하면 나라 망한다'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꾸라고 가르쳐준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영혼의 신비한 새인 소문은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최초의 라디오다.‘
'예술이란 게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죠’

설치미술가 강익중씨의 말에 의하면 “예술은 사기라는 백남준 선생의 폭탄선언은 반(半)은 속임수를 말하는 거였지만 또 다른 반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말씀하신 걸 거예요. 당시 한창 그 책을 읽고 계셨거든요.” “백선생이 당시 사마천의 ‘사기’에 푹 빠져 계셨죠. 언급하신 사기는 속임수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역사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TV브라운관으로 제작된 1981년작을 보면 ‘사기를 읽느라 15년을 보냈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문구가 있어요. ‘예술은 사기다’는 말은 일종의 우수어린 농담 같은 것으로, 선생님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화두였다고 봅니다. 늘 이중적 해독이 가능한, 유연한 표현들을 즐기셨어요.”

백남준의 사기란 말은 이중적으로 쓰였다. 하지만 튼살 크림이나 로션등은 정말 사기에 가깝다. 왜냐하면 해부학을 조금만 공부해보면 튼살이 발생한 진피까지 도달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화장품을 총괄하는 식약처에서 튼살 크림이나 로션이 효과가 있다는 것은 한가지도 허가를 내준 사항이 없다. 튼살이 발생하였다면 이미지한의원에서 ST침 치료를 받도록하자.

내 생애 봄날과 셀룰러 메모리 심장수술흉터

내 생애 봄날과 셀룰러 메모리 심장수술흉터


2014년 9월 17일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내 생애 봄날' 3회에서 이봄이(최수영)와 강푸른(현승민)은 서로의 묘한 인연에 끌렸다. 봄이는 연인 강동욱(이준혁)에게 조카 푸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봄이는 “푸른이랑 우도에서 처음 봤을 때 눈물이 났다, 분명 처음 본 애들이었는데 어디서 본 애들 같고 가슴이 아팠다 ‘고 말했다.
봄이는 “아마 오빠 조카들이라 그런 것 같다"며 "나보다 내 가슴이 먼저 가족이 될 아이들을 알아봤다”고 설명했다.
푸른 역시 아빠 강동하(감우성)에게 봄이를 떠올리며 “그 언니 참 따뜻했다, 모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편했다”고 말했다. 동하의 아내이자 푸른의 엄마, 그리고 동욱의 첫사랑이자 형수의 심장은 봄이에게 이식됐다. 봄이와 푸른은 서로의 인연을 자신들도 모르게 눈치챈 것이다.
2014년 9월 24일 밤 10시에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내 생애 봄날'4회에서는 강동하(감우성)가 이봄이(최수영)가 낀 죽은 아내 윤수정(민지아)의 팔찌의 비밀을 알아채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이봄이는 과거 강푸른(현승민)을 동하, 수정 부부에게 찾아준 장본인이고 봄이는 동하와 자꾸 얽히는 인연을 신기해하며 애인 강동욱(이준혁)에게 “신기하지?”라며 해맑게 심경을 고백했다.
강동욱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는데 동욱은 좋아하던 형수 수정을 형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다. 동욱은 이혁수(권해효)에게 수정의 심장을 이식 받은 이봄이 상황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이혁수는 “셀룰러 메모리? 심장과 눈만 기억이 있다고, 그렇게 따지면 간을 이식하면 왜 없어? 그런 건 영화에나 있는 일”이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동욱의 불안감은 그치지 않았다.
< 내 생애 봄날>은 장기 기증자의 성격이나 습관이 수혜자에게 전이되는 의학적 현상 ‘Cellular Memory’를 소재로, 봄 햇살처럼 따뜻한 휴먼 멜로를 선사했다.

확장성 심근증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던 중 한 여인의 심장을 이식받고 새 삶을 얻게 되는 명랑한 여주인공 ‘이봄이’ 역은 최수영이, 성실함 하나로 대한민국 최고의 축산업계 사장이 됐지만 갑작스레 아내를 잃은 뒤 후회와 자책, 그리움에 빠져 사는 ‘강동하’역은 감우성이 맡았다.
세포 기억설(영어: Cellular Memory)이란 장기 이식 수혜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으로 기증한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이 수혜자에게 전이되는 현상을 말한다. 세포 기억설은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게리 슈왈츠(Gery Schwartz)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게리 슈왈츠 교수는 인간의 장기 속의 세포는 기억 기능이 있어 이 기억이 전이될 수 있다는 세포 기억설을 주장한다. 그는 사람의 생활 습관, 식성, 관심분야, 일종의 단편 기억 등이 뇌 뿐만 아니라 인체의 세포속에도 저장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게리 슈왈츠 교수는 20년간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을 연구하여 70여건의 사례를 발견한다.
다음은 게리교수가 작성한 실례이다.
실제 사례 1 - 제니퍼(7세)
심장 이식 수술 후 알수 없는 악몽을 꾸게 되었다. 제니퍼가 꾸는 꿈은 살인자에게 살해 당하는 꿈이었다. 정신과 치료도 소용없어 제니퍼의 부모는 제니퍼를 경찰에 데려 가게 된다. 그리고 꿈속의 살인자의 몽타주를 그려 결국 자신이 이식받은 심장의 주인인 랄프라는 소년의 살해범을 잡게 된다. - 게리 슈왈츠 교수의 논문 중 발췌
실제 사례 2 - 윌리엄 쉐리던(63세)
심장 이식 수술후 그림에 대해 월등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전에는 거의 초등학생 수준이었던 윌리엄은 심장 이식 수술후 창조적인 그림 실력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월리엄에게 심장을 이식해준 사람은 교통사고로 숨진 케이스 네빌이란 사람으로 그는 24세의 젊은 아마추어 화가였다. - 뉴욕포스트 중 발췌
실제 사례 3 - 쉐릴 존슨(37세)
신장 이식후 독서 스타일이 변화하였다. 평소 연예인이나 가쉽거리 관련 잡지만 좋아하던 쉐릴은 신장 이식 후 도스토예프스키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즐겨 읽게 되었다. - 데일리메일UK 중 발췌
실제 사례 4 - 소니 그레엄
소니 그레엄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테리 코들의 심장을 이식 받게 된다. 시한부 삶을 살던 소니는 새로운 심장을 이식 받고 건강을 회복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13년후 소니는 돌연 자살을 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살한 방법이 테리 코들과 동일한 방법이었다. - 데일리메일UK 중 발췌
그러나 세포 기억설에 대한 의학적, 과학적 소견은 아직 냉담하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셀룰러 메모리를 인식하고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 과학적 결론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셀룰러 메모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의학계에서는 인간의 내장 조직에서도 어느 정도 정보처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혔다.

필자는 어느 정도 셀룰러 메모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학은 심장에 마음이 들어 있다는 내용에 미신이라고 코웃음치겠지만 한의학의 심은 심장 뿐만 아니라 뇌기능을 담기 때문에 심장수술이후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심장 뿐만 아니라 만약 뇌 이식이 가능하다면 셀룰러 메모리 메모리가 더 증명되겠지만 아직 뇌이식은 없다.
일반적으로 이식수술을 받으면 이식 수술흉터가 발생한다. 특히 확장성 심근증 수술처럼 심장수술은 가슴에 흉터가 발생하므로 잘 가려진다고 생각되지만 노출이 될수도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심장수술이나 기타 이식수술, 성형흉터 수술, 교통사교 흉터치료등 다양한 흉터를 OT침이라고 불리는 수술후 흉터침과 침, 한약 재생약침으로 치료한다.

내생에 봄날 이봄이 수영의 심장수술흉터치료

내생에 봄날 이봄이 수영의 심장수술흉터치료


2014년 9월10일 첫 방송된 MBC 수목드라마 ‘내 생애 봄날’(극본 박지숙, 연출 이재동)에서 배우 감우성(동하 역)과 그룹 소녀시대 수영(이봄이 역)의 사랑이야기가 그려졌다.
심장 이식 수술로 생명을 얻은 해길 병원 임상영양사 수영이 늘 식사를 거부하는 할머니에게 “굶어 죽는 건 못 봐요”라며 억지로라도 식사를 권하던 중 할머니가 “너 같이 젊고 건강한 년이 이렇게 늙고 병든 년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라고 비수를 꽂아 수영은 한 할머니에게 옷 단추를 풀러 가슴의 수술 흉터를 보여주었다.
2014년 9월 24일 4회 방영분을 보면 나현순이 예비 시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봄이가 더욱 긴장하였다. 과거 이봄이는 자신의 가슴 심장수술 흉터에 얽힌 사연을 나현순에게 털어놓았는데 강동욱과 조명희의 의견에 따라 예비 시댁 식구들에게 심장 수술 사실을 숨기려고 했던 이봄이였기에 상황이 난감해 졌다.
굳은 표정으로 조명희와 자리를 마련한 나현순은 밝고 명랑한 성격의 이봄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은 뒤 본론을 꺼냈다. “결혼은 안 됩니다. 이번 혼담은 없던 걸로 하자.” 라며 파혼을 입에 담는 나현순으로 인해 이봄이와 강동욱의 결혼 계획이 불투명해졌다.

이 드라마를 보면 심장 수술 흉터가 드라마 줄거리를 이끌어 내는 선도적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심장수술흉터는 안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노출이 가능하다. 또 드라마 내용중에 흉터가 보였고 심장수술 건강문제 때문에 결혼이 파혼될 위기에 처했는데 사실 심장수술 흉터는 거의 안보이며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할 수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수술후 흉터침인 OT침과 한약 재생약침, 침으로 치료한다. 가장 핵심적인 치료인 수술후 흉터침은 진피 콜라겐을 끊어서 다시 배열하는 과정에서 치료가 이루어지게 하며 기혈순환을 촉진하며, 또 섬유아세포를 자극해 콜라겐을 재생하는데 도움을 준다.

낙화암과 삼천궁녀 붉은 글씨 튼살치료

낙화암과 삼천궁녀 붉은 글씨 튼살치료


낙화암(落花岩)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바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
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각형의 《백화정》 정자를 건립하였다. 아래에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조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인데, 다음과 같다.
[百濟古記云『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 相謂曰“寧自盡, 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백제고기(百濟古記)》에 말하였다.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에 임하였는데, 서로 전하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 이끌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므로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岩)이라고 부른다.』
이는 속설의 와전이다.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 함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전설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궁궐터를 가지고 분석해본 결과로는 3천 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권2에서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은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 1448~?)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최초였다. 이후 윤승한(尹昇漢)의 소설 <김유신>(野談社, 1941년)에서 '3천 궁녀'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했고,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항목에서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결국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부여 낙화암이 ‘붉은 페인트’로 이상한 글씨가 쓰여 있다.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알려진 부소산 절벽의 ‘낙화암’이란 글씨가 페인트로 떡칠된 것이다. 낙화암이 있는 백마강변에 위치한 ‘조룡대’, ‘자온대’ 등의 바위에도 붉은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페인트를 칠한 건 근처의 유람선 운영자들로, 관계자는 관광객들이 낙화암이라든가 조룡대라든가 선명치 않기 때문에 퇴색된 부분을 정비 했다고 한다. 문화재 당국은 뒤늦게 문화재청에 보고해서 처리해 원상 복구에 나서겠다고 했다.
붉은색은 신호등의 경고사인처럼 시각적으로 눈에 잘 띤다. 그런데 금강산을 봐도 김일성, 김정일 수령에 대한 찬양 문구가 붉은 색 글씨로 쓰여져 있어서 금강산의 본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자연을 망쳐 눈꼴이 사나운데 남한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가 찬다.
우리 몸에서도 붉은색 피부 질환이 있는데 붉게 변하는 발적이나 붉은 반점인 홍반등이 있지만 튼살도 처음에는 붉게 시작한다. 붉은 튼살은 일반적으로 6개월 이내에 발생한 튼살이므로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잘 치료가 되며 또한 몇 년, 몇십년 지난 흰색 튼살도 이미지한의원의 ST침으로 잘 치료되는 편이다.

Michael Tsarion - Age of Manipulation - 2/3

스타북스 - 춘추전국이야기(공원국)

인간과 늑대 루푸스 스테로이드 튼살치료

인간과 늑대 루푸스 스테로이드 튼살치료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이탈리아어: Titus Maccius Plautus, 기원전 254년~기원전 184년)는 로마의 희극작가이다. 움브리아에서 태어나 로마로 건너와서 그리스 신희극의 번안과 상연을 했다. 조잡하고 교양이 없는 일반 대중을 위해 그는 대담하게 자유스러운 원작의 변형(變形)·개작(改作)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고상한 교양을 요하는 부분을 삭제한다든가, 로마의 인정과 풍속제도를 삽입시키든가하여 전체의 예술적 완성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장면마다의 효과를 노렸다. 그가 장기로 한 것은 교묘한 줄거리 꾸미기, 성격의 다양성, 대담한 기지와 해학, 풍부한 패러디(parody), 대화의 긴장감과 리듬 등에서 특히 서민의 일상어를 자유로이 구사함으로써 발랄하고 템포가 빠른 대사를 만들어냈다. 작품은 21편이 현존한다.
그는 배우로서 활약하는 한편 130편의 희극을 창작, 그 가운데 문학자 와로가 선정한 21편이 후세에 전해졌다. 역(役)은 메난드로스, 필레몬, 디피로스 등 신희극(新喜劇) 작가의 작품을 번안한 것이었으나, 결코 모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개안하여, 새로운 장면이나 정황을 만들어내는 재능에 있어서는 감히 따를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비슷한 그리스 희곡에서 영감받았으나 로마의 실정에 맞추어 새로이 쓰여졌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일정한 패턴을 두고 반복되는 경향이 있으며, 개개의 등장 인물들 또한 비슷하다. 주인공으로는 사랑에 빠진 높은 신분의 젊은이가 주로 등장하며 매춘부이나 실은 어릴 때 납치된 귀족 가문의 여식임이 밝혀지는 여주인공 또한 흔히 등장한다. 작품 내에서는 로마시대 전통적으로 요구되던 도덕 관념을 전면으로 뒤집은 등장 인물들이 나타나 해학적인 웃음을 준다. 아버지가 아들의 연적이 되는 상황이나, 어머니가 아버지를 타박하는 장면 등에서 전통적인 역할의 전복으로 인한 웃음을 자아낸다.
남이탈리아와 그리스 희극에서 힌트를 얻어 신희극을 개작하거나 '아테라나극'의 진부한 역할에 신선한 웃음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와 같은 줄거리나 역할은 어느 정도 종래의 것에 의존하고 있으나 플라우투스가 대사에서 구사하는 라틴어는 그 자신이 자랑하고 있듯이 그의 독창이며, 오랜 라틴어 고유의 자연스런 리듬이나 액센트를 그르침이 없이 자유롭게 살리면서 강렬한 운문을 만들어낸다. 또 그와 같은 언어의 음악이 노래가 되고 기악(器樂)과 혼합하는 곳에 극으로서의 팽창을 볼 수 있다.
그리스 극과 같은 합창대는 없어도 극의 요소마다 수많은 여러 가지 율형(律形)의 노래가 삽입되어 있어 이탈리아 고유의 음악과 언어가 매우 효과적인 구실을 한다. 이와 같은 음악극(cantica)은 플라우투스에서는 발견되나 테렌티우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의 작품의 상연에서는 무대와 객석이 구분되지 않았다. 플라우투스의 극작에는 메난드로스와 같은 난숙기의 섬세성은 결여되어 있으나 신희극과 남이탈리아의 희극적 요소, 그리고 옛 에트루리아를 거쳐 이탈리아의 제사(祭祀)로 융합한 음악적 요소가 작자의 창조력과 활발한 재기로써 힘찬 희극예술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Homo Homini Lupus Latin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플라우투스)
  homo : 인간 homini : homo의 여격(인간에게) lupus : 늑대
인간은 천성적으로 늘 서로 경계하고 대립한다. 홉스는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전신 홍반성 루푸스(Systemic Lupus Erythematosus) 또는 전신 홍반성 낭창 또는 그 일반적인 줄임말 ‘루푸스(Lupus)’는 머리글자만 따서 ‘S.L.E’ 라고도 불리며, 세포핵의 특정 단백질에 대한 자가항체가 생성되고 면역계의 이상에 의해 자신의 세포나 조직이 파괴되는 ‘만성 염증성 자가 면역성 질환’이다.

루푸스는 류머티즘 관절염 등과 같이 류머티즘성 질환이다. 그러나 관절이라는 특정부위에만 주로 영향을 주는 류머티즘 관절염과는 달리 루푸스는 ‘‘전신 홍반성 낭창(Systemic Lupus Erythematosus)”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절과 근육뿐만 아니라 피부, 신경조직, 폐, 신장, 심장과 조혈기관 등 온몸의 모든 조직을 공격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질환의 진행에 대한 예측이 어렵고,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나 임상적으로도 진단과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병원에서의 치료의 목표 또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전문 의학적 치료법으로 루푸스의 증상과 활성화 정도를 조절하면서 환자 스스로가 당뇨병과 같이 평생 지속적인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환자교육 등에 힘써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루푸스로 인한 합병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자신의 신체의 변화가 루푸스와 관련된 변화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고, 함께 주치의와 협의하여 정기적인 검진을 시행해야 한다.
가슴통증(chest pain, 흉통)이 있다.
간혹이라도 숨쉬기가 힘들고, 가쁘고 짧은 호흡을 하게 된다.
최근 감기는 아닌데 미열(37.5℃ 아래의 열)이 있고, 몸 이곳 저곳이 쑤셨다.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한 감정을 경험했다.
평상시 나와는 다른 행동과 생각을 한다.
손, 발 등이 감각이 무디다.
근육이 탄력이 떨어지고, 약해지는 느낌이다.
늘 신던 신발이 작게 느껴지고, 종아리와 발이 붓는 것 같다.

루푸스[lupus, 狼瘡]는 피부의 결절병변이나 궤양의 형성등에 의해 피부가 침식파괴된 것의 총칭. 홍반성 낭창, 심상성 낭창, 또는 결핵성 낭창, 동창성 난창, 매독성 낭창, 암성 낭창등의 명칭이 있으며 각종 질환이나 원인에 의해서 출현하는 안면의 피부병변이다.
lupus는 라틴어로 늑대란 뜻이며 狼瘡의 낭은 狼(이리, 늑대 낭{랑}; ⽝-총10획; láng)란 뜻이니 낭창이란 이리가 이곳저곳을 물어뜯어버린 듯 피부가 파괴된 듯 보이는 것이다.
루푸스는 자가면역으로 추정되는 원인불명이며 스테로이드 약으로 치료한다. 그런데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으면 쿠싱증후군 뿐만 아니라 피부가 모세혈관이 발달하고, 피부위축, 부종등이 발생한다. 또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스테로이드로 튼살이 생긴다. 필자는 튼살을 ST침으로 치료하는데 루푸스, 건선, 습진, 아토피, 신증후군등 면역치료 때문에 생긴 튼살도 치료한다.

영조는 양위이지 선위가 아니다 조그만 차이 흉터치료

영조는 양위이지 선위가 아니다 조그만 차이 흉터치료


양위 파동은 대단히 소모적인 행위다. 국왕이 실제로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고, 국왕은 의사를 관철하겠다고 고집한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둬진다.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이런저런 정치적 전환이 이뤄진다. 적지 않은 선왕들처럼 영조도 신하들을 제압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방법의 하나로 양위 파동을 사용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미 영조는 5회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재위 15년(1739) 1월, 16년 5월, 20년 1월, 21년 9월, 그리고 25년 1월이었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각 4, 5, 9, 10, 14세였다. 맨 처음 네 살의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지시는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다. 이 사건들은 그 기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3년 뒤인 재위 28년(1752) 12월 14일 영조는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세자는 극력 만류했다. 그러자 국왕은 “네 효성이 밝혀지면 너를 위해 전교(傳敎: 임금의 명령)를 거두겠다”면서 [육아시(蓼莪詩)]를 읽게 했다.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한 편으로 ‘무성하게 자란 아름다운 채소’라는 의미다. 어떤 효자가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고 아름다운 채소로 알았지만 살펴보니 쓸모없는 잡초였는데,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세자는 그 시의 끝부분에 이르자 부왕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다(至終篇, 王世子伏於前, 涕汪汪下). 약속대로 전교는 철회되었다. 세자의 나이 17세였고, 밤 3경(23∼1시)의 일이었다.
2년 뒤에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했다. 영조 30년(1754) 12월 대사간 신위(申暐)를 종성(鍾城)에 귀양 보냈는데, 그의 상소에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이 부분을 “내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라고 지목하면서 “내가 예순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아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글을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라고 세자를 꾸짖었다. 계속해서 국왕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렸다. 세자는 관(冠)을 벗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席藁待罪)한 것이 두 번이었고,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짓찧은 것이 한 번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계속 내렸고,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번의 소동은 어둑새벽(黎明)에나 끝났다(2일).
갈등의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3년 뒤 22세의 세자는 스스로 반성하면서 승정원에 글을 내렸다.
“나는 불초(不肖)하고 불민(不敏)한 사람이어서 정성과 효성이 천박(淺薄)해 잠자리와 식사를 돌보는 절차를 때맞춰 하지 못했으니 자식된 도리에 참으로 어긋남이 많았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대조(大朝: 영조를 말함)께서 그동안 거듭 간곡하게 가르치신 것은 참으로 자애로운 성의(聖意)와 사물(事物)에 부응하는 지극한 가르침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불초하고 불민해 만분의 일도 우러러 본받지 못했고 작년 5월에 반성하겠다고 한 말 또한 한두 가지도 실천하지 못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황공하고 부끄러움이 갑절이나 되어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겠다. 성실히 강학(講學)하지 못하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지 못한 것은 어느 것도 내 허물이 아닌 것이 없다. 어제 두 대신이 반복해 경계해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끝없이 후회할 뿐이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끝없이 후회할 뿐이다. 지금부터 통렬히 스스로 꾸짖고 깨우쳐 장차 모든 일에 허물을 보충해 이전의 기질과 습관을 한번에 바꾸려고 한다. 만약 혹시라도 실행하지 못하고 작년처럼 된다면, 이것은 내 잘못이 더욱 심한 것이다. 아! 조정의 신하들은 나의 이 뜻을 체득해 일마다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 영조 33년(1757) 11월 11일
동일한 표현을 거듭 반복한 부분은 반성의 깊이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의 크기를 보여주는 측면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왕은 아들의 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ㆍ좌의정 김상로(金尙魯)ㆍ우의정 신만(申晩)ㆍ좌참찬 홍봉한과 양사(兩司)의 장관(長官)ㆍ유신(儒臣)이 모두 입궐했다. 초경(初更. 19∼21시)에 국왕은 최복(衰服: 상복의 하나)을 입고 걸어서 숭화문(崇化門) 밖에 나와 맨땅에 엎드려 곡을 했고, 동궁도 최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었다.
신하들이 엎드려 울면서 “전하께서 어찌 이런 거조를 하십니까?”고 묻자 국왕은 대답했다. “승지가 동궁의 글을 가지고 와서 아뢴 것에 ‘뉘우쳐 깨달았다’는 말이 있으므로 얼른 지나쳐 보고는 놀라고 기쁨을 금치 못해 경들을 불러 자랑하고 칭찬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정신을 쏟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동궁을 불러 ‘지금 네가 뉘우친 것은 어떤 일이냐?’고 물었지만, 동궁은 대략만 말하고 끝내 시원하게 진달하지 못했다.”
이때 신하들이 세자를 두둔하면서 그 까닭을 설명한 부분은 매우 주목된다. 유척기ㆍ홍봉한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은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특히 홍봉한은 “동궁은 보통 때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알고 있는 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밤 동궁은 물러나와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해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청심환을 먹고 한참 뒤에야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두 겨울 밤 늦게 벌어진 이 세 번의 사건은 그 무렵 부왕과 세자의 관계를 깊이 비춰준다. 특히 그때 22세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기절했다가 한참만에야 깨어난 맨 뒤의 사건은 극한적인 감정의 충격을 보여준다.
이런 세자의 정신적 질환은 2년 정도 전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영조 31년(1755) 약방 도제조 이천보(李天輔)는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고 아룄다(4월 28일).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원인을 의대증(衣帶症)이라고 지적했다. 그 증상은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임오화변(壬午禍變: 영조 38년 윤5월 세자가 뒤주에 갇혀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 당일의 기록에서도 “정축년(1757. 영조 33)ㆍ무인년(1758)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 궁중의 계집종)와 환시(宦侍: 내시)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다.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요컨대 세자는 20세 무렵 부왕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신적 질환에 걸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때 질환이 표면에 드러났으니, 그 원인과 징후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아마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후일 것으로 여겨진다. 국무를 맡긴 뒤부터 부왕은 세자를 더욱 자주 질책했고, 세자는 부왕은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었다. 그 결말은 참혹한 비극이었다.

http://bit.ly/1CeTjMM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비밀의 문이란 드라마를 보니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선위를 자주 하여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난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자게 사도세자를 힘들게 하는 선위파동을 일으킨다. 사전적으로 선위[禪位]란 왕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다. 양위 [讓位]란 임금이 왕위(王位)를 물려주는 것으로 유사어는 선양(禪讓)과 선위(禪位)라고 하여 구별이 안되고 있다.
양위 : 왕실인사중 뛰어난 이에게 물려준다.
선위 : 천하의 인재를 두루 살펴 출신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이에게 물려준다.
선위는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으므로 왕조가 바뀌는 경우가 흔하며 나라가 바뀐다.
예를 들면 고려 공양왕 (왕씨)가 조선 태조 (이성계 씨)에게 하는 왕조와 나라가 한꺼번에 바뀐 케이스는 선위이다.
조선 정종이 조선 태종에게 임금을 양보하는 것은 왕조도 나라도 달라지지 않은 케이스로 양위라고 한다.

禪(봉선, 양보하다, 전하다 선; ⽰-총17획; chán,shàn)를 보면 유비의 아들 촉나라의 후주인 유선이 재위 40년 째인 264년에 등애(鄧艾)의 기습 공격으로 수도인 성도(成都)가 위태로워지자, 그해 겨울에 위에 항복하였다. 이후 종회(鍾會)와 강유가 촉 회복 운동, 즉 위나라에 대한 반란을 꾀하다가 토벌된 뒤, 낙양(洛陽)에 압송되어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졌다. 위왕 조조가 살았을 때는 제위를 유지하였지만,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대에 이르러 조비의 신하들이 헌제에게 제위의 선양을 강요한다. 강요를 감당할 수 없는 헌제는 조비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하는데, 조비는 고사를 본받아 짐짓 선양을 거부하다가 이내 수락한다. 결국 수선대에서 선양식이 거행되고 결국 4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 한 황조는 이로써 완전히 멸망한다. 헌제는 선양한 이후 산양공으로 격하되었다. 즉 한나라 헌제에서 위나라 조비로 완전히 성씨와 나라가 달라질때만이 선위[선양]이라고 불릴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비밀의 문에 나오는 선위를 하겠다는 말은 말이 안되고 양위로 정정해야 한다.
우리 몸에 생긴 흉터도 멀리서 보면 정상 피부와 비슷하여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보면 흉터를 인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작은 흉터는 성형수술 흉터, 대상포진 흉터, 수두 흉터등이 있다. 글자 한자 차이라고 생각하여 사소한 흉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얼굴에 만약 흉터가 존재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런 경우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 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한다.

단테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명언과 침묵하는 흉터

단테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명언과 침묵하는 흉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노라고 역사는 기록하게 될 것이다 (History will have to record that the greatest tragedy of this period of social transition was not the strident clamor of the bad people, but the appalling silence of the good people).”
그는 “악한 사람들의 죄뿐 만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지는 침묵을 뉘우쳐야 한다 (Not only will we have to repent for the sins of bad people; but we also will have to repent for the appalling silence of good people).”고 누차 말합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 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나치시대 독일 신학자)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가장 먼저 예약되어 있다. -단테

중도는 중용이 아니며 회색분자일 뿐이고, 침묵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몸의 흉터도 정상 피부로 변하지 않고 침묵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흉터부위를 아프게 하고 염증을 유발시키며 자극해서 잠을 깨우면 치료가 된다. 흉터 치료의 대상은 점뺀 흉터나 긁힌 흉터, 성형흉터, 맹장수술등 외과수술흉터, 화상흉터, 암수술흉터등이 있다.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비밀의 문 영조의 선위와 도적적인 왕위 양보는 없다 흉터치료

비밀의 문 영조의 선위와 도적적인 왕위 양보는 없다 흉터치료


2014년 9월 22일 SBS ‘비밀의 문’ 1회에서는 영조(한석규 분)와 아들인 사도세자 이선(이제훈 분)을 중심으로 궁궐내 왕과 신하, 세자 사이의 세력 다툼이 세밀하고도 강렬하게 방송되었다.
말미에 이르러 영조는 탕약을 먹이려는 신하들을 향해 “선위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영조는 습관적으로 ‘선위’를 행해왔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선이 나서서 먹지도 잠자지도 못한채 눈과 비바람을 무릅쓰고는 신하들과 함께 영조를 향해 “선위를 거둬달라”고 석고대죄를 하였다.
선양(禪位, 禪讓)은 군주가 혈연관계가 없는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다. 중국의 신화 시대에 성천자(聖天子)로 일컬어지는 요·순·우(禹)가 차례로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전설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요가 아들 단주(丹朱)를 제치고 순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과, 순이 아들 상균(商均)을 제치고 능력을 갖춘 인재인 우를 후계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 선양 전설의 요체이다.
선양은 신화 속 태평성대의 군주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칭송을 되었으며, 이상적인 군주 교체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비자와 죽서기년에 따르면 요와 순의 선양은 허구였으며 순이 요를, 우는 순을 무력으로 몰아내거나 감금하고 자신들이 제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실제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을 할 때 강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죽서기년은 기록하는데 아버지 고수와 요임금이 신하로 북면을 한 채로 서고 순임금이 임금노릇을 해서 하늘에 두 태양이 있었다고 한다. 또 순임금은 우임금에게 선양을 했지만 결국 우임금에게 죽임을 당해 아황과 여영 두 순임금 부인이 울어 상의 대나무가 피눈물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즉 도덕적인 이상으로 권력을 양보하는 선양이란 것은 없는 것이며, 아들 사도세자를 영조가 뒤주에 가두어 죽이듯 부자 관계에서도 권력은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태조는 이방원이 주도한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사망하자 이후 정종에게 선위한 것을 시작으로, 정종이 태종에게, 그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했다. 사실 태조와 정종은 태종의 위협에 어쩔수 없이 왕위를 사직한 것이고 태종은 세종의 외척을 죽이는등 악역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선양을 했지만 군사나 모든 권력을 사실상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119회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http://upaper.net/homeosta/1009512  유페이퍼 전자책 참조
조비가 한나라 헌제를 겁박하고 왕후를 죽이면서 강제로 협박을 속이고 헌제에게 위협적으로 왕위를 받은 것에 이어서 사마염이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을 협박해 같은 방식으로 선위를 받는 장면이 있다.
炎直入後宮,奐慌下御榻而迎。
염직입후궁 환황하어탑이영.
사마염이 직접 후궁에 들어가니 조환은 당황하여 어탑에서 내려와 맞이하였다.
炎坐畢,問曰:“魏之天下,誰之力也?”
염좌필 문왈 위지천하 수지력야?
사마염이 앉길 마치고 물었다. “위나라의 천하는 누구의 힘입니까?”
奐曰:“皆晉王父祖之賜耳。”
환왈 개진왕부조지사이.
조환이 말하였다. “모두 진왕 부친과 조부의 하사일 뿐입니다.”
炎笑曰:“吾觀陛下,文不能論道,武不能經邦。何不讓有才德者主之?”
염소왈 오관폐하 문불능논도 무불능경방. 하불양유재덕자주지?
사마염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폐하를 보면 문장으로도 도를 논의하지 못하고 무력으로도 나라를 경영하지 못합니다. 어찌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여 주관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奐大驚,口噤不能言。
환대경 구금불능언.
조환이 크게 놀라서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였다.
傍有黃門侍郎張節大喝曰:“晉王之言差矣!昔魏武祖皇帝,東蕩西除,南征北討,非容易得此天下﹔ 天子有德無罪,何故讓與人耶?”
방유황문시랑장절대갈왈 진왕지언차의! 석위무조황제 동탕서제 남정북토 비용이득차천하. 천자유덕무죄 하고양여인야?
곁에서 황문시랑인 장절이 크게 꾸짖었다. “진왕의 말이 틀렸소! 예전에 위나라 무조황제는 동쪽으로 씻고 서쪽으로 제거하며 남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함에 쉽게 이 천하를 얻지 않았소. 천자는 덕이 있고 죄가 없는데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주오?”
炎大怒曰:“此社稷乃大漢之社稷也。曹操挾天子以令諸侯,自立魏王,篡奪漢室。吾祖父三世輔魏,得天下者,非曹氏之能,實司馬氏之力也,四海咸知。吾今日豈不堪紹魏之天下乎?”
염대노왈 차사직내대한지사직야. 조조협천자이령제후 자립위왕 찬탈한실. 오조부삼세보위 득천하자 비조씨지능 실마사씨지력야 사해함지. 오금일기불감소위지천하호?
사마염이 크게 분노하여 말했다. “이 사직은 거대한 한나라의 사직입니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스스로 위왕에 오르며 한나라 황실을 찬탈했습니다. 내 조부는 3세대로 위나라를 보필하여 천하를 얻으니 조씨의 능력이 아니라 실제로 사마씨의 힘임을 천하가 다 압니다. 내가 금일 어찌 위나라의 천하를 이어받길 감당하지 못합니까?”
節又曰:“欲行此事,是篡國之賊也!”
절우왈 욕행차사 시찬국지적야!
조절이 또 말했다. “이 일을 행하려면 나라를 찬역한 도적이오!”
炎大怒曰:“吾與漢家報讎,有何不可!”
염대노왈 오여한가보수 유하불가?
사마염이 크게 분노하여 말했다. “나는 한나라 황실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는데 어찌 불가하오?”
叱武士將張節亂棍打死於殿下。
질무사장장절난과타사어전하.
사마염은 무사를 꾸짖어 장절을 대전아래에서 어지러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奐泣淚跪告。
환읍루궤고.
조환은 울면서 꿇어앉아서 고하였다.
炎起身下殿而去。
염기신하전이거.
사마염은 몸을 일으켜 대전을 내려갔다.
奐謂賈充、裴秀曰:“事已急矣,如之奈何?”
환위가충 배수왈 사이급의 여지내하?
조환이 가충, 배수를 불러서 말했다. “일이 이미 급하니 어찌해야 하오?”
充曰:“天數盡矣,陛下不可逆天,當照漢獻故事,重修受禪壇,具大禮,禪位與晉王:上合天心,下順民情,陛下可保無虞矣。”
충왈 천수진의 폐하불가역천 당조한헌고사 중수수선단 구대례 선위여진왕. 상합천심 하순민정 폐하가보무우의.
가충이 말했다. “천수가 다하니 폐하께서는 하늘을 거스르지 말고 한나라 헌제가 바친 고사를 비추어서 거듭 선양의 제단을 수리하여 큰 예를 갖추고 진나라 왕에게 선위를 하십시오. 위로 하늘의 마음에 합당하며 아래로 백성의 정에 순종하니 폐하께서 근심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奐從之,遂令賈充築受禪壇。
환종지 수령가충축수선단.
조환이 따라서 곧 가충을 시켜 수선단의 제단을 만들게 했다.
以十二月甲子日,奐親捧傳國璽,立於壇上,大會文武。
이십이월갑자일 환친봉전국새 입어단상 대회문무.
12월 갑자일에 조환은 친히 전국옥새를 받들어서 제단위에 서서 크게 문무관리를 모았다.

請晉王司馬炎登壇,授與大禮。
청진왕사마염등단 수여대례.
조환은 진왕인 사마염을 청하여 제단에 오르게 하며 대례를 주었다.
奐下壇,具公服立於班首。
환하단 구공복입어반수.
조환이 제단에서 내려와서 공으로 반열의 첫머리에 복종하고 섰다.
炎端坐於壇上。
염단좌어단상.
사마염은 제단위에 단정하게 앉았다.
賈充、裴秀列於左右,執劍,令曹奐再拜伏地聽命。
가충 배수열어좌우 집검 령조환재배복지청명.
가충, 배수는 좌우에 배열하여 검을 잡고 조환을 시켜 두 번 땅에 엎드려 명령을 듣게 했다.
充曰:“自漢建安二十五年,魏受漢禪,已經四十五年矣﹔ 今天祿永終,天命在晉。司馬氏功德彌隆,極天際地,可即皇帝正位,以紹魏統。封汝爲陳留王,出就金墉城居止﹔ 當時起程,非宣詔不許入京。”
충왈 자한건안이십오년 위수한선 이경사십오년의. 금천록영종 천명재진. 사마씨공덕미륭 극천제지 가즉황제정위 이소위통. 봉여위진류왕 출취금용성거지 당시기정 비선조불허입경.
가충이 말했다. “한나라 건안 25년[220年]이래로 위나라는 한나라의 선양을 받은지 이미 45년이 경과하였소. 지금 천록이 영원히 마쳐서 천명이 진나라에 있소. 사마씨는 공덕이 더욱 융성하며 하늘에 지극하며 땅 끝에 이르니 황제의 바른 위치에 즉위하여 위나라의 대통을 이을 수 있소. 당신을 진류왕으로 봉하여 금용성에 나아가 거처하시오. 당시 여정을 떠나서 조서가 아니면 수도에 들어옴을 허락하지 않소.”
奐泣謝而去。
환읍사이거.
조환은 울면서 감사하고 갔다.
太傅司馬孚拜於奐前曰:“臣身爲魏臣,終不背魏也。”
태부사마부배어환전왈 신신위위신 종불배위야.
태부 사마부가 조환앞에 절하면서 말했다. “신의 몸은 위나라 신하로 종내 위나라를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炎見孚如此,封孚爲安平王。
염견부여차 봉부위안평왕.
사마염은 사마부가 이와 같음을 보고 사마부를 안평왕에 봉했다.
孚不受而退。
부불수이퇴.
사마부는 받지 않고 물러났다.
是日,文武百官,再拜於壇下,三呼萬歲。
시일 문무백관 재배어단하 삼호만세.
이 날 문무백관은 다시 제단아래에서 절하고 세번 만세를 불렀다.
炎紹魏統,國號大晉,改元爲泰始元年,大赦天下。
염소위통 국호대진 개원위태시원년 대사천하.
사마염이 위나라 대통을 잇고 국호를 대진으로 하며 연호를 태시원년으로 바꾸고 천하에 큰 사면을 내렸다.
魏遂亡。
위수망.
위나라가 곧 망했다.
필자는 4서중 하나인 맹자를 쓴 맹자에 대해서 단 하나의 불만은 순임금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 미화했다는 점인데 위인전에서 어린시절을 좋게 쓰거나 위인을 조건없이 선행만 했다는 식으로 하는 것과 같이 전국시대 본받을 사람이 없어서 순임금을 존경할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왕위를 찬탈한 순을 선양이란 방식으로 미화하였는데, 왕위를 빼앗았다는 순자나 여씨춘추의 역사 내용과 다르다.

삼국지연의는 소설이지만 선위를 도덕적인 양보로 다른 역사책에서는 미화하는 반면에 역사적인 기록을 사실적으로 가감없이 그려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위해 물러나야 할 피부에서 물러나지 않는 흉터가 존재한다. 즉 흉터란 상처가 생기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생기는데 상처가 아물고 피부가 정상적인 방향으로 되찾으면 물러나야 한다.
흉터가 발생하면 6개월-1년까지는 저절로 흉터가 줄어드는 듯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연적인 정상적 피부 복원이 어려워 이미지한의원에서 섬유아세포를 자극해 콜라겐을 재생하는 흉터침과 한약재생약침, 침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영조의 독살과 천출 두가지 콤플렉스와 흉터치료

영조의 독살과 천출 두가지 콤플렉스와 흉터치료


2014년 9월 23일 10시의 SBS 드라마 ‘비밀의 문’에선 영조(한석규 분)가 김택(김창완 분)과 ‘맹의’를 두고 독대하였는데 ‘맹의’는 극 중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수장 영의정 김택의 협박에 못 이겨 강제로 수결했던 문서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맹의는 경종의 독살설과 관련된 내용인 듯하다.
또 내용을 보면 영조는 물건을 내동댕이치고, 정사를 안돌보고 낚시를 하거나 선위를 하겠다는 기행을 자주 보이는것도 그의 두가지 콤플렉스 때문이다.
첫째는 경종을 죽였다는 독살설이며 둘째는 무수리의 천출 소생이었다.
경종은 말엽에 병환으로 기운을 잃고 잘 먹지 못했는데 게장과 생감을 올리자 웬일로 맛있다고 잘 먹었다. 다음날부터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고 그 후 다시 건강 상태가 악화된다. 경종의 죽음이 오늘내일하자 세제 연잉군이 우왕좌왕하면서 뚜렷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던 어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들게 했다. 경종은 연잉군의 처방 후 잠시 기운을 되찾는 듯 했으나 얼마 안가 다시 건강 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승하했다. 그 때문에 신임옥사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세제와 가까운 사람들이였다는 정황 증거 때문에 소론을 중심으로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상극이라 몸에 안 좋기는 한데, 죽을 정도는 절대 아니고 어의가 처방한 약과 연잉군이 올린 인삼차가 상극이다. 영조 본인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것이 비전문가이면서 어의의 처방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했다. 심지어 이러면서 영조는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라고 했다. 게는 식중독균의 번식이 대단히 잘 되는 고단백 식품인데다 감은 수렴 작용을 하는 타닌 성분이 있어 소화불량을 수반하는 식중독의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사방이 정적들로 둘러싸인 와중에 어의의 의견을 비난하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연잉군이 경종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연잉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정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나름대로 오래 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보위를 이어받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본인 입장에서도 편했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퍼져 있었던 이야기로 경종이 죽은지 31년이 지난 후에 영조가 친림하던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를 찬탈자에 독살자라고 마구 욕한 내용을 써서 냈다가 친국을 받던 죄인 중 하나인 신치운이 "신은 갑진년(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이외다."라고 영조의 면전에서 대놓고 디스를 했다는 기사가 실록에도 나온다. 영조는 즉위 내내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비난으로 끝난게 아니라 이인좌 등이 선왕의 원수를 갚자는 복수설치의 기치를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터지면서 소론, 남인의 음모론 신봉이 단순 뒷담이 아니라 국가를 흔들 수 있는 내전으로 번질수도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후로도 무신년의 배반자인 전 전라감사 정사효 등이 역모를 꾸몄고 영조 31년에은 윤지의 나주괘서사건이 있었으며 심정연, 신치운 등의 왕의 친림시험장 테러사건이 터진다.  영조 31년(1751)에 이르면 천의소감의 저술을 지시하여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알리는데 그 중 '내가 게장보낸게 아니라고 이놈들아!'라고 공개적으로 독살설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른다. 경종은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당쟁의 대격분(大激憤)으로 사약(死藥)을 마신 것을 목도(目睹)한 후 심질(心疾)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숙종은 경종의 후사(後嗣)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였다.(정유독대) 당시 숙종이 이이명을 불러 독대함에 연잉군이 무수리의 자식이라며 은연히 멸시하던 소론이 이를 알고 왕세자의 대를 연잉군에게 결코 넘길 수 없다며 반발하여 상소를 올려 이이명은 물론 숙종까지 격렬히 비난하였다. 이이명을 비롯한 노론은 연잉군에 동조적이라 연잉군을 어떻게든 비호하려 해 살얼음 같던 소론과 노론의 당쟁이 이 독대로 격화되어 전장을 방불케했다.
경종 즉위년(1720년)에 왕세자가 즉위하자 훗날 영조가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이때를 말할만치 소론과 노론의 당쟁이 홍수 터지듯 밀려왔으며 경종은 큰 방향만을 보일 뿐 당쟁은 지켜만 보았다. 왕세제의 제 자만 튀어나와도 소론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 정국에서 노론인 김창집(金昌集) 등이 결사적으로 왕세제 책봉을 상소했으나 소론인 유봉휘(柳鳳輝) 등이 격렬히 논박하였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1724년 김일경과 목호룡이 경종독살설을 주장한 것과 국왕인 그에게 왕이라 칭하지 않고 너, 그대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게 된다.

둘째로 영조는 숙종의 서장자(차남)로 태어나 1699년(숙종 25년) 연잉군(延礽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재주가 있어 궁중에 드나들었으나 궁인이 갖출 기품과 덕목이 없어 천대받아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숙종은 무수리 최씨가 기품이 없더라도 재주가 값어치 있다라 여겨 그 아들을 배게 하였다고 여겨진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 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았다. 은근한 멸시를 받았지만 왕의 아들인지라 대우가 그리 박복하지는 않아 모자람 없이 자랐다. 무수리의 서자라는 사실과 왕의 아들로서 핏줄 이 두 가지는 그의 남은 삶을 규정짓게 된다. 그는 즉위 후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으로 최선을 다했다라 여겨 왕비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조선 최초로 서자 출신으로 왕이 된 선조도 콤플렉스 때문에 신하들에게 업신여길까봐 두려워 신하를 동인과 서인 둘로 나눠 당쟁이 일어나고,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것도 비슷하다. 영조도 겉으로는 탕평책을 지시했지만 노론만을 대우했고, 결국 조선의 영조와 정조 르네상스와 실학은 완전히 허구적인 소설같은 말도 안되는 사상이다. 게다가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임으로써 자식죽인 아버지란 콤플렉스가 추가되어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었고, 불쌍한 세손인 정조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였고 자기 풍산홍씨 처가도 가담 했다는 분노와 화병 더하기 콤플렉스로 단명하여 치세를 이루지 못하고 세도정치로 빠지게 되어 조선이 망하게 된다.
콤플렉스(독일어: komplex) 또는 컴플렉스(영어: complex)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으로 사람의 마음 속의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힘의 존재를 의미한다. 감정 복합, 즉 필링 톤드 콤플렉스(Feeling Toned complex)라고도 불린다. 사람들은 누구나 약하거나 강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으며, 그 적용 범위는 공통의 가치관이 통용되는 범위에 따라 각 개인의 콤플렉스에서 나아가 집단의 콤플렉스, 사회의 콤플렉스로 확장되기도 한다. 예로는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가 있다. 콤플렉스는 상황을 왜곡하여 보게 하며 그 세기에 따라 많은 상황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생각, 감정,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면 콤플렉스는 삶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흉터가 있는 경우에도 콤플렉스를 가지기 쉽다. 왜 흉터가 있을 때 부모가 잘 돌봐주지 않는가 하는 원망부터 그 때 그시절로 돌아가면 다시 상처와 흉터가 없게 하겠다는 자책감, 대인기피증, 우울증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콤플렉스는 의학적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베인 흉터, 긁힌 흉터, 꿰맨 흉터, 넘어진 흉터, 성형 수술후 흉터, 외과 수술후 흉터, 교통사고 흉터 정형 외과 흉터등 다양한 흉터를 치료할수 있다. 특히 화상흉터와 갑상선 수술 흉터, 코 수술 흉터, 점뺀 흉터, 수두 흉터에 장점이 있다.

다큐 마지막까지 젊고 싶은 당신과 동안침 mtm치료

다큐 마지막까지 젊고 싶은 당신과 동안침 mtm치료

MBC TV '다큐스페셜'은 2014년 9월 22일 밤 11시15분 '마지막까지 젊고 싶은 당신, 젊음 연장법'을 방송한다.  동안 시술의 효능과 젊게 보일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알아보고, 인위적 젊음이 평생 지속될 수 없다면 나이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제작진은 "동안으로 만들어준다는 시술의 종류가 천차만별이지만 이들 동안 시술은 비용과 시간부담이 너무 크며 그 효능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보톡스와 필러는 지속기간이 짧고 비대칭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으며, 중국인이 시술받았던 귀앞을 당겨주는 안면거상술은 귀앞의 피부를 잘라 피부를 팽팽해주게 하는 대수술로 마취가 필요하고, 실을 넣는 동안요법[실 리프팅]은 작용기간이 짧고 부작용등이 있을 수 있었다.
한 미국의 성형외과 의사는 뼈 임플란트를 말했는데 최근 동안 시술은 피부만 치료하므로 표피적인 치료만 하게 된다. 우리가 골밀도가 낮아져 뼈 손실이 일어나 눈이 들어가는 안와부위도 면적이 넓어지는데 뼈와 근육이나 결합조직도 소실되기 때문에 결국 피부적인 치료만으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6개월 이후에 비포어 애프터를 비교해보니 처음에 시술직후에 만족한 분들도 반년이 지나서 처음상태와 비슷해짐을 확인해볼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대표적인 동안 시술의 전과정과 이후 변화를 약 8개월간 관찰한 결과를 공개하며 결국 몸짱이 되어야 얼굴도 젊어진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왜 얼굴보다 몸인가?
2014년 8월 한 시민단체에서 주최한 보디빌딩 대회에서 참가자 100여 명 중 여자 부문 1위를 차지한 이는 52세의 이모씨다. 그녀가 이런 몸매를 갖게 된 건 8년 전 본격적으로 근육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하루 2시간씩 다섯 가지 근육운동을 하고 단백질과 채소 위주의 식단을 지켜온 것이 그 비결이다. 그녀는 40대부터 자식이 다 대학생이 되고 빈둥지 증후군을 앓아서 우울증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몸이 점차 좋아져서 전문 피트니스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또띠아에 피자처럼 먹는 것도 즐기지만 절대 짜게 먹지 않고 또 단백질인 생선, 고기등은 끼니때마다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장 본인이 추천하고 싶은 운동은 역기를 들면서 하는 스쿼트였는데 힙업이나 중력을 거슬러 여러 좋은 작용이 있다고 했다.
잠깐 중간에 이씨의 수제자처럼 나온 여성이 있는데 본인은 기혼처럼 보이는데 미혼처럼 보인다는 박모씨가 등장했는데 필자 한의원에서 튼살 치료를 받는 여성이어서 매우 반가왔다.
세미누드집을 내면서 '몸짱 의사'로 유명해진 서울대 흉부외과 김 교수 역시 꾸준한 근력운동으로 젊음을 되찾은 사례다. 김 교수는 근육 운동이 특히 젊음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근육이 많아지면 그만큼 기초 대사율이 높아진다. 똑같은 음식물을 섭취하고 똑같은 활동을 하면서 남보다도 더 효과적인 체중 조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헬스클럽에서 일주일에 1시간씩 두 번, 주말에는 탄천변을 달리기만 한다고 하는데 적은 운동량에 비교하여 근육을 키우는 효과가 크며 60대가 되어 하지정맥류 수술을 하여도 20대와 마찬가지로 지치지 않는다고 한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도보여행을 시작했다는 전직교사인 황안나씨(75)는 여행을 시작한 후 스스로에게 감동할 일이 많아졌고, 할 일도 많고 해보고 싶은 일도 많아서 나이들 새도 없다고 말한다.  황안나씨가 생각하는 젊음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나더러 이제 검버섯도 좀 빼고 보톡스도 좀 맞아라 이러는데 내가 말하는 젊음은 내가 100킬로 걸을 적에 젊은이들이 대학생들이 포기를하길래 니들 나보다 더 늙었구나 그런 젊음을 말하는 거에요. 끊임없이 도전하고 꿈을 가지고 도전하고 그런 게 젊음이지.”
다큐를 보니 처음 예상처럼 피부과적인 시술을 예찬하겠다는 생각과 달리 건전하게 몸짱이 결국 얼굴동안이 되며, 게다가 젊어졌다는 생각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너무 운동을 하면 활성산소가 많아서 노화를 촉진할 수 있으며 특히 야외에서 운동활동은 피부에 적일수도 있다.
특히 심한 운동을 하면 주름이 져 보일 수 있으니 선수같은 너무 극심한 운동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젊어지게 될수 있을까? 첫째 피부가 동안으로 보일려면 mtm시술을 받으면 피부가 밝아지고, 모공이 줄어들고, 피부 탄력이 좋아지게 한다. 둘째 피부 밑에 근육이 탱탱하고 리프팅을 주려면 이미지한의원의 표층근건막을 좋게 하는 도안침 치료를 받는 것이 있다. 동안침은 녹는 실을 주입함과 또 침 자체만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다큐에서 소개된 안면거상술 때문에 귀 앞과 귀 옆뒤에 흉터가 생기는 경우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과 한약 재생약침을 시술 시도해볼 수 있다. 안면거상술은 처음에 주름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지만 나중에 흉터가 벌어지게 되어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음식물 믹서에 갈면 폭발위험과 화상과 베인 흉터치료

뜨거운 음식물 믹서에 갈면 폭발위험과 화상과 베인 흉터치료


2014년 9월 22일 월요일 위기탈출 넘버원 450회를 보니 MC는 김종국, 정태호, 김지민, 이슬기 아나운서가 특별MC로는 조우종, 김종민, 사유리가 출연했다.
안전사용설명서 '믹서로 갈아만든 음식, 독이 될 수 있다?' 편을 보니
당뇨 환자 : 대추, 구기자, 산수유, 복분자, 오디
간 질환 환자 : 칡, 헛개나무
신장질환 환자 : 배, 사과, 감귤, 양파등 과채류 즙을 피할 것
사과는 청산 성분이 있는 씨를 제거해야 한다.
위와 같은 내용이 등장했는데 한의사의 상담에 따라 체질을 따라 한약재를 사용하면 특정 질병에 따라 갈아 먹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믹서 안전하게 사용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칼날을 손으로 만지는 행위는 절대 금물이다.
칼날에 낀 음식물을 제거할 땐 반드시 전원을 찬단, 도구를 이용해 제거해야 한다.
믹서 보관 시에는 아이들이 닿지 않도록 보관한다.
믹서로 간 음식은 미생물의 번식이 빨라 변질의 위험이 있다. 믹서의 세균실험을 해보니 행주보다 더 세균이 많이 검출되며 칼날이 빠지지 않는 믹서의 경우 소다와 식초를 섞은 물로 10초간 믹서를 돌려준다.
아이돌 그룹을 앞세워 믹서로 핸드폰, 벽돌등을 가는 실험을 했는데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분명히 따라할 어린이들이 보는 상황에서 믹서로 갈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행위는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역할극을 보니 이른 아침, 새 신부 태진씨는 남편을 위해 푸짐한 아침 주스를 만드는데 태진씨가 만든 웰빙 모닝주스의 주인공은 바로 새신랑 유민상씨이다. 그러던 중 태진씨는 새신랑 민상씨의 건강을 위해 해독주스를 만들던 중 믹서가 터져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믹서를 터지게 한 태진씨의 이 실수는 뜨겁게 삶은 야채를 식히지 않고 바로 갈아서 과열된 믹서가 열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다친 것이다. 실제 실험을 해보니 열화상카메라로 찍어보니 바로 뜨겁게 붉은 색을 띠고 결국 폭발하여 믹서 유리가 박살나게 되었다. 즉 식품의 열+믹서로 간 마찰열로 폭발이 되고 화상을 유발할 수 있다. 절대로 뜨거운 액체 재료를 넣고 믹서를 사용하지 말라는 믹서의 주의사항설명서도 있다.
화상이 발생하면 응급실에서 처치를 한다지만 흉터는 어찌할 것인가? 이미지한의원에서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또 믹서는 부주의로 손가락 절단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데 수지 접합 수술 이후에도 흉터가 남을 수 있는데 이미지한의원의 수술후 흉터침인 OT침, 한약, 재생약침, 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또 믹서로 찢어진 피부로 봉합이후에도 꿰맨 봉합흉터가 남을 경우 이미지한의원에서 흉터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2014년 9월 21일 일요일

THE SACRED BOOKS OF THE EAST 27

THE SACRED BOOKS OF THE EAST 27


THE MEANING OF THE INTERCHANGE OF MIS-
SIONS BETWEEN DIFFERENT COURTS 1 .

1. According to the ceremonies in missions, a
duke of the highest grade sent seven attendants
with (his representative) ; a marquis or earl, five ;
and a count or baron, three. The difference in
number served to show the difference in rank of
their principals 2 .

2. The messages (between the visitor and the
host) were passed through all the attendants, from
one to another. A superior man, where he wishes
to do honour, will not venture to communicate
directly and in person. This was a high tribute
of respect.

3. The message was transmitted (only) after the
messenger had thrice declined to receive (the cour-
tesies offered to him at the gate) ; he entered the gate
of the ancestral temple after thrice in the same way
trying to avoid doing so ; thrice he exchanged bows
with his conductor before they arrived at the steps ;
and thrice he yielded the precedence offered to him
before he ascended the hall : — so did he carry to

1 See introductory notice, vol. xxvii, pages 58, 59.

2 If the ruler went in person on the mission, he had in every
case, according to his rank, two attendants more than the number
specified for his representative.



BK. XLV.



phing i. 459



the utmost his giving of honour and yielding
courtesy.

4. The ruler sent an officer to meet (the messen-
ger) at the border (of the state), and a Great officer
to offer him the customary presents and congratula-
tions (after the toils of the journey) in the suburb
(near the capital) ; he himself met him and bowed
to him inside the great gate, and then received him
in the ancestral temple ; with his face to the north
he bowed to him when the presents (which he
brought) were presented, and bowed again (when
his message was delivered), in acknowledgment of
its condescension : — in this way did he (on his part)
testify his respect.

5. Respectfulness and yielding courtesy mark the
intercourse of superior men with one another.
Hence, when the feudal lords received one another
with such respectfulness and yielding courtesy, they
would not attack or encroach on one another.

6. A high minister is employed as principal usher
(for the messenger), a Great officer as the next, and
(ordinary) officers acted as their attendants. (When
he had delivered his message), the ruler himself
showed him courtesy, (and presented to him the
cup of new liquor). He had his private interviews
(with the dignitaries and Great officers of the
court), and also with the ruler l . (After this), sup-
plies of animals, slaughtered arid living, were sent
(to his hotel). (When he was about to take his
departure), the jade-symbols (by which he was
accredited) were returned to him, and the return

1 At these interviews, after he had discharged his mission and
presented the gifts from his ruler, he presented other gifts on his
own account.



460 THE Li Kl.



BK. XLV.



gifts (of silk and other things) presented at the
same time. He had been entertained and feasted.
All these observances served to illustrate the idea
underlying the relations between ruler and minister
in receiving visitors and guests \

7. Therefore it was a statute made by the son of
Heaven for the feudal lords, that every year they
should interchange a small mission, and every three
years a great one : — thus stimulating one another
to the exercise of courtesy. If the messenger com-
mitted any error in the exchange of his mission,
the ruler, his host, did not personally entertain
and feast him : — thereby making him ashamed, and
stimulating him.

When the princes thus stimulated one another to
the observance of the ceremonial usages, they did
not make any attacks on one another, and in their
states there was no oppression or encroachment.
In this way the son of Heaven cherished and
nourished them ; there was no occasion for any
appeal to arms, and they were furnished with an
instrument to maintain themselves in rectitude.

8. (The commissioners) carried with them their
jade-symbols, the sceptre and half-sceptre : — show-
ing the importance of the ceremony. On the
completion of their mission, these were returned
to them : — showing the small importance to be
attached to their value, and the great importance
of the ceremony. When the princes thus stimulated
one another, to set light by the value of the articles,
and recognise the importance of the ceremony, the
people learned to be yielding and courteous.

1 The entertainment took place in the open court ; the banquet
in the banqueting chamber.



BK. XLV. PHING 1. 46I

9. The prince of the state to which the mission
was sent treated his guests in this way : — Till their
departure from their coming, they were supplied
from the three stores (provided for such purposes).
Living animals were sent to them at their lodo-ine.
A provision of five sets of the three animals for
slaughter was made inside. Thirty loads of rice,
the same number of grain with the straw, and twice
as many of fodder and firewood were provided
outside. There were five pairs of birds that went
in flocks every day. All the attendants had cattle
supplied to them for their food. There was one
meal (a day in the court), and two (spare) entertain-
ments (in the temple). The banquets and occasional
bounties were without any definite number. With
such generosity was the importance of the ceremony
indicated 1 .

10. They could not always be so profuse as this
in antiquity in the use of their wealth ; but their
employment of it thus liberally (in connexion with
these missions) showed how they were prepared to
devote it to the maintenance of the ceremonies.
When they expended it as they did on the cere-
monies, then in the states ruler and minister did not
encroach on one another's rights and possessions,
and different states did not attack one another.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 kings made their
statute about these missions, and the feudal lords
did their utmost to fulfil it 2 .

1 The particulars here briefly mentioned and many others are to
be found in great detail in the 8th division of the I Li, Books 15-
18, which are on the subject of these missions.

2 About twenty years ago, when I had occasion to accompany
a mandarin from Canton to a disturbed district in the interior, he



462 THE LI A'l. BK. XLV.

1 1. The archery in connexion with these missions
was a very great institution. With the early dawn
they commenced it, and it was nearly midday be-
fore the whole of the ceremonies were concluded : —
it required men of great vigour and strength to go
through with it.

And further, when such men were about to
engage in it, though the liquor might be clear and
they were thirsty, they did not venture to drink of
it ; though the stalks of flesh were dry (and ready
to their hand), and they were hungry, they did not
venture to eat of them ; at the close of the day,
when they were tired, they continued to maintain
a grave and correct deportment. So they carried
out all the details of the ceremonies ; so they
maintained correctly the relation between ruler
and subject, affection between father and son,
and harmony between seniors and juniors. All
this it is difficult for the generality of men to do,
but it was done by those superior men ; and on
this account they were called men possessed of
great ability in action. The ascribing to them such
ability in action implied their possession of the sense
of righteousness ; and their possession of that sense
implied that they were valiant and daring. The

introduced one day in conversation the subject of these missions,
saying that they must have been a great drain on the revenues of
the ancient states, and that in the same way in the present day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s were burdened with many outlays
which should be borne by the imperial treasury. As resident
ambassadors from foreign nations had then begun to be talked
about, he asked whether China would have to pay their expenses,
or the countries which they represented would do so, and was greatly
relieved when I told him that each nation would pay the expenses
of its embassy.



BK. XLV. PHING i. 46



^



most valuable quality in a man who is bold and
daring is that he can thereby establish his sense of
righteousness ; the most valuable quality in him
who establishes that sense is that he can thereby
show his great ability in action ; the most valuable
quality in him who has that ability is that he can
carry all ceremonies into practice. In this way, the
most valuable quality in valiant daring is that its
possessor dares to carry into practice the rules of
ceremony and righteousness.

It follows from this that such men, bold and
daring, full of vigour and strength, when the king-
dom was at peace, employed their gifts in the
exercise of propriety and righteousness ; and, when
there was trouble in the kingdom, employed them
in the battle-field and in gaining victory. When
they employed them to conquer in battle, no enemies
could resist them ; when they employed them in the
exercise of propriety and righteousness, then obe-
dience and good order prevailed. No enemies
abroad, and obedience and good order at home : —
this was called the perfect condition for a state.
But when men, so endowed, did not use their
valour and strength in the service of propriety
and righteousness, and to secure victory, but in
strifes and contentions, then they were styled men
of turbulence or disorder. Punishments were put
in requisition throughout the kingdom, and the
(first) use of them was to deal with those same men,
and take them off. In this way (again), the people
became obedient and there was good order, and the
state was tranquil and happy.

12. 3 ze_ kung asked Confucius, saying, 'Allow
me to ask the reason why the superior man sets



4^4 THE LI A't. BK. XLV.

a high value on jade, and but little on soapstone ?
Is it because jade is rare, and the soapstone
plentiful ?'

13. Confucius replied, 'It is not because the
soapstone is plentiful that he thinks but little of it,
and because jade is rare that he sets a high value
on it. Anciently superior men found the likeness of
all excellent qualities in jade. Soft, smooth, and
glossy, it appeared to them like benevolence ; fine,
compact, and strong, — like intelligence ; angular, but
not sharp and cutting, — like righteousness ; hanging
down (in beads) as if it would fall to the ground, —
like (the humility of) propriety ; when struck, yield-
ing a note, clear and prolonged, yet terminating
abruptly, — like music ; its flaws not concealing its
beauty, nor its beauty concealing its flaws, — like
loyalty ; with an internal radiance issuing from it
on every side, — like good faith ; bright as a brilliant
rainbow, — like heaven ; exquisite and mysterious,
appearing in the hills and streams, — like the earth ;
standing out conspicuous in the symbols of rank, —
like virtue ; esteemed by all under the sky, — like
the path of truth and duty. As is said in the ode
(I, xi, ode 3, 1),

" Such my lord's car. He rises in my mind,
Lovely and bland, like jade of richest kind."

This is why the superior man esteems it so highly !.'



BOOK XLVI. SANG FO SZE ATH

OR

THE FOUR PRINCIPLES UNDERLYING THE DRESS

OF MOURNING 1 .

i. All ceremonial usages looked at in their
great characteristics are the embodiment of (the
ideas suggested by) heaven and earth ; take their
laws from the (changes of the) four seasons ; imitate
the (operation of the) contracting and developing
movements in nature ; and are conformed to the
feelings of men. It is on this account that they are
called the Rules of Propriety ; and when any one
finds fault with them, he only shows his ignorance
of their origin.

2. Those usages are different in their applications
to felicitous and unfortunate occurrences ; in which
they should not come into collision with one
another : — this is derived from (their pattern as
given by) the contracting and developing move-
ments in nature.

3. The mourning dress has its four definite
fashions and styles, the changes in which are
always according to what is right : — this is derived
from the (changes of the) four seasons.

Now, affection predominates ; now, nice distinc-
tions ; now, defined regulations ; and now, the
consideration of circumstances : — all these are

1 See the introductory notice, vol. xxvii, pp. 59, 60.
[28] H h



466 THE Li KI.



BK. XLVI,



derived from the human feelings. In affection we
have benevolence ; in nice distinctions, righteous-
ness ; in defined regulations, propriety ; and in the
consideration of circumstances, knowledge. Benevo-
lence, righteousness, propriety, and knowledge; —
these make up the characteristic attributes of
humanity.

4. Where the affection has been great, the
mourning worn is deep. On this account the
sackcloth with jagged edges is worn for the father
for three years : — the regulation is determined by
affection.

5. In the regulation (of the mourning) within the
family circle, the affection throws the (duty of public)
righteousness into the shade 1 . In the regulation
(of that which is) beyond that circle, the (duty of
public) righteousness cuts the (mourning of) affec-
tion short 1 . The service due to a father is employed
in serving a ruler, and the reverence is the same for
both : — this is the greatest instance of (the convic-
tion of the duty of) righteousness, in all the esteem
shown to nobility and the honour done to the
honourable. Hence the sackcloth with jagged edges
is worn (also) for the ruler for three years : —
the regulation is determined by righteousness.

6. The eating after three days ; the washing the
head after three months ; the sacrifice and change of
dress at the end of the first year ; the not carrying the
emaciation to such an extent as to affect life : — these
regulations were to avoid doing harm to the living

1 A son, on his father's death, is exempted from official duties
for a time ; but this exemption is suspended on occasions of
pressing exigency.



bk. XLVt. SANG FU SZE KIH. 467

(by the mourning) for the dead. Not protracting
the mourning rites beyond three years ; not mending
even the coarsest sackcloth ; making no addition to
the mound (raised at first) over the grave ; fixing
the day for the sacrifice at the end of the second
year ; playing (at first, on the conclusion of the
rites) on a plain, unvarnished lute : — all these things
were to make the people aware of the termination
(of the several rites), and constituted the defined
regulations.

The service due to a father is employed in serving
a mother, and the love is the same for both. (But)
in the sky there are not two suns, nor in a land
two kings, nor in a state two rulers, nor in a family
two equally honourable : — one (principle) regulates
(all) these conditions. Hence, while the father is
alive, the sackcloth with even edges is worn (for a
mother), (and only) for a year, — showing that there
are not (in the family) two equally honourable.

7. What is meant by the use of the staff? It is
(a symbol of) rank. On the third day it is given to
the son ; on the fifth day, to Great officers ; and on
the seventh day, to ordinary officers ; — (at the
mourning rites for a ruler). Some say that it is
given to them as the presiding mourners ; and
others, that it is to support them in their distress.

A daughter (not yet fully grown) and a son (while
but a lad), do not carry a staff; — (being supposed)
not to be capable of (extreme) distress.

When all the array of officers is complete, and all
things are provided, and (the mourner) cannot speak
(his directions), and things must (still) proceed, he is
assisted to rise. If he be able to speak, and things
will proceed (as he directs), he rises by the help of

h h 2



468 THE Li Kl. BK. XLVI.

the staff. Where (the mourner) has himself to take
part in what is to be done, he will have his face
grimed (as if black with sorrow). Women who are
bald do not use the coiffure ; hunchbacks do not
unbare their arms ; the lame do not leap ; and the
old and ill do not give up the use of liquor and
flesh. All these are cases regulated by the con-
sideration of circumstances.

8. After the occurrence of the death, the (wailing
for) three days, which left no leisure for anything
else ; the not taking off (the headband or girdle)
for three months ; the grief and lamentation for a
whole year ; and the sorrow on to the three years : —
(in all these things) there was a gradual diminu-
tion of the (manifestation of) affection. The sages,
in accordance with that diminution of the natural
feeling, made their various definite regulations.

9.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 mourning rites
were limited to three years. The worthiest were
not permitted to go beyond this period, nor those
who were inferior to them to fall short of it. This
was the proper and invariable time for those rites,
what the (sage) kings always carried into practice.

When it is said in the Shu (Part IV, Book VIII,
i, 1), that Kao Sung, while occupying the mourning
shed, for three years did not speak, this expresses
approval of that sovereign. But the kings all
observed this rule ; — why is the approval only
expressed in connexion with him ? It may be
replied, ' This Kao 3ung was Wu Ting.' Wii Ting
was a worthy sovereign of Yin. He had come to
the throne in the due order of succession, and was
thus loving and good in his observance of the
mourning rites. At this time Yin, which had been



bk. xlvi. SANG FU SZE KIH. 469

decaying, revived again ; ceremonial usages., which
had been neglected, came again into use. On this
account the approval of him was expressed, and
therefore it was recorded in the Shu, and he was
styled Kao (The Exalted), and designated Kao
3ung (The Exalted and Honoured Sovereign).
(The rule was that), during the three years' mourn-
ing, a ruler should not speak ; and that the Shu
says, ' Kao 3 un g≫ while he occupied the mourning
shed, for the three years did not speak,' was an
illustration of this. When it is said (in the Hsiao
King, chapter 18th), 'They speak, but without
elegance of phrase,' the reference is to ministers and
inferior (officers).

10. According to the usages, when wearing the
sackcloth with jagged edges (for a father), (a son)
indicated that he heard what was said to him, but
did not reply in words ; when wearing that with
even edges (for a mother), he replied, but did not
speak (of anything else) ; when wearing the mourn-
ing of nine months, he might speak (of other things),
but did not enter into any discussion ; when wearing
that of five months, or of three, he might discuss, but
did not show pleasure in doing so.

11. At the mourning rites for a parent, (the son)
wore the cap of sackcloth, with strings of cords, and
sandals of straw ; after the third day, he (began to)
take gruel ; after the third month, he washed his
head ; at the end of the year, in the thirteenth
month, he put on the mourning silk and cap proper
after the first year ; and when the three years were
completed, he offered the auspicious sacrifice.

12. When one has completed these three regu-
lated periods, the most animated with the sentiment



A A



47O THE LI Kl. BK. XLVI.

of benevolence (or humanity) can perceive the
affection (underlying the usages) ; he who has
(most) knowledge can perceive the nice distinctions
pervading them ; and he who has (most) strength
can perceive the (force of) will (required for their
discharge). The propriety that regulates them, and
the righteousness that maintains their correctness,
may be examined by filial sons, deferential younger
brothers, and pure-minded virgins.



INDEX



TO THE



TEXTS OF CONFUCIANISM,



PARTS I, II, III, IV,



VOLUMES III, XVI, XXVII, XXVIII.



INDEX OF SUBJECTS.



The references refer to the parts and the pages.



Ability and character necessary to
official employment, Part i,
pages 221-5; hM, 322-4.

Acts and character, of Yao, i, 31-6 ;
of Shun, as Yao's vice-gerent, i,
38-41 ; as sovereign, i, 42-5.

Administration of government, royal
regulations for, iii, 209-48 ; in
the twelve months of the year,
iii. 249-310; of justice, and how
tempered, i, 43, 48-9, 254-64;
iii, 235-8.

Admonitions, of Yii to Shun, i, 58-
61 ; of t Yin to Thai ATia, 92-
103 ; to the prince of Khang,
170-1 ; to prince Shih, 205-10;
to king Khang, 200-5, 220-5,
404-7; to officers, 407-10; of
duke Wu to himself, 413-17.

Age and the aged, all dynasties
honoured in all conditions of
life, iv, 229-31; reverence and
care of, i, 123, 185, 401 ; iii, 67-
8, 70, 73-4, 240-4, 287-8, 464-
70 (delicacies provided for) ;
how shown in walking with, iv,
230; three classes of the aged,
see Three.



Agriculture, references to and de-
scriptions of, i, 32-4, 42-3, 85,
258, 312, 316, 320-3, 331-3, 3 6 5,
369-70, 383, 389, 398-9; Hi, 227-
30, 239,255,260,264,270-1,274,
284, 289, 293, 304, 308-9, 43I- 2 -

Altars, i, 40, 153, 420 (and note);
the Great, i, 384 (and note) ; to
the spirits of the land and grain,
iv, 235; various, iv, 206-7.

Ancestral temples and worship, i, 40-

1, 44, 51, 92, 95, 126, 130, 134,
304-13, 3I3-3 6 , 343, 348, 3 6 5-8,
37o,374-5, 387,402-3, 420,431-

2, 477-8, 485-6, 488; iii, 223-5,
369-71, 411-13; iv, 204-6, 309-
1 1.

Ancients, the, emblematic figures of,
i, 58 ; lessons and examples of,
107, 166, 171. 204,229,249, 252,
301. Ancientsayings,i,27i,4o8.

Announcements, or public procla-
mations, and speeches, at Kan, i,
76-7 ; of Thang, 84-6 ; of Kung-
hui, 86-9; of king Wu, — the
Great Declaration, 124-32,
Speech at Mu, 131-2, and The
Completion of the War, 133-5 ;



472



THE TEXTS OF CONFUCIANISM.



of king AT/^ang, 1 56-6 1 (the Great
Announcement) ; to prince of
Khang, 165-71; against drunken-
ness, 171-81; of the duke of
Shao, 181-8; of the duke of
ATau, 188-95 ; of king KMng, to
the people of Shang, 196-200;
to his ministers, 226-31; of
king Khang, 243-8 ; the speech
at Pi, 267-70; of the marquis
of Kh'm, 270-72.
Announcements of deaths, forms of,

iv, 133-4.

Antiquity, Yao and Shun studied, i,
227 (and note) ; highest, the, ii,
385; middle, the, ii, 397 ; ways
of, to be followed, iv, 324.

Aprons, or knee-covers, i, 350; iv,
14, 15 ; size of parts of, iv, 172.

Archery, i, 375-400; iii, 202, 231,
375, 400 ; the ceremony of, iii,
56-7; iv, 446-53.

Arrows in the game of pitch-pot, iv,
397-400.

Armv, royal, i, 76-7, 81, 244; see
Six ; signals and movements of,
in an expedition, iii, 90-2. Army
of Lu, i, 344 (and note).

Ails or special acquirements, iii,
235 ; iv, 116.

Association of husband and wife in
sacrifices, iv, 238-41. See also
i, 431-2.

Astronomical references, i, 23-8,
32-4, 38-9, 82, 142, 296, 355,
363-4, 419; iii, 91-2, 249, 254,
257, 259, 262, 268, 272, 275,
276, 283, 286, 289, 291, 296,
301, 304, 306, 308, 426.

Audiences and other great meetings,
i, 40, 229, 373-4, 427-8; iii,
111-2,218; non-attendance at
was criminal, i, 426.

Avenging the death of parents and
others, iii, 92, 140.

Banishment, rules for, i, 40-1, 43 ;

iii, 232-4; cases of, i, 41, 75-6.
Banners, i, 326, 338, 342, 351,418;

iii, 91-2.
Banquet, ceremony of the, iii, 57-8 ;

iv, 454-57.
Barter, established by Yii, i, 58. See

Inventions.
Bathing and washing, iv, 5.
Bells, see Music. The wooden-



tongued bell, i, 82; iii, 190,
260; iv, 34, 165.
Birth, usages in connexion with, of
a boy or girl, by the wife, iii,
471-4 ; by a concubine, 475 ; of
sons and daughters differently
regarded, i, 350-1 ; usages on y
special occasions of, iii, 311-

i3-

Blessing of sacrifice, the, iv, 236-7.

Blind, musicians, i, 323 (and note).
Hall of the, a school of music,
iii, 346.

Bows, see Weapons of war. Bows
and arrows, conferred as re-
wards and at investitures, i,
267; use of, at the birth of an
heir-son, iii, 424 (and note), 472.
How a bow was presented and
received, iii, 84-5.

Branding, i, 256.

Bride and bridegroom, observances
between, iii, 440-1 ; iv, 264-5 ;
see also Book XLI. Brides of
kings K\, Wan, and Wu, 1,380-1.

Burial, earliest forms of gave way
to use of coffins, ii, 385 ; differ-
ent materials of coffins, iii, 125;
coffins prepared beforehand
and kept in readiness, iii, 241 ;
taken with rulers leaving their
states, iii, 334. Reasons for
burial and coffin, iii, 177, 185;
times of, iii, 222-3. Thickness of
coffins, iii, 150 ; iv, 196. Coffins
of kings fourfold, iii, 158. Coffin
on bier presented in temple,
and then drawn to grave, iii,
172; iv, 164-5; catafalque of,
at great funerals, iv, 197-8 ; let-
ting down of, iv, 198-9; with
head to the north, and on the
north of city, iii, 170. Rain
did not interrupt an interment,
iii, 223; case of an eclipse oc-
curring, iii, 338-9; vessels to
the eye of fancy and other
things for the grave or coffin,
iii, 148 (and note), 173 (wooden
automata condemned), iv, 55-6,
144, 197-8. Procedure when
both parents were buried at
same time, iii, 315; in case of
a lady dying before she had
become acknowledged wife, iii,
322. Origin of burying young






INDEX OF SUBJ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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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s in coffins, iii, 341. A stone
coffin, iii, 149.
Burying living persons with the dead,
i, 443; iii, 182, 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