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와 원소가 싸우고 있을 때, 손권(孫權)이 형인 손책(孫策, 손견의 아들)의 자리를 이어받고 장강 하류 지역을 점거하였다. 또, 유비(劉備)는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하고 하남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유비는 군사력이 약했지만,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 맹장을 거느리고 있었고, 다시 융중(隆中)을 세 번씩이나 방문하여 제갈량(諸葛亮)을 모사로 초빙하고 있었다〔삼고초려(三顧草廬)〕. 건안 13년(208)에 조조가 20만 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형주를 차지한 다음 유비를 추격하면서 손권을 위협하였다. 조조의 공격을 받은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연합하려고 하였다. 이 때, 손권도 주유(周瑜)와 노숙(魯肅)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갈량을 접견하고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이에 손권은 주유에게 3만 명의 군대를 주어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군을 만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조조는 북쪽에 15~16만 명의 군대와 형주에서 항복한 7~8만 명 등 약 80만 명의 군대를 갖고 있어 절대적으로 우세하였다. 그러나 조조군은 북쪽에서 이 곳까지 행군해 와 피로가 겹친데다 남방의 기후도 맞지 않았고, 형주에서 투항해 온 수군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다. 여기에 농서(隴西)에서 할거하고 있는 마초(馬超)나 한수(韓遂)의 세력도 만만하지 않아 후방이 염려스러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조조는 이와 같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손·유 연합군은 조조가 싸우지도 않고 형주를 얻은 다음 적을 얕보고 교만해지자 이를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오의 장군 황개(黃蓋)를 거짓 항복시키고 적벽에서 화공(火攻) 공격으로 조조군을 대패시켰다. 그 결과, 조조군은 북쪽으로 회군하였으며, 유비와 손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각 그 세력을 확대시켰다. 적벽전 후에 유비는 먼저 무릉(武陵), 장사(長沙), 계양(桂陽), 영릉(零陵) 4군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건안 16년(211)에 다시 익주(益州)로 진군하여 3년 후에 익주를 점령하였다. 건안 24년(219)에 다시 조조에게 한중(漢中)을 빼앗아 자칭 '한중왕'이라고 하였다. 한편, 손권은 유비의 실력이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형주를 지키고 있던 관우를 죽이고 형주 전체를 점거하였다. 이로써 손권은 강동 지역에서 통치권을 공고히 하였다. 따라서, 조조는 더 이상 남하할 힘을 갖지 못하였고, 유비는 익주를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천하가 3분 되는 형세가 되었다. 건안 18년(213)에 한은 기주(冀州) 지역 10군을 위국(魏國)으로 하고 조조를 위공(魏公)에 봉하였으며, 업(鄴)에 수도를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종묘 사직을 세워 한의 정치 중심은 허창에서 업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건안 21년(216)에 조조는 위공에서 위왕(魏王)으로 올라 사실상 한의 지배자가 되었다. 건안 25년(220)에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曺丕)가 헌제를 폐위시킨 다음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으며, 낙양(洛陽)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 이듬해에 유비가 성도(成都)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漢)이라고 하였는데, 역사상 이를 촉한(蜀漢) 또는 촉(蜀)이라고 한다. 229년에 손권도 건업(建業, 강소 남경)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오(吳)라고 하여 마침내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삼국이 정립하는 역사상 삼국 시대가 되었다.
출처:적벽전과 삼국의 정립 (중국사, 미래엔)
일반적으로는 제갈량이 융중에서 천하 3분의 삼국정립을 말했다고 하지만 실제 진말한초 초한지의 괴철이 처음 주장했는데 항우 유방과 함께 한신이 독립해서 3나라가 균형과 견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괴철(蒯徹, ? ~ ?)은 한나라 초기 모략가로 한나라 대원수 한신의 세객이다. 그 이름이 무제의 휘와 같다하여 사마천이 사기에서 이름을 바꿔 쓴 뒤로는 괴통(蒯通)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범양 사람이다. 무신이 이량에게 죽을 무렵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기원전 204년, 한신이 위나라, 조나라, 대나라를 차례로 격파하고 제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에 비로소 다시 나타났다. 한왕 유방은 한신에게 제나라 공격을 맡겼지만 이를 잠시 중지시키고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 왕 전광을 설득시켜 자신의 편으로 이미 포섭했다. 괴철은 이대로라면 역이기가 한신보다 큰 공을 세우게 된 것이라며 한신을 꼬드겨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고, 한신은 이미 한나라와 손잡기로 해 대비가 없던 제나라 군대를 손쉽게 무찌르고 제나라를 장악했다. 한신에게 제나라를 가져다 준 괴철은 천하 3분론을 주장하며 한신에 독립할 것을 권하지만, 한신은 한왕과의 정리를 내세워 거부했다. 괴철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미친 체 하여 한신을 떠났다.
삼국정립三國鼎立이란 사전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세 나라가 솥발처럼 서로 대립함. 2 . 신라, 백제, 고구려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유지한 채 서로 견제하고 대립하던 상태. 3 . 중국 후한 말기에 위ㆍ오ㆍ촉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유지한 채 서로 견제하고 대립하던 상태. 鼎(솥 정; ⿍-총13획; dǐng)의 정은 발이 세발 달리고 귀가 달려서 음식물을 익히는 도구이다. 그런데 솥은 요리와 문명을 발달시키므로 화상흉터를 유발시킬수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불에 데인 것보다는 끓는물에 의해서 화상이 발생한다. 또 화상은 흉터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화상을 치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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