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3일 화요일

영조의 독살과 천출 두가지 콤플렉스와 흉터치료

영조의 독살과 천출 두가지 콤플렉스와 흉터치료


2014년 9월 23일 10시의 SBS 드라마 ‘비밀의 문’에선 영조(한석규 분)가 김택(김창완 분)과 ‘맹의’를 두고 독대하였는데 ‘맹의’는 극 중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수장 영의정 김택의 협박에 못 이겨 강제로 수결했던 문서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맹의는 경종의 독살설과 관련된 내용인 듯하다.
또 내용을 보면 영조는 물건을 내동댕이치고, 정사를 안돌보고 낚시를 하거나 선위를 하겠다는 기행을 자주 보이는것도 그의 두가지 콤플렉스 때문이다.
첫째는 경종을 죽였다는 독살설이며 둘째는 무수리의 천출 소생이었다.
경종은 말엽에 병환으로 기운을 잃고 잘 먹지 못했는데 게장과 생감을 올리자 웬일로 맛있다고 잘 먹었다. 다음날부터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고 그 후 다시 건강 상태가 악화된다. 경종의 죽음이 오늘내일하자 세제 연잉군이 우왕좌왕하면서 뚜렷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던 어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들게 했다. 경종은 연잉군의 처방 후 잠시 기운을 되찾는 듯 했으나 얼마 안가 다시 건강 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승하했다. 그 때문에 신임옥사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세제와 가까운 사람들이였다는 정황 증거 때문에 소론을 중심으로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상극이라 몸에 안 좋기는 한데, 죽을 정도는 절대 아니고 어의가 처방한 약과 연잉군이 올린 인삼차가 상극이다. 영조 본인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것이 비전문가이면서 어의의 처방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했다. 심지어 이러면서 영조는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라고 했다. 게는 식중독균의 번식이 대단히 잘 되는 고단백 식품인데다 감은 수렴 작용을 하는 타닌 성분이 있어 소화불량을 수반하는 식중독의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사방이 정적들로 둘러싸인 와중에 어의의 의견을 비난하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연잉군이 경종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연잉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정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나름대로 오래 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보위를 이어받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본인 입장에서도 편했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퍼져 있었던 이야기로 경종이 죽은지 31년이 지난 후에 영조가 친림하던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를 찬탈자에 독살자라고 마구 욕한 내용을 써서 냈다가 친국을 받던 죄인 중 하나인 신치운이 "신은 갑진년(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이외다."라고 영조의 면전에서 대놓고 디스를 했다는 기사가 실록에도 나온다. 영조는 즉위 내내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비난으로 끝난게 아니라 이인좌 등이 선왕의 원수를 갚자는 복수설치의 기치를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터지면서 소론, 남인의 음모론 신봉이 단순 뒷담이 아니라 국가를 흔들 수 있는 내전으로 번질수도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후로도 무신년의 배반자인 전 전라감사 정사효 등이 역모를 꾸몄고 영조 31년에은 윤지의 나주괘서사건이 있었으며 심정연, 신치운 등의 왕의 친림시험장 테러사건이 터진다.  영조 31년(1751)에 이르면 천의소감의 저술을 지시하여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알리는데 그 중 '내가 게장보낸게 아니라고 이놈들아!'라고 공개적으로 독살설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른다. 경종은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당쟁의 대격분(大激憤)으로 사약(死藥)을 마신 것을 목도(目睹)한 후 심질(心疾)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숙종은 경종의 후사(後嗣)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였다.(정유독대) 당시 숙종이 이이명을 불러 독대함에 연잉군이 무수리의 자식이라며 은연히 멸시하던 소론이 이를 알고 왕세자의 대를 연잉군에게 결코 넘길 수 없다며 반발하여 상소를 올려 이이명은 물론 숙종까지 격렬히 비난하였다. 이이명을 비롯한 노론은 연잉군에 동조적이라 연잉군을 어떻게든 비호하려 해 살얼음 같던 소론과 노론의 당쟁이 이 독대로 격화되어 전장을 방불케했다.
경종 즉위년(1720년)에 왕세자가 즉위하자 훗날 영조가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이때를 말할만치 소론과 노론의 당쟁이 홍수 터지듯 밀려왔으며 경종은 큰 방향만을 보일 뿐 당쟁은 지켜만 보았다. 왕세제의 제 자만 튀어나와도 소론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 정국에서 노론인 김창집(金昌集) 등이 결사적으로 왕세제 책봉을 상소했으나 소론인 유봉휘(柳鳳輝) 등이 격렬히 논박하였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1724년 김일경과 목호룡이 경종독살설을 주장한 것과 국왕인 그에게 왕이라 칭하지 않고 너, 그대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게 된다.

둘째로 영조는 숙종의 서장자(차남)로 태어나 1699년(숙종 25년) 연잉군(延礽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재주가 있어 궁중에 드나들었으나 궁인이 갖출 기품과 덕목이 없어 천대받아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숙종은 무수리 최씨가 기품이 없더라도 재주가 값어치 있다라 여겨 그 아들을 배게 하였다고 여겨진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 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았다. 은근한 멸시를 받았지만 왕의 아들인지라 대우가 그리 박복하지는 않아 모자람 없이 자랐다. 무수리의 서자라는 사실과 왕의 아들로서 핏줄 이 두 가지는 그의 남은 삶을 규정짓게 된다. 그는 즉위 후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으로 최선을 다했다라 여겨 왕비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조선 최초로 서자 출신으로 왕이 된 선조도 콤플렉스 때문에 신하들에게 업신여길까봐 두려워 신하를 동인과 서인 둘로 나눠 당쟁이 일어나고,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것도 비슷하다. 영조도 겉으로는 탕평책을 지시했지만 노론만을 대우했고, 결국 조선의 영조와 정조 르네상스와 실학은 완전히 허구적인 소설같은 말도 안되는 사상이다. 게다가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임으로써 자식죽인 아버지란 콤플렉스가 추가되어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었고, 불쌍한 세손인 정조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였고 자기 풍산홍씨 처가도 가담 했다는 분노와 화병 더하기 콤플렉스로 단명하여 치세를 이루지 못하고 세도정치로 빠지게 되어 조선이 망하게 된다.
콤플렉스(독일어: komplex) 또는 컴플렉스(영어: complex)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으로 사람의 마음 속의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힘의 존재를 의미한다. 감정 복합, 즉 필링 톤드 콤플렉스(Feeling Toned complex)라고도 불린다. 사람들은 누구나 약하거나 강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으며, 그 적용 범위는 공통의 가치관이 통용되는 범위에 따라 각 개인의 콤플렉스에서 나아가 집단의 콤플렉스, 사회의 콤플렉스로 확장되기도 한다. 예로는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가 있다. 콤플렉스는 상황을 왜곡하여 보게 하며 그 세기에 따라 많은 상황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생각, 감정,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면 콤플렉스는 삶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흉터가 있는 경우에도 콤플렉스를 가지기 쉽다. 왜 흉터가 있을 때 부모가 잘 돌봐주지 않는가 하는 원망부터 그 때 그시절로 돌아가면 다시 상처와 흉터가 없게 하겠다는 자책감, 대인기피증, 우울증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콤플렉스는 의학적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베인 흉터, 긁힌 흉터, 꿰맨 흉터, 넘어진 흉터, 성형 수술후 흉터, 외과 수술후 흉터, 교통사고 흉터 정형 외과 흉터등 다양한 흉터를 치료할수 있다. 특히 화상흉터와 갑상선 수술 흉터, 코 수술 흉터, 점뺀 흉터, 수두 흉터에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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