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5일 목요일

문체반정과 문자의 옥 작은 차이와 흉터치료

문체반정과 문자의 옥 작은 차이와 흉터치료


개혁군주라고 하는 정조가 새롭게 유행하는 소품체 문체를 걱정하며 고전의 문체로 돌아가라고 신하들과 선비들에게 명했다. 이를 위해서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패관소설과 잡서 등의 수입을 금하였으며, 중국의 고문들을 신간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조가 책과 사상을 탄압하는 등 보수적인 면모라고 평가하는 주장도 있는 반면에, 단순히 정조가 남인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노론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박지원을 볼모로 삼기 위한 정치적인 노림수였다는 주장이 있다.
정조는 문체반정으로 인해 5년 뒤에 김조순에게 자송문을 쓰게 한다. 김조순은 자송문을 정조의 마음이 흡족하게 잘 써냈다. 그 덕분에 김조순은 정조로부터 신임을 얻어 순조롭게 출세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결국, 정조 사후에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시작한 인물이 되었다. 사실 자유로운 문체에 대해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성리학의 규범을 따르고자 한 노론의 세력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관심이 많은 남인의 세력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저항했던 인물로 박지원과 이옥을 꼽고 있다. 박지원은 집안이 어려워서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우게 된다. 덕분에 그의 글은 다른 사람들보다 고전 문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정조는 박지원에게도 자송문을 쓰게 시켰다. 하지만 박지원은 너무 죄가 커서 자송문을 쓸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옥은 과거에서 장원했지만 소품체 문체를 쓴 것을 정조가 찾아 꼴찌로 처리하였다. 하지만 이옥은 소품체 문체를 버리지 않고 결국 벼슬 길에도 오르지 않았다.
문자의 옥(文字-獄)은 강희·옹정·건륭 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필화 사건이다.
청조는 이민족(만주족)으로서 중국 한족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특히 반청적 경향이 흐르고 있던 강남 향신층의 비판적 동향에 과민하여 사소한 이유로 필화사건을 일으켜 억압하였다. 그 시발은 1663년의 장정롱 사건인데 옹정제 시대에는 청조를 이적이라 비판한 여유량·증정의 사건이 있고, 옹정제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저작하여 청조 지배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건륭제 시대에 들어서면 탄압은 더욱더 가혹해져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집도, 그 목적의 일단은 내용의 검열에 있었다고 하며,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금서로 전부 훼손된 것도 수천 부에 달하고, 일부분을 뽑아내어 태워진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첫째 문사집략 사건이 있는데 명 제국에서는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남겼는데,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면서 숭정제 연간이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당시 편찬을 담당했던 주국정(朱國楨)이란 신료는 미완성인 기록들을 가지고 강남으로 피난하여 살다 죽었는데, 그의 후손이 궁핍하여 이를 지방 유력가 장정룡(莊廷鑨)에게 팔았다.
장정룡은 이 명사를 자신이 완성시켜 자신의 가문을 그냥 돈 좀 있는 유력가가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로 발전시켜, 명성을 얻고자 했다. 장정룡은 초기 작업 중에 급사하고 동생 장정월(莊廷鉞)이 이 작업을 마무리했는데 본인이 워낙 학식이 없어 주변의 여러 학자들과 명사들을 초빙하여 서문과 평론을 달고 미완인 부분을 보충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장정월이 초빙한 학자와 명사들은 하나같이 학식과 명성이 드높았지만, 동시에 청나라에 이를 가는 반청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의뢰받은 명사 편찬작업에서 신나게 명나라 만세청나라 나쁜사람  오랑캐넘들 수준의 글을 마구 써댔고, 장정월은 제대로 안 읽어보며 이거 팔면 명성도 상승하고 돈도 번다는 생각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렇게 출간한 책에는 청조로서는 당연히 아연실색할 내용들로 가득찼다. 우선 청 황제들을 묘호가 아닌 이름으로 호칭했고, 청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명과 청의 전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명의 연호를 쓰고 후금/청군을 반란군으로 칭했으며 항장 출신 상가희와 경정충을 나라팔아먹은 도둑놈이라 비판했다. 지방 관아에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장정월이 막대한 뇌물을 주어서 문제이던 내용을 삭제하고 출간하는 선에서 해결했으나 끝내 이 책은 강희제에게까지 올라갔다. 이 책을 정독한 강희제는 이 역적하면서 연루자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장정룡의 의도와 달리 장씨 집안은 멸족했고, 본인도 부관참시를 겪었으며 편찬에 관여한 학자와 명사들 본인은 물론 그 가족과 친척, 제자들까지 싸그리 다 처형을 받았다. 강희제는 뇌물을 받고 책의 개정출간을 허용한 지방 관리들, 심지어 단순히 책을 인쇄한 사람과 책을 받아서 시장에서 판매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처형시켰다.
명사집략은 워낙 대놓고 반청기조 였던 책이기에 청도 이만한 탄압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본격적인 문자의 옥을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둘째 대명세 사건 (1711년) 이란 청 초기 산문계에서 이름높았던 대명세(戴名世)라는 사람이 명 시절 역사와 저집을 연구하고 참고하면서 자신의 저작 남산집(南山集)을 냈는데, 그 과정에서 남명 최후의 황제 소종 주유랑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썼다라 드러났다. 끝내 남명의 연호 사용은 명나라 추종 세력이며 반역수괴라는 논리로 대명세는 처형받고, 저서들은 모두 불살라졌으며 가족은 만주 외곽으로 유배를 겪었다.
셋째 사사정 사건 (1726년) 옹정제 6년 향시의 감독관이던 사사정(査嗣庭)이라는 문인이 시험문제를 출제하면서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문구를 넣었다. 사실 이 문구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 나온 문구이다.
유(維)자와 지(止)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이니, 유민소지의 뜻은 황제인 옹정제를 참수하겠다는 의도를 담아 반역음모라며 사사정을 체포하고 그 구족을 멸하였다. 사사정은 체포 이후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옥사했는데, 잠시 땅에 묻혔다가 끝내 부관참시 당했다.
넷째 증정-대의각미록 사건 (1728년)이 있는데 옹정제 8년이던 1728년에는 천섬총독 악종기(岳鍾琪)를 충동하려 한 증정이라는 인물의 반란미수 사건이 있었다.
증정(曾點)은 반청사상가를 자처했지만 흔해빠진 백면서생으로 사실 명망높은 학자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반청사상의 지주 가운데 1명이던 여유량(呂留良)의 저작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여유량을 추종하였고, 여유량이 이미 죽은 뒤라 그의 아들로부터 여유량의 저작 몇 권을 더 구해 읽으며 열렬한 여유량 추종자&반청주의자를 했다. 이후 증정은 섬서총독 악종기를 충동하여 반청복명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제자 장희(張熙)를 거쳐 서신을 보내 반란을 일으키라 권유했다.
섬서총독 악종기는 한인팔기 출신으로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고 만주족만 임명받던 천섬총독 자리에 올라 만주출신 귀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냐면 만주귀족들이 아예 작당해 악종기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라 모함할 지경이었고, 그럼에도 옹정제는 “누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악종기를 믿었으니 악종기는 당연히 충성했다.
그런 청조의 충신 악종기를 왜 증정이 골랐냐면, 악종기는 중국 역사상 악씨 성을 가진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송의 애국명장 악비의 21대손이라는 까닭에서였다. 당신의 조상은 한족 왕조를 위해 충성하고 끝까지 싸워 금나라 여진족 오랑캐들을 물리쳤으니, 당신도 조상을 본받아 여진족 오랑캐들을 토벌하고 한족의 증흥을 이뤄달라는 소리였다. 악종기는 즉시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 옹정제는 증정과 장희를 당장 북경으로 압송했다.
옹정제는 증정과 장희를 방면하고, 자신과 증정의 키배를 기록으로 남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출간해 전국적으로 보급시켜 청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증정에게 있던 서찰을 모조리 압수하고, 사상개조한 증정의 진술을 토대로 여유량의 후손 및 반청사상을 가진 명망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옹정제는 여유량을 부관참시했고 여유량의 제자 엄홍규까지 걸리자 두 집안의 직계후손 중 16세 이상을 모조리 처형했으며, 그 이하는 노비로 바꿨다. 여유량의 저작을 출판한 사람들도 반역죄로 처형시켰고, 그 저작을 보유했다는 까닭만으로 모조리 감옥에 끌려갔다. 그리고 증정은 사상개조로 참회록을 출간해 벼슬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다가 건륭제 원년에 이 때의 일을 까닭으로 처형을 겪는다.
4. 건륭제 시기는 대표적으로 시문을 적으면서 탁청(濁淸)이란 문구를 썼는데, 감히 국호인 청 앞에 탁이라는 부정적 글자를 썼다는 까닭에 반역혐의로 처형한 사건이 있고, 강희자전의 문자가 너무 어렵다고 한탄했다면서 반역죄로 처형도 했으며, 그보다 더 막장인 사례로는 순치제 시기 시인이 쓴 구절에 순치제보다 후대인 건륭제의 시호와 어명을 피휘하지 않았다고 그 시인의 고손자가 끌려와 고문도 겪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전국의 모든 서책과 기록을 긁어모으라 지시하고, 그 가운데 청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기록은 모조리 불태웠다. 단순히 당대의 서책와 기록만이 아니라 명 말엽의 기록들도 그 대상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명 말기 장수들이 여진족과 후금/청을 상대로 하면서 이민족/오랑캐/반란군이라 쓴 표현이 있으면 모조리 날려버렸다.
명나라의 태조는 젊을 때 잠시 중이 된 일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것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는데 이것을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이처럼 글자 한 개를 잘못 써서도 문제가 되듯이 잘못 새겨진 상처로 발생한 흉터도 잘못 쓴 글자와 같다. 문자옥으로 사형까지 당한 것을 봐도 조그만 글자 하나같은 작은 흉터가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긁히거나 베인 흉터 뿐만 아니라 점뺀 흉터, 수두 흉터, 대상포진 흉터를 흉터침, 침, 한약 약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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