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 대전(夷陵大戰 ), 또는 효정 전투(猇亭戰鬪)는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유비는 육손의 화공(火攻)과 뒤이은 공격에 의해 참패하고 백제성까지 물러났다. 이로 인해 실의에 빠진 유비는 223년 사망한다. 남군태수 주유가 사망한 후, 손권은 주유가 지키고 있던 남군을 유비에게 임대했다. 손권 측은 적벽대전의 공로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여기고 유비는 자신들의 묵인 하에서 형주 남부를 점거했으므로 형주 전체를 유비에게 임대했다고 여겼으나, 유비 측은 적벽대전은 어디까지나 공동작전이었으며 형주 남부는 자력으로 획득한 것으로 여겼다. 215년 익주 점령 후, 손권과 유비는 형주 반환 문제를 놓고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강하, 장사, 계양의 세 군을 손권에게 반환하고 강릉, 무릉, 영릉은 유비의 영지로 삼는 것으로 협약을 맺었다. 219년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관우가 북상해 위를 공격하자 손권은 유비가 가지고 있는 형주의 나머지 지역을 되찾기에 좋은 기회로 보고 관우가 부재중인 유비령 형주를 은밀히 습격해 점령했다. 임지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되돌린 관우는 위군과 오군에게 협공받아 결국 패전, 마충에게 생포된 후 손권에게 처형되었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제갈량, 조운을 비롯한 다수의 중신들은 보복전을 일으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유비는 장비와 회견한 후 오를 직접 공격하기로 뜻을 굳혔다. 전쟁 준비가 한창이던 때, 장비는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당하고, 이들은 장비의 목을 가지고 손권에게로 달아나 유비의 손권에 대한 적의는 더욱 강해졌다. 관우를 처형한 이후부터 유비의 침공을 예상해온 손권은 위의 황제가 된 조비에게 형식적으로 신종하며 촉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이 즈음 손권은 조비로부터 정식으로 오왕(吳王)으로 책봉되었다. 221년 여름, 후한이 멸망하자 제위에 오른 유비는 승상 제갈량을 수도인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주둔시켜 후방을 맡긴 후 직접 수만 병력을 인솔하여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한편 이릉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감녕은 이미 풍토병에 걸려 이릉대전이 발발하는 시점에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지만 감녕은 그래도 군무를 계속하길 고집했다. 유비는 오반, 풍습 등을 선봉으로 삼아 형주로 진격을 시작해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이 지키는 무성(巫城)과 자귀성(秭歸城)을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자귀에 본영을 설치한 유비는 장무 2년(222년) 정월, 오반, 진식 등에게 먼저 수군을 이끌고 이릉으로 나아가게 했다. 손권으로부터 전군을 위임받은 육손이 이들을 상대하는 동안 유비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육로로 진군할 생각이었으나 육손이 이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에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222년 봄부터 유비는 다시 공세를 폈다. 황권은 형주로 더욱 깊숙히 쳐들어가면 전세가 불리해질 경우 후퇴하기가 어려울 것을 우려해 유비에게 전선 지휘를 자신에게 맡기고 후방에 머무르도록 권하였으나 유비는 이를 기각하고 황권에게 수군을 이끌고 장강 북안을 따라 계속해서 하류로 내려가도록 한 후 자신은 이도(夷道)를 따라 진군해 손환을 이릉성으로 몰아넣고 성을 포위했다. 손환이 육손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육손은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부장들에게 "내게 촉군을 물리칠 계략이 있으니 참으라"고 말하며 구원 요청을 묵살했다. 이 시점, 육손은 촉군에게 점차 밀려 삼협 내의 모든 거점을 잃고 후방인 강릉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고, 많은 장수들은 육손의 군사적 재능을 불신해 육손은 부하 장수들에게 손권에게서 받은 검을 내보이며 권위를 세워야 할 정도였다. 유비는 승세를 타고 효정으로 진군하면서 마량(馬良)을 만족(蠻族)에게 보내어 이들을 회유했고, 여기에 사마가(沙摩柯) 등이 호응해 오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육손이 요새화한 진영에서 수비로 일관하며 촉군의 도발에도 응하지 않자 전선은 교착되었고 촉군의 사기도 점차 떨어졌다. 이때 유비는 전선 주변부에 50여 개의 진을 세워 두고 유사시에는 서로 지원하게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조비는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 많은 진영들을 세워두고 전쟁을 하려는 것인가? 유비는 반드시 패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22년 6월, 육손은 촉군의 강약을 시험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으로 촉군 진영을 공격하도록 했다. 공격에 나섰던 오군은 촉군의 반격을 받고 몹시 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육손은 여러 진영에 분산된 촉군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계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무렵, 유비가 이끄는 촉군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비교적 시원한 숲으로 진영을 옮긴 상태였는데, 이를 탐지한 육손은 대대적인 화공으로 촉군을 공격했다. 이를 위해 육손은 수군을 적진으로 급파하는 한편 육상에서도 전군을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촉군 진영들의 주변에 불을 놓은 후 맹공을 가했다. 수많은 진영들이 동시에 화공과 기습을 받는 사태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던 촉군 진영들은 혼란에 빠졌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각개격파식으로 무너졌다. 전황이 위급해지고 진영들이 서로 도울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유비 역시 본진을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수군은 육상군의 대패로 인해 수십여 진영이 삽시간에 함락당하자 퇴로가 끊겨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도 오군의 추격을 뿌리칠 방법이 없게 되었으므로 지휘관인 황권은 위에 항복하고 오군은 수많은 군선과 병기를 노획했다. 이때 40여 채 이상의 촉군 진영들이 오군의 손에 떨어졌고, 유비는 효정과 이릉에서 퇴각한 후 다시 진을 세우고 패잔병을 수습해 오군에게 대항해 보려 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 이 시도 역시 오군의 공격으로 인해 무산되어 유비는 백제성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일련의 전투에서 촉한은 풍습, 장남, 부동 등 다수의 무장들과 왕보, 마량 등의 문관 등, 수만 명의 인력을 잃었다. 오나라와 사이가 나빠 촉한 편에 선 소수민족들도 피해를 입어, 호왕 사마가가 죽었다.
2014년 9월 2일 ebs 세계견문록 아틀라스의 삼국지 이릉대전에서는 장비의 몸이 묻힌 곳, 4대 고성 중 하나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낭중고성(閬中古城)이 등장한다. 힘찬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은 양 옆으로 물러나 길을 만들어준다. 장비는 7년을 이곳에서 태수(太守)로 지냈고 관리력이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장비의 머리는 장강에 묻히고, 장비의 몸이 여기 묻혀 있는데 ‘한환후사(漢桓候祠)’가 있다. 관우의 죽음에 분통을 터뜨리며“3일 안에 모든 군사들의 갑옷을 새로 만들어 복수를 하러 간다.”라고 신하들에게 무리한 명령을 내린 장비에 압박을 느낀 장비의 부하 범강과 장달이 만취해 잠들어 있는 장비를 죽이고 만다. 그리고 이릉에서는 승승장구하던 유비가 더운 여름을 피해 숲으로 들어갔다가 화공을 당해서 지고 결국은 후퇴하여 백제성에서 화병으로 죽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불로 공격하는 화공이 나온다. 화공은 화마처럼 모든 것을 싸그리 없애는데 사실 불은 만약 살아 남았다면 흉터를 남기게 된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침인 BT침을 사용하여 화상흉터를 치료하는데 화공처럼 신속하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연전술로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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