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위 파동은 대단히 소모적인 행위다. 국왕이 실제로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고, 국왕은 의사를 관철하겠다고 고집한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둬진다.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이런저런 정치적 전환이 이뤄진다. 적지 않은 선왕들처럼 영조도 신하들을 제압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방법의 하나로 양위 파동을 사용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미 영조는 5회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재위 15년(1739) 1월, 16년 5월, 20년 1월, 21년 9월, 그리고 25년 1월이었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각 4, 5, 9, 10, 14세였다. 맨 처음 네 살의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지시는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다. 이 사건들은 그 기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3년 뒤인 재위 28년(1752) 12월 14일 영조는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세자는 극력 만류했다. 그러자 국왕은 “네 효성이 밝혀지면 너를 위해 전교(傳敎: 임금의 명령)를 거두겠다”면서 [육아시(蓼莪詩)]를 읽게 했다.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한 편으로 ‘무성하게 자란 아름다운 채소’라는 의미다. 어떤 효자가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고 아름다운 채소로 알았지만 살펴보니 쓸모없는 잡초였는데,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세자는 그 시의 끝부분에 이르자 부왕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다(至終篇, 王世子伏於前, 涕汪汪下). 약속대로 전교는 철회되었다. 세자의 나이 17세였고, 밤 3경(23∼1시)의 일이었다. 2년 뒤에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했다. 영조 30년(1754) 12월 대사간 신위(申暐)를 종성(鍾城)에 귀양 보냈는데, 그의 상소에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이 부분을 “내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라고 지목하면서 “내가 예순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아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글을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라고 세자를 꾸짖었다. 계속해서 국왕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렸다. 세자는 관(冠)을 벗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席藁待罪)한 것이 두 번이었고,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짓찧은 것이 한 번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계속 내렸고,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번의 소동은 어둑새벽(黎明)에나 끝났다(2일). 갈등의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3년 뒤 22세의 세자는 스스로 반성하면서 승정원에 글을 내렸다. “나는 불초(不肖)하고 불민(不敏)한 사람이어서 정성과 효성이 천박(淺薄)해 잠자리와 식사를 돌보는 절차를 때맞춰 하지 못했으니 자식된 도리에 참으로 어긋남이 많았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대조(大朝: 영조를 말함)께서 그동안 거듭 간곡하게 가르치신 것은 참으로 자애로운 성의(聖意)와 사물(事物)에 부응하는 지극한 가르침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불초하고 불민해 만분의 일도 우러러 본받지 못했고 작년 5월에 반성하겠다고 한 말 또한 한두 가지도 실천하지 못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황공하고 부끄러움이 갑절이나 되어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겠다. 성실히 강학(講學)하지 못하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지 못한 것은 어느 것도 내 허물이 아닌 것이 없다. 어제 두 대신이 반복해 경계해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끝없이 후회할 뿐이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끝없이 후회할 뿐이다. 지금부터 통렬히 스스로 꾸짖고 깨우쳐 장차 모든 일에 허물을 보충해 이전의 기질과 습관을 한번에 바꾸려고 한다. 만약 혹시라도 실행하지 못하고 작년처럼 된다면, 이것은 내 잘못이 더욱 심한 것이다. 아! 조정의 신하들은 나의 이 뜻을 체득해 일마다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 영조 33년(1757) 11월 11일 동일한 표현을 거듭 반복한 부분은 반성의 깊이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의 크기를 보여주는 측면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왕은 아들의 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ㆍ좌의정 김상로(金尙魯)ㆍ우의정 신만(申晩)ㆍ좌참찬 홍봉한과 양사(兩司)의 장관(長官)ㆍ유신(儒臣)이 모두 입궐했다. 초경(初更. 19∼21시)에 국왕은 최복(衰服: 상복의 하나)을 입고 걸어서 숭화문(崇化門) 밖에 나와 맨땅에 엎드려 곡을 했고, 동궁도 최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었다. 신하들이 엎드려 울면서 “전하께서 어찌 이런 거조를 하십니까?”고 묻자 국왕은 대답했다. “승지가 동궁의 글을 가지고 와서 아뢴 것에 ‘뉘우쳐 깨달았다’는 말이 있으므로 얼른 지나쳐 보고는 놀라고 기쁨을 금치 못해 경들을 불러 자랑하고 칭찬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정신을 쏟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동궁을 불러 ‘지금 네가 뉘우친 것은 어떤 일이냐?’고 물었지만, 동궁은 대략만 말하고 끝내 시원하게 진달하지 못했다.” 이때 신하들이 세자를 두둔하면서 그 까닭을 설명한 부분은 매우 주목된다. 유척기ㆍ홍봉한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은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특히 홍봉한은 “동궁은 보통 때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알고 있는 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밤 동궁은 물러나와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해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청심환을 먹고 한참 뒤에야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두 겨울 밤 늦게 벌어진 이 세 번의 사건은 그 무렵 부왕과 세자의 관계를 깊이 비춰준다. 특히 그때 22세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기절했다가 한참만에야 깨어난 맨 뒤의 사건은 극한적인 감정의 충격을 보여준다. 이런 세자의 정신적 질환은 2년 정도 전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영조 31년(1755) 약방 도제조 이천보(李天輔)는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고 아룄다(4월 28일).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원인을 의대증(衣帶症)이라고 지적했다. 그 증상은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임오화변(壬午禍變: 영조 38년 윤5월 세자가 뒤주에 갇혀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 당일의 기록에서도 “정축년(1757. 영조 33)ㆍ무인년(1758)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 궁중의 계집종)와 환시(宦侍: 내시)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다.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요컨대 세자는 20세 무렵 부왕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신적 질환에 걸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때 질환이 표면에 드러났으니, 그 원인과 징후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아마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후일 것으로 여겨진다. 국무를 맡긴 뒤부터 부왕은 세자를 더욱 자주 질책했고, 세자는 부왕은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었다. 그 결말은 참혹한 비극이었다.
http://bit.ly/1CeTjMM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비밀의 문이란 드라마를 보니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선위를 자주 하여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난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자게 사도세자를 힘들게 하는 선위파동을 일으킨다. 사전적으로 선위[禪位]란 왕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다. 양위 [讓位]란 임금이 왕위(王位)를 물려주는 것으로 유사어는 선양(禪讓)과 선위(禪位)라고 하여 구별이 안되고 있다. 양위 : 왕실인사중 뛰어난 이에게 물려준다. 선위 : 천하의 인재를 두루 살펴 출신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이에게 물려준다. 선위는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으므로 왕조가 바뀌는 경우가 흔하며 나라가 바뀐다. 예를 들면 고려 공양왕 (왕씨)가 조선 태조 (이성계 씨)에게 하는 왕조와 나라가 한꺼번에 바뀐 케이스는 선위이다. 조선 정종이 조선 태종에게 임금을 양보하는 것은 왕조도 나라도 달라지지 않은 케이스로 양위라고 한다.
禪(봉선, 양보하다, 전하다 선; ⽰-총17획; chán,shàn)를 보면 유비의 아들 촉나라의 후주인 유선이 재위 40년 째인 264년에 등애(鄧艾)의 기습 공격으로 수도인 성도(成都)가 위태로워지자, 그해 겨울에 위에 항복하였다. 이후 종회(鍾會)와 강유가 촉 회복 운동, 즉 위나라에 대한 반란을 꾀하다가 토벌된 뒤, 낙양(洛陽)에 압송되어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졌다. 위왕 조조가 살았을 때는 제위를 유지하였지만, 조조가 죽고 그 아들 조비대에 이르러 조비의 신하들이 헌제에게 제위의 선양을 강요한다. 강요를 감당할 수 없는 헌제는 조비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하는데, 조비는 고사를 본받아 짐짓 선양을 거부하다가 이내 수락한다. 결국 수선대에서 선양식이 거행되고 결국 4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 한 황조는 이로써 완전히 멸망한다. 헌제는 선양한 이후 산양공으로 격하되었다. 즉 한나라 헌제에서 위나라 조비로 완전히 성씨와 나라가 달라질때만이 선위[선양]이라고 불릴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비밀의 문에 나오는 선위를 하겠다는 말은 말이 안되고 양위로 정정해야 한다. 우리 몸에 생긴 흉터도 멀리서 보면 정상 피부와 비슷하여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보면 흉터를 인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작은 흉터는 성형수술 흉터, 대상포진 흉터, 수두 흉터등이 있다. 글자 한자 차이라고 생각하여 사소한 흉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얼굴에 만약 흉터가 존재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런 경우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 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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