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燕山君,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 1506년 11월 20일 (음력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융(㦕), 본관은 전주(全州) .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이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았다. 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왕비 추숭을 반대한 사림파 문인들과 충돌하다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빌미로 사림파를 제거했다. 또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발생한 갑자사화에서는 사림파와 양대 파벌을 이루던 훈구파와도 절연하여, 사림파를 적대세력으로 훈구파를 비호감세력으로 만들어 독단정치에 접어들었다. 그 뒤로 사림파의 간쟁을 일절 무시하고 훈구파의 공적을 과거로 치부해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 국왕 보좌기관이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예문관 등을 대폭 축소하거나 감원하고, 유가와 불가의 대표적인 기관인 성균관과 원각사 (圓覺寺)를 기생 양성소와 유흥장으로 만들어 국초(國初)의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욕보였다. 그 밖에 민간 여자들과 반가의 사대부가의 여자들을 자의 혹은 강제로 입궐시켜 성관계를 갖는 등 치세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종친을 두고도 파격적인 언행을 일삼아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여된 성종의 후궁들을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한 뒤 무덤 줄만 못한다 하여 그 시체를 들판에 짐승의 먹이로 내다버리게 하였으며, 인수대비의 초상 때는 인수대비가 3년상을 받을 사람이 못 된다 하여 3년상 대신 25일로 장례를 마쳐 유학자들의 비난을 초래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하게 만든 성종의 두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에게 곤장형을 내렸으며 그 집행을 그들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담당시켰다. 하지만 안양군과 봉안군은 정귀인과 엄귀인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이유로 곤장을 때림에 있어서 사정을 봐주면서 때렸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난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에게서 몽둥이를 빼앗아서 정귀인과 엄귀인을 마구 폭행해서 숨을 끊어놓았다. 연산군은 그것도 모자라서 정귀인과 엄귀인이 사망한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연산군은 두 귀인에게 각각 1천번 이상의 몽둥이질을 하고 나서야 매질을 그쳤다. 그리고 정귀인과 엄귀인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젓갈로 담근 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뿌렸다. 위의 내용은 야사에서만 전하는 내용이다. 이후 안양군과 봉안군은 귀향을 보낸뒤 사사시켰다. 중종 실록을 살펴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과 사냥터를 조성할 목적으로 민가를 부수고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어 철거민들이 발생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연산군일기 제위 9년 11월 2일자 기사에 승지들에게 명한 것을 살펴보면, 궁 100척 이내에 민가가 있으면 불가한 것이 조선의 국법인 바 왕이 이 민가들을 철거하라 명했다. 이 때가 겨울인 것을 감안하여 민가를 철거당한 백성들에게 집터를 제공하고 큰집 중간집 작은집으로 등급을 나누어 무명 50필 30필 15필을 지급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다시 명을 내려 지금이 겨울임을 감안하여 봄이 될때까지 기다려서 철거하라 하였다. 불법 민가를 철거하는데 소정의 보상급을 지급하고 장차 다시 집을 세울 터까지 제공하는 것은 폭군의 증거라 하기 어렵다. 그해 음력 7월 20일에는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언문을 아는 자를 모조리 잡아들이고 언문 서적을 모두 태워 버리는 등 언문 사용을 금한다는 명을 내렸지만 이내 거두었고, 악보를 쓰고 책을 편찬할 때 훈민정음을 자주 사용하여 이를 계속 탄압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연산군은 언문 아는 사람을 잡아 일일이 필적으로 대조하고 언문책을 불사르고 사용을 금지했다 그에 대해서는 연산군의 문화적 잘못이라는 평이 있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즉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수탈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와 그 투서에서 연산군을 비방하는 자가 누구라고 지목하여 왕에게 알리라는 고변이 있었는데, 자신을 비방하는 글이 언문으로 쓰여졌다는 이유로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우게 했다. 1505년(연산군 11년) 음력 6월 9일 신료들이 처음으로 헌천 홍도 경문 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물리친다. 그러나 마지못해 받는 듯 하면서 존호를 받아들인다.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기생들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무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과 월하매 정도였다. 이는 반정 측에서 연산군을 깎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 같다.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박씨는 50대의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의 나이였으므로 이 소문 역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은 압반과 사헌부감찰 등을 동원하여 사치와 나태에 물들어있던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규찰, 감시하게 했고 또한 의정부의 정4품직인 사인, 검상, 이조와 병조의 낭관들의 관직에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가며 임명하게 함으로써 문신 관료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지했다. 이로써 문인 관료들 사이에 경쟁을 하게 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년 7월 15일 (음력 윤 6월 1일) ~ 1482년 8월 29일 (음력 8월 16일))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며, 10대 왕 연산군의 생모이다. 연산군 즉위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인 교태전 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여 잡아다가 추궁, 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성종의 눈밖에 났고, 말싸움 중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설로는 삼사의 탄핵으로 폐출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왕실의 사후 예우를 본다면 왕실의 눈 밖에 나 폐위된 것이 유력하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으로 윤씨는 마침내 1479년,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음력 6월 2일(양력 6월 21일)에 왕비에서 폐위되었다.
폐비윤씨가 연산군을 임신하고 있을 때 총애를 해야 할 성종이 다른 후궁을 찾아 폐비윤씨는 질투심이 폭발하고 결국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할퀸 자국을 내어 폐위되고 사사를 받아 죽게 되었다. 질투심에 눈이 멀었으니 연산군의 태교에 전념하지도 못하고 결국 아들은 조선 시대 최고의 폭군이 되었다. 태교에 전념을 하려면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 그런데 출산후 튼살의 걱정 때문에 번민이 많으면 매우 낭패이다. 임신시기에 튼살을 예방한다는 로션이나 크림을 사서 바르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출산후 1개월 이후부터 이미지한의원의 복부 튼살 프로그램인 비키니 튼살 프로그램을 받아 ST침으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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