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산(柳珍山, 1905년 10월 18일 ~ 1974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청년운동가, 정치인으로 전라북도 금산군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정국에서는 우익청년단체를 운용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에 가담하여 친일파 단속, 척결활동을 했으나 실패했고, 제1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시절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신민당 대표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치적 계보는 민주당 구파였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한 이후 민주당, 신민당, 민정당, 신민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본명은 유영필(柳永弼), 호는 옥계(玉溪)이다. 진산(珍山)은 원래 그의 필명이자 호였으나 나중에 이름이 되었다.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지냈다. 1970년의 신민당(新民黨) 대선 예비후보 경선에서 유진산의 선출이 유력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국민들이 유진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유진산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에게 후보자 지명권을 달라고 당내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기가 지명될리 없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했지만, 유진산은 후보자 지명을 강행하여, 자신의 계보의 정치적 적자인 김영삼을 대선 후보자로 추대했다. 1970년 단일지도체제의 신민당 당수가 되었을 때 그는 정무위원과 당직을 자파만으로 독점하지 않았다. 타협과 안배의 정치가 치고의 정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신파나 외부 영입 인사들도 당 간부로 선임하는 것에 반발한 윤보선 등은 그가 따로 자기 세력을 키우려 한다고 의심했다. 5·25 국회의원 총선 후보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를 등록함으로써 제1차 진산파동이 발생했다. 유진산이 자기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로 중앙선관위에 등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앙선관위 밖에 있던 일부 신민당 청년 당원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거센 항의를 계속하였고, 유진산은 자파 청년당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봉변을 모면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당내 소장층과 영등포 갑구 당원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당수직 사퇴를 요구하는 사태로 벌어졌다. 이에 대해 신민당 비주류인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다. 1971년 5월 8일 성명을 통해 "나는 이미 당수직 사퇴 뿐만 아니라 정계은퇴도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수에게 선거구를 팔아 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가로채겠다는 행위를 먼저 규명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 고 선언하면서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 취임 기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사태는 제3자에 의한 중재를 통한 수습을 하게 되었다. 이에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당 중진들은 “유진산의 당수직 사퇴 당수직에 대한 다음 승계권자인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의 사퇴 총선기간 중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한다.“ 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김대중은 이 중재안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의사를 나타냈으나, 더 이상의 별다른 수습안이 없는 상태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신민당은 5월 10일 운영위원회를 열고 유진산과 양일동 등 운영위원회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을 신민당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한다. 1971년 제1차 진산파동의 여파로 같은 구파인 김영삼에게 총재직을 주고 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가, 1973년 다시 신민당 총재에 선임되었지만, 얼마 안가 제2차 진산파동으로 다시 총재직에서 내려와, 역시 얼마 뒤에 다시 당선되었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자 유신반대 국민 서명운동을 추진하였다. 1973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신민당 당수로 당선되었고, 73년 가을 박정희와 박정희·유진산회담을 하였다. 이후 여당에 대한 타협, 화합론을 주장하다가 윤보선으로부터 사쿠라 라는 질책을 당했는데, 이후 사쿠라 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생전 자신을 사쿠라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그는 '세상에서 나를 두고 흔히 권모술수의 능수로 악의에 찬 비난과 곡해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굳이 해명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권모술수라는 말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지만, 나로서는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면 항상 당당하게 꿋꿋하게 걸어 왔음을 자위해 본다. 나는 남에게 추파나 던지며 속중의 호감을 사려는 것을 극력 회피해왔다. 그러한 위선의 자행은 말할 수 없는 사회적인 해독을 초래하기 마련이다'라며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불교 전래 전에 벚꽃이 핀 봄날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쿠라란 축제 의식을 선동하기 위해 박수꾼과 바람잡이가 군중 속에 몰래 동원되어 사쿠라가 사기꾼이나 야바위꾼 뜻으로 변질되었다는 설이 있다.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과 《논어(論語)》의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맹자에게 제자 만장(萬章)이 찾아와 "한 마을 사람들이 향원(鄕原:사이비 군자)을 모두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면 그가 어디를 가더라도 훌륭한 사람일 터인데 유독 공자만 그를 '덕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이유가 무엇인지요."라고 물었다. 맹자는 그를 비난하려고 하여도 비난할 것이 없고, 일반 풍속에 어긋남도 없다. 집에 있으면 성실한 척하고 세상에서는 청렴결백한 것 같아 모두 그를 따르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지만 요(堯)와 순(舜)과 같은 도(道)에 함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덕을 해치는 사람'이라 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사이비한 것을 미워한다[孔子曰 惡似而非者]'라고 하셨다. "사이비는, 외모는 그럴듯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즉 겉과 속이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며, 선량해 보이지만 실은 질이 좋지 못하다." 공자가 사이비를 미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말만 잘하는 것을 미워하는 이유는 신의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정(鄭)나라의 음란한 음악을 미워하는 이유는 아악(雅樂)을 더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자줏빛을 미워하는 이유는 붉은빛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 공자의 어록인 논어에 ‘오자지탈주야(惡紫之奪朱也)’란 말이 ‘자주색이 붉은색의 빛을 빼앗는 것을 미워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도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천국은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얼마후에 곡식의 싹이 나와 기뻐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곡식사이로 잡초(독보리)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하인들이 놀라서 주인에게 보고하였다. 주인님 ! 분명히 좋은 곡식 보리를 심었는데 독보리 잡초가 많이 났습니다. 큰일났습니다. 저희들도 왜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주인이 대답합니다. “원수가 밤에 와서 몰래 가라지를 뿌리고 갔구나”
필자가 튼살을 미워하는 이유도 정상 피부와 달리 붉은색이나 흰색처럼 생긴 색으로 정상적인 피부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붉은 튼살이나 흰 튼살 모두 이미지한의원의 ST침으로 섬유아세포를 자극해 진피 콜라겐 재생 방법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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