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4일 수요일

낙화암과 삼천궁녀 붉은 글씨 튼살치료

낙화암과 삼천궁녀 붉은 글씨 튼살치료


낙화암(落花岩)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바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
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각형의 《백화정》 정자를 건립하였다. 아래에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조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인데, 다음과 같다.
[百濟古記云『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 相謂曰“寧自盡, 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백제고기(百濟古記)》에 말하였다.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에 임하였는데, 서로 전하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 이끌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므로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岩)이라고 부른다.』
이는 속설의 와전이다.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 함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전설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궁궐터를 가지고 분석해본 결과로는 3천 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권2에서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은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 1448~?)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최초였다. 이후 윤승한(尹昇漢)의 소설 <김유신>(野談社, 1941년)에서 '3천 궁녀'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했고,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항목에서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결국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부여 낙화암이 ‘붉은 페인트’로 이상한 글씨가 쓰여 있다.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알려진 부소산 절벽의 ‘낙화암’이란 글씨가 페인트로 떡칠된 것이다. 낙화암이 있는 백마강변에 위치한 ‘조룡대’, ‘자온대’ 등의 바위에도 붉은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페인트를 칠한 건 근처의 유람선 운영자들로, 관계자는 관광객들이 낙화암이라든가 조룡대라든가 선명치 않기 때문에 퇴색된 부분을 정비 했다고 한다. 문화재 당국은 뒤늦게 문화재청에 보고해서 처리해 원상 복구에 나서겠다고 했다.
붉은색은 신호등의 경고사인처럼 시각적으로 눈에 잘 띤다. 그런데 금강산을 봐도 김일성, 김정일 수령에 대한 찬양 문구가 붉은 색 글씨로 쓰여져 있어서 금강산의 본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자연을 망쳐 눈꼴이 사나운데 남한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가 찬다.
우리 몸에서도 붉은색 피부 질환이 있는데 붉게 변하는 발적이나 붉은 반점인 홍반등이 있지만 튼살도 처음에는 붉게 시작한다. 붉은 튼살은 일반적으로 6개월 이내에 발생한 튼살이므로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잘 치료가 되며 또한 몇 년, 몇십년 지난 흰색 튼살도 이미지한의원의 ST침으로 잘 치료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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