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사기 오자서열전의 일모도원과 흉터치료

사기 오자서열전의 일모도원과 흉터치료


오자서의 부친 오사는 초 평왕의 태자 스승으로, 평왕과 태자의 사이가 나빠지고, 태자가 폐위되면서, 오사와 장남 오상은 평왕에 살해됐다. 홀로 남은 오자서는 복수를 맹세하고, 태자와 함께 정나라로 탈출한다. 정나라로 간 태자는 진나라의 부추김으로 반역을 하려고 했지만, 역으로 정 정공에게 살해된다.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과 함께 이번에는 오나라로 도망했다. 오나라로 간 오자서는 오나라 왕의 종친 광(光)을 섬겼다. 광은 원래 왕이 되었어야 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복 동생 요에게 왕위를 빼았긴 사실을 알고 광의 쿠데타 때에도 협력하여, 광은 즉위를 해서 오왕 합려가 된다.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여 강대국으로 만든 뒤, 기원전 506년에 초나라에 병사를 일으켜, 그 수도를 함락시켰다.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오자서는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원한을 풀었다.
강대해진 오나라는 패권 야욕으로, 월나라를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월왕 구천의 참모 범려와 지혜 대결에서 패하고, 오군은 월나라에 대패하게 된다. 이 때의 상처로 합려는 사망하게 된다.
합려의 아들 부차가 후사를 잇고, 부왕의 복수를 맹세하면서 오자서도 그를 보좌하였다. BC 494년 월나라와 싸워 대승하게 된다. 이때 오자서는 구천을 죽일 것을 강력하게 주창하지만, 부차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신 백비의 말을 따라 월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것으로 끝을 내었다. 월나라에 대한 지속적인 경계를 강력 주창한 오자서와 중원 진출을 통해 패자를 바라는 부차와의 골을 메꿔지지 않았다. 한편 월나라의 범려는 간자인 서시와 오나라 간신 백비를 사용하여, 부차의 귀에 오자서를 중상모략하게 된다.
그 후도 부차는 북으로 계속 출진을 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국력을 급속하게 소모하고 있었다. 오자서는 제나라가 피부병이라면, 월나라는 속병이니, 패권주의를 접고, 내실을 다지도록 진언하지만 부차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재상 백비는 성실하고 정직한 오자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다양한 수단으로 부차의 흥이 깨지도록 부차와 오자서를 이간질한다.
이 상태로는 언젠가 월나라에 화를 입을 수 있다고 판단한 오자서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다. 그러나 스스로는 오를 버리지 않겠다고 돌아오고, 이 일이 본국에 돌아온 후에 알려져 문제가 되고, 오자서는 부차로부터 검을 건네받고 자살하도록 명령받는다. 그 때, 오자서는 자신의 목을 베어 월나라의 방향의 성문에 걸어두고, 월나라가 오나라를 없애는 것을 보겠다는 저주를 남기고 자결하게 된다. 그 말에 격노한 부차는 오자서를 가죽 자루에 넣어 강물에 버리지만,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근처에 사당을 지어주었다. 오자서가 죽은 후, 월나라를 경계한 자가 없어지고, 오는 파멸의 길로 나가게 된다. 오자서의 예언대로 와신상담한 구천의 월나라는 오를 쳐서 없앤다. 부차는 구천에게 잡혀 죽게 된다.
사후 1000년 뒤인 당나라 때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다.
오자서는 격정의 사람이다. 그 몇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격정 백탕네에 다대한 공적을 올렸다. 그러나 그 격정이기 때문에 최후는 주군과 대립해 소외당하고 자살에 몰렸다. 한편, 범려는 냉정하게 시류를 읽는이나 월을 떠나, 최후는 제로 부호가 되었다고 한다.
조조는 관도 대전의 때에 자군에게 내려온 장합들을 마중나갈 때에 오자서의 최후를 인용해, 「오자서는 시중드는 군주를 오인한 일을 깨닫는 것이 늦었다. 너가 나에게 항복한 것은 미자계가 은나라를 배반해 주를 시중들어 한신이 항우의 아래를 떠나 유방을 시중든 것과 같은 정당한 행동이다」라고 해 편장군으로 임명해, 도정후에 봉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건은 중상모략에 떨어져 오사에 이르렀다. 상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했으나 오원은 달아나 오에 갔다.」라고 열전의 6권에 「오자서 열전」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춘추시대의 오자서(伍子胥)는 초(楚)나라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오사(伍奢)와 형 오상(伍常)은 소부 비무기(費無忌)의 참언으로 평왕(平王)에게 죽었다. 이에 오자서는 오(吳)나라로 도망가 후일 복수할 것을 기약하였다. 마침내 오나라의 행인(行人 : 외교통상부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 된 오자서는 오왕 합려를 설득해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켰지만, 원수인 평왕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 후계자 소왕(昭王)의 행방 또한 묘연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신을 꺼내 300번이나 채찍질을 가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산중으로 피한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오자서의 행동을 지적하며, “일찍이 평왕의 신하로서 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천리(天理)에 어긋난 일이 또 있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오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 -두산백과

오자서는 “나는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머니, 거꾸로 도리를 역행할 수밖에 없다.(오일모도원 오고도행이역시지”고 하였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할 일은 많지만 시간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이는데 질병이 발생한 경우에도 시간이 없다고 핑계되며 치료를 미루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성형수술 흉터나 화상흉터등 흉터가 발생한 경우에도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며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존재하는데 이미지한의원의 흉터침 치료는 시기를 앞당길수록 효과가 좋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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