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4일 목요일

성승과 유응부 거사의 머뭇거림의 잘못과 흉터치료

성승과 유응부 거사의 머뭇거림의 잘못과 흉터치료


성승(成勝, ?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무신, 군인이며 단종 복위 운동의 가담자의 한사람이다.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이고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5촌 당숙이다. 중종 때의 형제 정승 이기, 이행 형제의 외종조부가 된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즉위하자 단종 복위를 거사하였으며, 공신 연회 때 세조 3부자를 타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아들 4형제와 손자 4명 등 사육신 및 관련자 500여 명이 사형당할 때 함께 사형당했다.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정조 때 좌찬성으로 다시 추증된 뒤 충숙의 시호를 받았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적곡(赤谷)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이고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아버지 성희와는 사촌형제간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1440년(세종 22) 경상도병마절제사로 부임하였다.
1446년 중추원 부사가 되었다. 1447년(세종 30) 중국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다. 1451년(문종 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正朝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년) 의주 목사로 부임하였고, 1455년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왕위를 강압으로 양위받자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으며,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다.
1455년 단종이 왕숙 수양대군을 추대하는 훈신들의 압력에 의해 양위하자 병을 핑계로 사퇴하였다. 세조의 회유책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고 이후 아들 성삼문, 박팽년, 류성원, 하위지, 이개, 김문기, 허조, 박쟁, 박중림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다.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한 공신들을 축하하는 한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여는 그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중추원사인 유응부와 당상(堂上)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의 뒤에 운검(雲劒)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 뒤 1456년 6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될 때 거사를 정하여 별운검으로 참여하여 세조와 의경세자, 해양대군 삼부자의 목을 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신숙주, 한명회 등이 연회를 취소하고 조사하면서 체포되었다.
1456년 6월 7일 세조가 잔치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고 명을 내렸으므로 그날의 거사는 중지되고, 뒷날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인 관가(觀稼)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의 실패로 체포를 염려한 김질의 밀고로 발각됨에 따라 모의하던 이들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6월 8일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형(凌遲處斬刑)을 당했다. 이때 그의 아들과 손자도 모두 죽음을 당했고, 조카들과 사촌 성희 등도 연좌되어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성달생의 묘소는 석물을 뒤엎어버리고 부관참시되었다.
그에 대한 상세한 행장이나 전기 등이 없음은 당시 그의 혈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숙종 때 사육신이 모두 복권되면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 뒤 정조 8년(1784년) 판서 엄숙(嚴璹)의 상소에 의하여 신원되고, 증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단종의 묘소인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향되고, 홍주(洪州) 노운서원(魯雲書院),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등에 제향되었다. 충숙(忠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송별 연회가 시작될 무렵,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찾아와, `창덕궁 광연전은 비좁고 또 더우니, 세자를 입시하게 하지 말고, 또 운검도 들여 보내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수양대군이 동의했다.
이로써 성삼문 일행의 거사 계획은 차질을 빚고 말았다. 화가 난 성승이 아들인 성삼문에게 연회장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한명회를 죽이고 계획대로 거사하자고 제안했다. 유응부도 이에 합세했다. 그러나 성삼문은 세자가 참석하지 않는 자리인지라 한명회를 죽인다고 해도 경복궁에 있는 세자가 군사를 몰고 온다면 승산이 없다고 하면서 거사
일정을 연기하자고 성승과 유응부를 설득했다.
이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문신들도 성삼문편을 들었다. 이 때문에 한참이나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성승과 유응부는 자기들 뜻을 굽히고 성삼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 일정이 연기되자, 모의에 가담했던 자들은 불안하기 그지 없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질은 안절부절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궁을 빠져 나와 그 길로 곧바로 긔의 장인인 정창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모든 거사 기밀을 발설해 버렸다.
유응부는 무인이다. 세조가 성이 나서 꾸짖기를 "네가 상왕을 핑계대고 사직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렸다!" 라 하고는 무사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겨서라도 사실대로 말하도록 하였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성삼문등을 돌아보고는 “남들이 서생들은 모의에 참여시키기에 부족하다고 하더니 과연이로다. 지난 날 연회를 청하던 날 내가 운검을 시험하려 했으나, 너희들이 굳이 말리며 '만반으로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더니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구나. 너희들은 사람이로되 꾀와 수단이 없으니 축생과 무엇이 다르랴?”
즉 무신들은 행동파라서 그 때 당시 연기를 하지 않고 바로 세조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문신들은 신중해서 거사를 연기하여 결국 밀고자가 나와 반역하여 세조 제거 음모는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피해를 보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암의 수술적 치료도 시기를 머뭇거리다 놓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암수술등 외과수술 흉터치료도 수술받은지 6개월이후면 바로 시술이 가능한데 흉터치료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흉터침 시술의 좋은 예후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술후 흉터는 1년-5년정도 흉터가 생긴 환자가 오기 때문에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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