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0일 수요일

명량 대첩의 쇠사슬과 피부의 방어선 mtm침 치료

명량 대첩의 쇠사슬과 피부의 방어선 mtm침 치료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 여  척을 격퇴한 세계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순신이 철쇄(쇠사슬)를 전투에 사용했다고 하나 신빙성이 희박하다. 그 예로, 《KBS 역사스페셜팀》은 철쇄를 사용한 명량 해전을 재현한 바 있다.
수중 철쇄(쇠사슬)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전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그러나 명량 해전의 전투 위치와 철쇄 사용 문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다음은 해군사관학교 해전사 담당 이민웅 교수(해군 중령)의 주장이다.

먼저 전투 위치는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난중일기》 음력 9월 16일자를 제시한다. 그 부분을 보면 “왜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민웅 교수의 주장이다. 또, 명량에서 쇠사슬을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전라좌수영 앞에 방어용 쇠사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명량 해전에서 쇠사슬은 물살이 세서 걸 수가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기록은 과장이 많아,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철쇄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근거로써 쓰인다.

즉, 이민웅 교수는 철쇄 사용설을 일축한다. 또, 명량해전이 치러진 장소가 우수영 앞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명량해전이 치러진 장소가 우수영 앞바다라는 이민웅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순신역사연구회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여, 명량해전이 정설대로 울돌목에서 치러졌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그러한 이순신역사연구회의 반론을 보여주는 책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한 부분이다.
우선 우수영 앞바다는 조류의 흐름과 무관하며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때문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도 왜군들은 물러가지 않고 조선 함대가 궤멸될 때까지 계속 공격해 올 것이다. 진법으로 대치하고 있었다면 마다시의 죽음과 관계없이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다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선단들도 총력 공세를 폈을 것인바, 왜군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를 전멸시켰듯이 13척의 이순신 함대를 전멸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도대교 아래에서 마다시를 죽였고 마다시 선단을 대신해서 공격을 시도코자 했던 도도 다카도라 등 뒤따르고 있던 왜선단은 패전한 마다시의 선단이 불이 붙은 채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떠내려 오고 있었기에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그 위에 역류가 된 물살은 더욱 급류로 변해 갔기에 이순신 함대에 접근해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난중일기》에서 정유일기 1권을 보면 적선 133척으로, 정유일기 2권을 보면 적선 130여척으로 나온다. 이《난중일기》를 엮은 간행관은 적선을 330척으로 표기했으나 이는 난중일기를 잘못 판독한 것이다.  유득공의 《이충무전서》에서는 333척으로 나왔다.
한편 《난중잡록》에서는 병선 수백척으로, 《이충무공전서》 와 《연려실기술》은 5~6백척 이라고한다. 한편 《선조실록》의 장계 등에서는 130여척으로 나오는데다 입으로 전해져서 과장되었다고 보는 추측이 있고, 또한 조선 수군에 많이 패한 와키자카, 도도 등이 대함대를 거느릴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에서 130여척으로 보는 편이다.

필자는 철 쇠사슬과 철 갈고리는 바다에서 설치 한 것이 아니라 적선에 뛰어드는 백병전을 위해서 배에서 쇠사슬과 갈고리를 걸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몸의 피부도 보호를 위하여 수 많은 겹겹의 사슬과 같은 구조가 있다. 속칭 피부는 외부 이물질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바리케이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진피는 콜라겐과 엘라스틴의 탄력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외부 세균이나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화장품도 진피 안으로 흡수되는게 매우 어렵게 된다. 이런 피부 보호막을 뚫고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 이미지한의원의 mTm침이다. mTm침은 피부 톤이 밝아짐, 피부 탄력 증가, 각질제거로 피지 분비 촉진, 피부 진피 콜라겐 재생등 다양한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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