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9일 금요일

해부학과 나체 ST침 튼살치료

해부학과 나체 ST침 튼살치료


해부학 개론서에 삽화를 넣기 위해 의사들과 작업하기 전 화가들은 독자적으로 해부에 몰두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사람들은 다시 인체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경기장에서 운동 선수들의 벗은 몸을 주시하고 연구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와 달리, 인간의 체형에 대한 지식을 더 이상 얻을 수 없었다. 그리스 시대의 육체미 숭배는 인물상의 옷주름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알몸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익살과 기괴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분야에 속한다. 화가들이 나체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지하 납골당의 어둠 속 시체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위대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전기를 쓴 바사리는 15세기 중반 훌륭한 화가들 중 인체의 형상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엿던 이는 폴라이우올로라고 말한다. “그는 당시의 어떤 화가보다도 나체를 잘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물상에서 표현할 근육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시체의 피부를 벗겨가면서 해부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시신은 인체 실험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졌다. 객관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의 알몸을 자세하게 관찰하려면 알몸이라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성적 욕망 때문에 부끄러워하거나 조심스러울 수 있다. 시체는 더 이상 우리의 관능을 자극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부끄러움 없이 분석과 비평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다. 중세 말 화가들은 해골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죽음의 舞蹈무도라는 중세의 중요한 주제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시체를 살아 있는 듯 재현하는 것이었다.
인체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공사, 필리프 코마르, 안정미, 페이지 70-71
 
베살리우스가 해부학을 처음으로 책을 낸 뒤로 서양의학은 해부학 발달과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이원론을 발달시켰다.
1540년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1491~1556.7.31): 예수회 (Society of Jesus, Jesuits) 창설.
1543년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icus, 1473.2.19~1543.5.24)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elestium" (4) 발표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 1514.12.31~1564.10.15) "인체해부에 관하여" 출판(당시 29).
사실 의학의 발달은 몸과 마음을 완전히 분리한 이원론의 데카르트의 철학에 근본함이 크다. 데카르트는 1596년 투랜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 (La Haye, 현재 그의 이름을 빌어 Descartes)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의 렌(Renne) 시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14달이 못되어 세상을 떴다. 이후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건강이 무척 허약했다고 전해진다. 1606년 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즈 (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하게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그런데 너무 인체를 아름답게 묘사하거나 시체처럼 취급하는 양극단에 있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닌 듯하다. 몸매에 자신이 있다면 신체를 어느정도 노출하는 것도 상관이 없을 듯한데 특히 각선미가 아름다운 여성은 도전해볼만도 하다. 하지만 튼살이 있을 경우 오히려 가리는 것이 더 시급한데 이미지한의원에서는 S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자극 재생해서 튼살을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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