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4일 목요일

사천성 촉한과 오나라 방어 흉터치료

사천성 촉한과 오나라 방어 흉터치료


200만 년 전 쓰촨(四川) 지역에서 인류 활동이 시작되었고, 지금으로부터 2만5천 년 전 문명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삼성퇴 문명(三星堆文明)으로 대표되는 고도로 발달한 고촉 문명이 형성되었다. 진(秦) 왕조가 쓰촨을 통치한 이후 쓰촨은 점차 중원(中原) 문화에 유입되기 시작하여 중국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대 역사 연구에 따르면, 약 200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초기 쓰촨에서 인류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7~8천 년 전 쓰촨 지역은 점차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였다. 약 4~5천 년 전, 쓰촨 지역은 고대 전설(傳說)시기로 접어들었는데 이 시기는 유적의 고고학적 발굴과 구두로 전해지는 전설이 늦어도 상대(商代)에는 성도 평원(成都-)이 이미 노예사회에 진입했음을 증명한다. 개명 왕조는 광도(廣都)에 도읍을 세웠는데 초기 국력이 강성하였다. 기원전 4세기, 개명 9대 왕조는 화하(華夏) 시기의 예법 제도를 따르기 시작했고, 도성을 광도에서 성도로 옮겼다. 진(秦) 혜문왕(惠文王) 9년(기원전 316년), 진은 천하 통일을 준비하였고, 돌소(石牛)로 길을 내어 촉을 토벌하였다.
촉을 점령한 진은 촉(蜀)과 한중(漢中) 두 군(郡)을 세웠다. 쓰촨 지역에서는 점진적으로 진의 제도가 실시되어 봉건 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진 소양왕(昭襄王)에서 장양왕(莊襄王) 시기(기원전 227~247년), 촉군태수(蜀郡太守) 이빙(李氷)은 촉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여러 중대 조치를 취하였다. 그 예로 두장옌(都江堰)을 건설하고, 검강(檢江)과 비강(郫江) ― 現 난허(南河)와 진장 강(錦江)사이 ― 의 수로를 열어 성도 평원을 날로 풍요롭게 하여 진시황의 중국 통일에 중요한 물질적 자원을 제공하였다.
서한(西漢) 시기 이후 쓰촨 지역은 사회, 경제, 문화가 빠르게 발전하여 번영의 수준이 관중 지역을 넘어서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리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 경제(景帝)의 즉위시기, 촉군태수에 오른 문옹(文翁)은 성도에 중국의 첫 번째 관영 학당인 문옹석실(文翁石室)을 세웠고 이때부터 촉 지역은 학문이 대성하여 제노(齊魯)지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서한 시기 말, 익주(益州)를 점거한 공손술(公孫述)은 국호를 성가(成家)라 하고 성도에 도읍을 세웠다.
동한(東漢) 말(189~214년), 익주는 또다시 유언(劉焉) 부자(父子)에 의해 할거되었다. 이후 유비(劉備)는 성도에서 제위에 올랐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촉한'(蜀漢, 221년 ~ 263년)이라 한다. 촉한의 영토는 오늘날의 충칭(重慶), 쓰촨(四川), 윈난(雲南)지역 대부분, 구이저우(貴州)지역 전체, 산시(陝西)와 간수(甘肅)지역 일부를 포함한다. 이로써 위(魏), 촉, 오(吳) 삼국이 병립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촉한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은 온 마음을 다하여 정치를 돌보아 촉나라 사회와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
촉한의 마지막 군주 염흥(炎興) 원년(元年)(263년), 촉이 위에 의해 소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염(司馬炎)이 진(晉) 왕조를 세웠다. 서진(西晉) 후기인 영흥(永興) 3년(306년), 이웅(李雄)은 성도에서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동진(東晉) 함강(鹹康) 4년(338년), 이웅의 조카 이수(李壽)가 다시금 국호를 '한(漢)'으로 고쳤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를 합하여 '성한(成漢)'이라 한다. 성한은 '십육국'(十六國) 중 가장 일찍 세워진 국가로 전성시기 그 영토가 쓰촨 분지 및 주변의 일부지역까지 미쳤다.

한(漢, 221년~263년)은 중국 삼국 시대 때 유비(劉備)가 지금의 사천성 지역에 세운 나라로, 흔히 촉한(蜀漢)이라 불린다. 한 황실의 후예가 세운 마지막 한나라이기에 계한(季漢)으로도 불린다. 220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위왕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를 내쫓고 제위를 찬탈하자, 당시 익주(益州)와 한중(漢中)을 점거하고 있던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역사적으로 “촉한”이라 불린다). 수도는 성도(成都)이다. 유비 사후 후주(後主) 대에 이르러 진지(陳祗) · 황호(黃皓)와 같은 간신의 발호와 무리한 북벌로 점점 쇠망의 길을 걷다가, 264년 위의 대대적인 정벌에 멸망하고 만다.
오나라는 황룡(黃龍)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천기(天紀) 4년(280년) 진에 항복하기까지 4대 52년에 걸친 왕조이다. 오나라의 손권은 위의 조조(曹操) · 촉한의 유비(劉備)와 비교하면 이미 손견과 손책이 쌓아올린 기반이 있어 처음부터 혜택받은 인물이었다. 오나라의 시조가 되는 손견은 일찍이 이 지방에서 이름을 떨친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孫武)의 후손이라고도 하며, 17살 때 해적을 퇴치해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중앙 정부에서 관리가 되어 각지의 반란 진압을 맡고, 명망 높은 원술(袁術)의 후원 아래에서 반동탁 연합군에도 가세하지만 초평(初平) 3년(192년)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를 공격하던 중에 허무하게 죽고 만다. 당시 손견은 일개 태수에 불과해 손견이 죽은 다음에는 영지와 병사 모두 원술에게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전장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움으로써 세상에 손씨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황개(黃蓋) · 정보(程普) · 주치(朱治) 등과 같은 신하는 계속해서 맏아들 손책을 받들었다.
손책은 실질적인 오나라의 창업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원술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후 강동에 기반을 쌓고 독립해, 친구 주유(周瑜)와 협력해 세력을 확대해 갔다. 손책은 성격이 활발하고 기꺼이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였으므로 그 당시 장소(張昭) · 장굉(張紘) · 태사자(太史慈) · 여몽(呂蒙) · 주태(周泰) · 장흠(蔣欽) 등과 같은 문무 관리가 수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건안(建安) 5년(200년), 손책은 자신이 죽인 오군태수(吳郡太守) 허공(許貢)의 밑에 있던 식객의 손에 의해 26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다른 이야기로는, 신료들이 자신보다 도사 우길을 더 존경한다는 이유로 우길을 처형하였는데, 우길의 원혼에 시달리다가 병사했다고도 한다). 손책은 임종을 맞을 때 동생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군세를 이끌고 싸우는 것이라면 내가 더 낫다. 그러나 현자를 발탁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일은 네가 더 낫다”라고 유언한다. 그리고 내정에는 장소, 군사에는 주유를 각각 보좌역으로 선정해 손책의 유언대로 오나라가 운영되어갔다.
이리하여 겨우 19살 때 손권은 오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흔히 정권 교체기에는 휘하의 신하가 무더기로 퇴출당하는게 일반적이었지만, 손권은 손책의 신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중요 인물인 장소와 주유가 솔선수범해 손권에게 충성을 바친 것도 이유였지만, 역시 젊은 손권이 위업을 이룰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손권의 치세에는 노숙(魯肅) · 제갈근(諸葛瑾) · 감녕(甘寧) · 서성(徐盛) 등의 인재들도 가세하였다. 건안 13년(208년), 유비와 연합해 천하 통일을 노리는 조조의 야망을 적벽(赤壁)에서 분쇄하였다. 그 뒤 유비와 형주(荊州)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건안 24년(219년), 관우를 공격해 형주에서 양측이 나눠 가지던 영역을 독점했다. 그 사이 조조에게 순응해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황초(黃初) 2년(221년), 촉한이 오나라를 침공하자 육손을 파견해 이를 저지하지만 이듬해 유비와 화해해 국교를 수복했다. 권모술수가 팽배한 당시의 난세에서 손권의 이러한 유연한 외교술은 오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황룡 원년(229년), 손권은 마침내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오나라는 또한 해상 무역에도 적극적이었다. 오나라의 황제가 된 손호는 성질이 포악하고 오만방자해 대사면을 연발하는 한편, 손휴의 아들 완(𩅦), 굉(𩃙), 망(壾), 보(𠅨)를 잡아들여, 완과 굉을 죽였다. 더구나 연회 자리에서 신하들을 취하게 만들어 허튼 언동을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안면을 벗겨내거나 눈을 도려내는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또 간신 하정 · 잠혼(岑昏)을 총애하고, 백성들을 가혹한 노역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민심은 급속도로 나빠져갔다. 280년 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호는 어이없이 그대로 항복하여, 중국대륙은 통일되어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촉나라 사천성 지형은 대체로 서쪽이 해발고도가 높고 동쪽이 낮은 편인데, 서부는 티베트고원의 동부에 해당되고 중부, 동부는 분지 지형이며, 동북쪽으로는 산시성(陕西省, 섬서성)과 접해 있는데 산시성과의 경계를 또 산맥이 가로지르는 형태라서 쓰촨성 밖에서 쓰촨성 안의 동부 분지로 들어오려면 서쪽과 북쪽의 산맥, 산지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남쪽에는 윈난성과 이웃해 있는데 쓰촨성 대부분의 분지 지역보다 윈난성 중북부가 해발고도가 더 높다. 즉 촉나라는 검각등 요새만 쳐들어오기 어려운 매우 방어가 쉬운 지역인데 유비가 형주를 버리고 공격보다 수비가 좋은 곳으로 들어간 것이 패착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긴장감이 풀어져 느슨해지면 나태해지고 결국 제갈량이 수비보다 공격을 앞세워 북벌을 했지만 실패하고, 유선도 실정을 거듭하다가 망하게 된다. 강유가 검각을 지켜 막아내려고 했지만 등애가 우회로로 바로 성도를 진격해서 금방 멸망한다.
삼국시대 오나라를 봐도 장강이란 천혜의 요새가 막혀 있어서 기마병 위주인 위나라가 쉽게 쳐들어오지 못해 결국 미치광이 군주가 나오자 쉽게 멸망하게 되었다.
우리 몸의 피부도 보호가 매우 쉬운듯하지만 취약하다. 그 이유는 표피가 시멘트 몰타르 구조로 바이케이트를 잘 치고 각질층만 20-30층이지만 0.1mm에 불과하여 쉽게 뚫릴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촉한의 험준한 지형이나 오나라의 장강처럼 지리적인 이점은 믿을만한 대상이 아니다.
피부의 방어선인 표피가 뚫리면 흉터가 발생하기 쉽다. 찰과상이나 자상, 열상등으로 생긴 흉터의 종류는 베이거나 긁힌 흉터부터 의료적 수술처치에 의해서도 생긴다. 즉 성형외과 수술이나 이런 다양한 수술흉터는 이미지한의원의 수술흉터침과 흉터침, 한약 재생약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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