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면류관과 관상 얼굴흉터치료

면류관과 관상 얼굴흉터치료


冕(면류관 면; ⼌-총11획; miǎn)旒(깃발, 면류관 앞뒤에 주옥을 꿴 술 류{유}; ⽅-총13획; liú) 冠[면류관]은 동아시아에서 임금이 쓰는 왕관의 일종이다. 복두관이나 익선관이 만들어지기 이전 고대 중국에서는 면류관만이 왕관이었고, 따라서 유교의 영향력 아래 들어있던 동양문화권 에서는 왕관 하면 곧 면류관이었다. 면류관은 보통 황제나 왕이 머리에 쓰지만 류의 개수나 곤복에 들어가는 무늬의 개수에 차등을 둬서 황족 또는 신하들도 쓸 수 있도록 허락된 시절도 있었다. 면류관의 구조를 보자면 관모 위에 '평천판(平天板)'을 얹어놓았으며 앞뒤로 '면류(冕旒)'라고 하는, 실에 구슬을 꿰어놓은 것을 매달아 만들었다. 그런데 무조건 아무렇게나 만드는 게 아니라 임금의 관모이니만큼 만드는 것부터도 격식이 중요했다. 명나라 천자가 쓰는 면류관과 조선 임금이 쓰는 면류관은 면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명나라 천자의 면류관은 면류가 앞뒤로 각 12개씩 24개를 달아서 만들도록 되어 있는 반면 조선 임금의 면류관은 앞뒤로 각 9개씩 18개를 달아서 만든다. 면류에 꿰는 구슬도 아무렇게나 꿰는게 아니라 황제는 붉은색-백색-푸른색-누른색-검은색의 순서로 한 줄당 12개를, 조선 국왕은한 줄당 9개를 꿴다. 양 옆에는 간신배들의 아첨하는 소리로부터 귀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청옥을 귀 부분에 늘어뜨린다. 곤복도 명나라 황제는 12가지 무늬가 들어간 12장복, 조선 왕은 9가지 무늬가 들어간 9장복으로 차별되었고, 조선 세자는 8면류관(구슬은 붉은색, 백색, 푸른색 3개 색만 사용하고 한 줄당 8개를 뀀) 7장복을 입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들어선 청나라는 만주족 고유의 황제복을 도입했기 때문에 익선관과 장복은 폐지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대한제국에서는 황제의 예를 따라 12면류관 12장복으로 승격되었다. 현재도 종묘제례 행사 재현 때 황사손 또는 황사손을 대신해 황제 역을 하는 분은 12면류관 12장복을 입고 참석한다.
중국 천자들이 평상시와 행사때를 불문하고 항상 쓰던 왕관이 면류관이다. 그러나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 천으로 만들어 더 가벼운 복두관을 써, 평상시에는 복두관. 즉위식, 종묘 제사, 조회 등 국가적 행사 때에만 면류관을 썼다. 이러한 풍조는 후대 왕조에도 이어져 송나라 때는 절상건이, 명나라 때는 익선관이 천자가 평상시에 쓰는 왕관이 되었다. 면류관 자체는 고대부터 시작되어 명나라 때까지 존속했지만 왕조마다 그 제도에 있어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가령 면류관에 늘어뜨리는 류에 들어간 구슬이 백옥인지 아니면 다섯 가지 옥 또는 일곱 가지 옥인지, 평천판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관모에 꽂는 비녀가 옥잠인지 아니면 금잠인지 등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청나라 때는 면류관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청조 멸망 후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를 자칭했을 때 잠시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다.
한국 역사에서는 신라 시대까지는 금관을 썼으나 임금들의 건강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고려 시대에는 절상건으로,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익선관으로 대체되었다. 금이 꽤 고밀도이다 보니 금의 비중이 높은 왕관을 쓰게 되면 목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 표현에 있어서는 금을 능가하는 소재가 없기 때문에 신라시대까지는 그걸 불사하고 금제 왕관을 착용했던 경우도 많다. 그러나 신라가 진덕여왕 때 당나라의 복식 제도를 수용하면서 금관 대신 복두가 들어왔고, 태조 왕건의 초상화에서는 12면류관을 찾아볼 수 있으며, 1065년(문종 19) 요나라로부터 9면류관 9장복을 사여받았다. 고려 시대에는 관리들도 직급에 따라 면류관을 썼으나 고려 말부터 신하들의 조복에는 금관을 쓰게 되면서 면류관은 왕, 혹은 세자, 세손의 전유물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익선관이 왕의 평상시 왕관으로 자리잡았고, 이 때 면류관도 같이 들어왔는데 1403년(태종 3)에 명나라로부터 사여받은 이후 대한제국 때까지 면류관은 행사용으로만 사용했다. 결국 특별한 날에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장교 정복과 의미가 비슷하다. 면류관을 쓸 때는 옷도 평상시의 곤룡포가 아니라 '곤복'이라는 더 복잡한 구조의 옷을 입는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퍼지자 예수를 잡아서 처형하려는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로마 황제가 쓰는 월계관을 본따 가시나무로 만든 모자를 예수의 머리에 강제로 씌워서 가혹행위를 했다. 이 때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유태의 왕(I.N.R.I.)라는 명패를 십자가에 달았고, 예수가 피를 흘리며 강제로 쓴 가시관을 왕관이라 불렀다. 이후 동양 문화권에 크리스트교가 전파되면서 월계관을 면류관으로 번역한 것이다.
면류관은 冕과 旒로 만든 모자. 면은 위의 넓직한 판으로써 달리 평천판이라 부른다. 류는 앞뒤에 드리워 얼굴을 가리는 구슬 꿴 발을 뜻하나, 류를 면류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류를 드리우지 않고 판만 있는 작변(爵弁)이라는 모자도 있는데, 이것에서 면류관이 파생되었다고도 한다.
http://bit.ly/1v23sqf 엔하위키 미러 출처

즉 모자에 구슬을 꿴 술을 달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장식으로 구슬을 하기보다는 왕의 얼굴을 신하들이 보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왕의 용안을 살펴 건강상태나 관상을 봐서 운명의 길흉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면류관으로 가려야만 했던 것이다. 말할때도 신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땅바닥을 보고 말하지 임금 얼굴을 똑바로 보고 말하는 것은 능지처참을 당할 무례한 태도이다.
요즘에 영화 관상이나 방영될 드라마 왕의 얼굴을 보면 수양대군이나 광해군이 왕이 될 관상인지 보는 소재로  쓰는데 왕은 면류관을 쓰게 된다. 즉 면류관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는 것이지 멋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경우에도 면류관처럼 얼굴을 가리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이마나 뺨등에 흉터가 있을 경우 머리카락을 술처럼 길러서 보호한다. 그렇게 가리는 경우는 점뺀 흉터, 수두 흉터보다 성형흉터나 어렸을 때 사고로 다친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리기에 급급하기보다 이미지한의원에서 흉터가 재생되는 흉터침, 한약재생약침, 침등으로 치료하는 것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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