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9일 화요일

주역의 대가 이달과 성냥 화상흉터치료

주역의 대가 이달과 성냥 화상흉터치료


강호동양학의 고수들은 강단이 아니라 필드(field)에 포진하고 있다. 고수를 만나려면 저인망으로 필드를 훑어야 한다. 강호를 유람하면서 만난 고수가 이응국(45)·이응문(44) 형제다. 이 형제의 주특기는 주역(周易)이다. 형인 이응국은 매주 호남선을 타고 다니면서 전라도 사람들에게 주역을 강의하고 있고, 동생인 이응문은 경부선을 타고 다니면서 경상도 지역에 주역을 강의하고 있다. 나는 주역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들 형제에게 조언을 구한다. 머릿속에는 주역 한 권이 통째로 저장되어 있어서 버튼만 누르면 즉각 답변이 튀어나올 정도다.
알고 보면 이들 형제는 우리나라 "주역명문가"의 후손들로서, 3대째 가학(家學)을 계승하고 있는 중이다. 가학을 계승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에 이 두 형제는 풍찬노숙하며 살아야 하는 강호파(江湖派)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들 형제의 사명감을 불러일으킨 인물은 할아버지인데, 그 할아버지가 바로 유명한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 ~ 1958)이다. 야산은 일제 암흑시기와 해방과 6·25의 격변기를 살면서 주역이 무엇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간 인물이다. 나는 주역공부가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이들 형제를 만나 야산의 행적을 더듬어 본다. 야산이 남긴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 대둔산 석천암(石泉庵)에서 108명의 제자에게 주역을 가르치고 있던 야산은 홀연히 "천수송(天水訟)" 괘가 떠올랐다. 64괘 가운데 여섯번째 괘로서 위에는 건괘가, 아래에는 감괘로 이루어진 괘다. 야산이 천수송 괘에서 주목한 대목은 "송사를 이기지 못하니 돌아가 도망하여, 그 읍 사람이 300호면 재앙이 없으리라"(不克訟이니 歸而逋하야 其邑人이 三百戶면 無 하리라)였다. 송사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하였다. 야산은 전쟁에 대비하였다. 전쟁 자체는 천지의 운수라서 한 개인이 막을 수 없지만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만큼은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야산은 제자들 몇 명에게 서해안의 안면도(安眠島)로 이주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제자들은 긴가민가하면서 가재도구와 전답을 팔아서 배를 타고 안면도에 들어갔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배도 한 척 구입하였다. 이름은 스승인 이달(李達)의 이름을 따서 "대달환(大達丸)"으로 지었다. 1947년부터 시작해서 6·25 직전까지 제자들의 안면도 행렬이 이어졌다. 배가 출발하는 지점은 충남 홍성군 광천이었는데, 광천에서 배를 타고 안면도로 들어가기 전에 달산면(達山面)이라는 곳을 거쳐서 가도록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달산면에 1년 정도 거주한 뒤에 안면도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지명에 달(達)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산은 배를 타고 가면서 "안면도는 앞으로 눈목(目)자를 떼어 내고 안민도(安民島)로 바꿔야 할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이르기도 하였다. "안민도"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섬"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야산을 따라서 안면도와 광천 일대로 이주하였던 제자들의 숫자는 대략 300호가량 되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천수송 괘의 숫자와 일치하였던 것이다.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1000명이 넘는 숫자였다. 안면도에 들어간 제자들은 생계를 위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였다. 하나는 공장에서 내다버린 실을 수집해 다시 잇는 작업을 하였다. 끊어진 실을 다시 이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던 것이다. 이는 남북의 분단을 다시 잇는다는 의미를 지닌 사업이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사업은 태극표 성냥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태극은 주역의 상징이지만, 당시 한반도 분단의 상징이었다. 태극표 성냥사업은 불을 통해서 음양을 통합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6·25가 터지기 1주일 전쯤에 야산은 제자들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여기에 내놓아라! 이 돈을 가지고 광천에 가서 쌀·콩·곡식을 모두 사들여라!"그런 다음에 1주일분 식량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광천에 되돌아가서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제자들 일부는 불평을 하였지만 스승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었다. 1주일 후에 6·25가 발발하였고 얼마 있다가 인민군들이 광천과 안면도에 들어왔다. 인민군이 들어와 보니까 광천 일대에는 이상한 떼거리들이 몰려 있었다. 지역 주민들이 인민군들에게 "야산이란 사람의 제자들인데, 이 사람들 때문에 굶주림을 면하였다"고 보고하였음은 물론이다. 인민군 책임자는 야산을 광천으로 소환하였다. "선생이 우리들보다 낫습니다. 제자들에 대해서는 손 하나 안 대겠습니다. 공산주의를 공부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야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전해진다. "나는 공식주의자(共食主義者)입니다." 공산(共産)이라는 말은 부자의 재산을 강제로 뺏어서 나눈다는 의미가 있지만, 공식(共食)이라는 표현에는 한 솥단지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공산보다는 공식이 좋다는 말이었다.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談畵담화, 글 조용헌, 그림 이보름, 랜덤하우스, 184-189페이지

야산 이달 선생은 매우 기이한 행동이 많다. 필자가 주역을 배운 眞山진산 선생님도 이달 선생님의 직계 제자였다. 진산 선생님도 이달 선생님이 천수송괘를 보고 6.25때 안면도로 피난간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난다. 즉 訟송이란 소송이니 북한과 남한이 전쟁을 해서 시비곡절을 다투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 아무튼 그가 안면도에 살 때 성냥공장을 했던 것이 특이하다. 필자도 아주 어린 시절에 성냥을 본 기억이 나는데 라이터로 대체된 이후에 거의 화석처럼 멸종이 된 듯하다.
성냥은 불길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예전에 집들이 선물로 가져갔는데 집안이 일어나고 부자되라고 양초1통, UN 곽성냥 한 두통이 필요했다. 요즘은 생일 케이크 켜는 성냥 이외에 거의 유통이 되지 않는 듯해서 씁쓸하다. 성냥이 천대받은 이유는 금연정책과 또 화재 예방차원 때문일수도 있다. 특히 화재는 화마로 불리고 한번 화상을 입은 경우에는 화상흉터까지 남는다. 그런데 필자는 화상흉터를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하지만 실제 불에 의해서 덴 화상흉터는 20%도 안되며 실제는 끓는 물등에 의해서 생기는 화상흉터가 대다수이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침으로 화상흉터를 치료하는 방법이 섬유아세포를 자극해 진피 콜라겐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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