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4일 목요일

삼국지연의 북벌과 강유 인후지지 목 갑상선암 흉터치료

삼국지연의 북벌과 강유 인후지지 목 갑상선암 흉터치료


강유(姜維, 202년 ~ 264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자는 백약(伯約)이며,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 사람이다. 본래 위나라의 장수로써 천수태수 마준(馬遵)을 섬겼으나, 227년 제갈량(諸葛亮)의 1차 북벌 때 천수군의 각 현이 촉한에 호응한다는 소식을 들은 태수가 의심을 품는 바람에 버림을 받아 갈 곳이 없어졌다. 제갈량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지극한 효자 라는 것을 이용해 투항하게 만든다. 학문과 무예, 인품을 모두 갖춰 제갈량으로부터 "마량(馬良)보다 뛰어난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갈량 사후에 대장군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장완(蔣琬)의 지원을 받아 위를 치려했으나, 장완이 사망하고 그에 대해 부정적인 비의(費禕)가 뒤를 잇자 야심은 잠시 가라앉게 된다. 비의는 북벌에 소극적이고 내정부터 충실히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장완과 비의가 모두 죽자, 유선(劉禪)은 강유에게 대장군의 직책을 맡긴후 위를 견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강유는 제갈량이 생전 이루지 못했던 북벌에 집착하여 9차례 북벌을 하지만 모두 위의 장수에게 막히거나, 환관 황호(黃皓)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유선의 퇴각명령으로 끝난바가 있다.
후에 263년 등애(鄧艾)의 촉 정벌 때 검각에서 위나라의 장수 종회(鐘會)에 맞서 끝까지 싸웠으나 유선의 항복문을 받아 위에 항복하고, 등애의 촉 정벌로 불안감을 느끼던 장수 종회에게 접근해 반란의 계획을 짠다.
264년 1월, 종회를 부추겨 등애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종회 밑의 위나라 장수들이 종회와 강유를 살해하였다.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천수에 머물던 강유는 제갈량의 계략을 간파하여 제갈량을 패퇴시키는 공적을 세웠다고 묘사한다. 제갈량의 패퇴 이후 제갈량은 강유가 효자임을 파악해 계략을 베풀어 강유를 사로잡고 강유의 모친을 통해 강유를 항복하게끔 한다.
234년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한 제갈량이 강유의 하늘에 제단을 열고 기도를 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7일 동안 촛불을 키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하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위연(魏延)이 이를 깨트렸다고 하였으며, 그 후 제갈량은 죽기 전 강유를 불러 그의 병법을 담은 책을 전수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강유가 문무를 갖추었고 공명을 세우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병사들을 경시하였고 병력을 함부로 사용했다고 평한다. 또한 분명하게 결단을 내렸지만 조밀치 않아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노자를 인용하며 '대국을 다스리는 자는 작은 물고기를 삶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하물며 작은 나라에 대해서야 여러 차례 소란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강유를 비판하고 있다.
민담과 삼국지 야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유적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1. 강유가 검각으로 와서 진영을 정비하고 요새를 지키고자, 종회의 10만 대군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선이 그에게 장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종회에게 항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강유는 이 말을 듣고 원망스럽고 화가 나서 분통을 참다못해 칼을 뽑아 돌을 베었다. 그때 그가 자른 돌은 지금도 검각 협곡 안에 있으며, 사람들은 이 돌을 「감도석」이라 부른다.
2. 촉나라의 항복 소식을 들은 강유는 성지를 거역할 수 없어 양면으로 된 군기를 거꾸로 걸리는 명령을 내려 투항할 뜻을 표했다. 그 양면으로 된 기는 주가채의 바위 절벽에 남아있는데, 지금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으며, 이를 「쌍기암」이라 부른다.
3. 그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병기를 소검산의 한 동굴에 숨긴 다음, 차후에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왕실을 부흥할 때 다시 사용하고자 했다. 백성들은 그 동굴을 「강유 도창고」라고 부른다.
4. 강유는 마지막으로 검문관을 떠날 때 마고자를 벗어 빨아 산의 바위 위에 널어 말리며 반드시 돌아올테니 그때 다시 입을 거라고 했지만, 결국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옷은 돌로 변하였고, 지금도 검문관 20리 밖에서는 바위 위에 널려 있는 마고자의 모양을 볼 수가 있다. 이를 가리켜 「양의암」이라고 한다.
검각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으로 진입하기 위한 입구와 같은 곳이다. 촉을 지키는 요새이며 견고한 관이다. 촉의 익주자동군 험각현을 뜻함. 이곳에 있는 검문관은 북방에서 촉에 들어올 때의 요새이다. 산맥이 100km 나 이어져 있으며, 한군데만 절벽으로 되어 있어 그곳으로만의 통행만이 가능하다. 마치 문같은 형태로, 지키기에는 절호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칠곡산대묘와 취운랑을 지나 20여 분가량 더 달리니 연무초등학교(演武小學)가 눈에 들어오고, 잠시 후에는 오른쪽으로 '마등경제개발구(馬燈經濟開發區)'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중간에 도로공사로 20여 분간 지체하였다가 다시 1시간 조금 넘게 달리자 국도 108호선 첨산자(尖山子) 나들목에 이르렀다. 이곳을 지나 1시간 반쯤 달리니 비로소 취운랑이 끝나면서 왼편으로 멀리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이 보이고 그 사이로 검각(劍閣)이 아스라이 보였다.

이미 낮 12시가 훨씬 넘었으므로 일행은 검문관 가까운 곳에 있는 황충두부연(黃忠豆腐宴)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두부로만 만든 요리가 상에 가득 나왔는데 각기 독특한 맛이 있었다. 대검산과 소검산은 산맥을 이루어 동서로 100여㎞에 걸쳐 뻗어 있다고 한다. 72개의 봉우리가 예리한 칼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두 산이 마주선 모양이 마치 문과 같아 검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나라 때 시인인 이백(李白)이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에서 "한 사람이 관을 지켜도 만 명이 관문을 열지 못하네. (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노래했던 천험(天險)의 요새였던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이곳을 드나들던 때만 해도 단순한 촉한의 관문에 지나지 않았으나, 촉한 말기 위(魏)나라의 종회(種會)가 10만 정병을 이끌고 들이닥쳤을 때에는 최후의 저지선이 되고 말았다.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육군 장관이었던 A. 마지노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설치했던 마지노선이 독일군에게 벨기에 일각이 돌파됨으로써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듯이, 검문관의 전투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부터 허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서기 263년, 촉한의 대장군 강유(姜維)가 검문관에서 종회의 10만 대군에 맞서 농성하고 있을 무렵, 위의 정서장군 등애(鄧艾)는 소리 소문 없이 음평관(陰平關)으로 접근했다.
그곳에서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무려 7백 리나 행군하며 길이 없는 산에서는 굴을 뚫고, 계곡이 가로막힌 곳에는 다리를 놓았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없는 곳에서는 양털 포대로 몸을 감싸고 구르면서 강유(江由)에 이르렀고, 강유에 이어 면죽(綿竹)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성도에 입성하여 후주의 항복을 받아내고 말았다.-
촉한의 마지노선 검문관(劍門關) (중국문화답사기 3 : 파촉지역의 천부지국을 찾아서, 다락원)
2014년 9월 3일 오후 11시 35분 EBS <세계견문록 아틀라스>를 보니 제갈량이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나는 날 아침, 유비의 아들이자 촉(蜀)의 제2대 황제 유선 앞에 출사표를 던진다. 그리고 촉도로 발을 내딛는데 병사를 하고 강유가 대신 북벌을 잇게 되었다. 나중에 강유는 검각을 지키지만 등애가 샛길로 우회하여 결국 촉나라는 힘도 써보지도 못하고 멸망당하게 된다. http://upaper.net/homeosta 현토 삼국연의 참고
강유는 검각이란 요충지를 지켰는데 한 사람이 만명 군사를 당해낼 정도로 매우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런 땅을 인후지지라고 하는데 우리 목에 있는 음식과 공기가 지나는 인두와 후두처럼 중요하다는 뜻이다.
특히 목에는 경동맥도 존재하지만 갑상선이란 체온유지와 심장박동등 인체 대사에 중요한 갑상선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갑상선 암수술을 인구대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목에 흉터가 생길수 있는데 로봇수술로는 겨드랑이 부근에 흉터가 남기도 한다. 이런 갑상선 암 수술흉터를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수술후 흉터침으로 진피를 뜯어내고 다시 재건축시키는 방법으로 피부를 재생을 도와주며 피부에 영양을 공급하고 침으로 오랜 자극을 줘서 흉터를 원래 피부 모습에 가깝게 변화시킨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