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0일 월요일

남이흥장군의 자폭과 화상흉터치료

남이흥장군의 자폭과 화상흉터치료


남이흥장군(1576년~1627년)은 선조 35년 1602년 27세로 알성무과 급제하여 현,부,목을 거쳐 중군대장으로 있을 때 작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괄의 난을 평정했다. 그 후 인조 5년 1627년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있을 때 혼신의 노력으로 적과 싸우다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적을 성안으로 유인 화약고에 불을 점화하여 많은 적과 자폭하여 최후를 마친 충신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올랐다. 또한 그의 아버지인 남유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순신을 도와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하였는데 사후에 선무원종공신1등(宣武原從功臣一等)으로 좌의정에 추증 되었다.
남이흥장군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부면(中部面) 탄리(炭里)에 있었는데 1971년 성남단지 조성에 따라 이곳 충장사(忠壯祠) 옆으로 이장하였다. 이때 부친의 묘와 부인의 묘도 함께 이장하여 하나의 가족 묘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묘역은 2단으로 윗단에는 남유의 묘(양위 합장)와 충장공의 묘(양위 합장)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바라보고 섰을 때 왼쪽에 남유장군의 묘를 모셨다.
충남 당진에서 시행되는 남이흥장군문화제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정묘호란에 장렬히 몸바친 우리고장 충절의 표상 충장공 남이흥장군의 고귀한 호국정신을 되살리고 공의 뜻을 기리고자 1989년 충장공 남이흥장군 숭모회가 창립되면서 문화제를 열었으며 궁도대회와 백일장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궁도대회가 충남도지사배로 승격되고 1998년부터 문화제가 남이흥장군 문화제로 변경되었다.
남이흥장군유물관에는 남이흥장군이 남긴 사슴의 가죽으로 만들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옷 1벌과 많이 훼손되어 형태를 분별하기 어렵지만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그에게 인조(仁祖)가 친히 입었던 것을 벗어 주었다고 전하는 곤룡포 1벌, 그리고 상아·나무·녹각 등으로 만든 장군 가족들의 호패 7점을 비롯하여 고서(古書), 서한(書翰), 영정, 교지 등 보존되고 있는 500여 점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의 유품들은 17세기 초의 생활상과 복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행사내용
매년 9월 충장사에서는 궁도대회을 비롯하여 남이홍장군 행렬 재현, 민족마상무예.택견.24반무예 시현, 취타대 공연, 풍물패두레한마당, 화관무시범, 학생백일장, 씨름대회등 다채로운 민속 행사 함께 진행된다.
관련 문화재
- 남이흥장군일가유품 :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1호
- 남이흥장군묘 일원 : 도지정 기념물 제52호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안주에서 청군에 대항해 맞섰으나 무기가 떨어지고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성에 화약을 모아 적을 유인해 불을 지르고 김언수, 함응수, 장돈, 양진국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필자는 정묘호란때 속수무책으로 청국군에게 당했다고 생각되었지만 애국충열지사가 있다는 사실을 근래에 알았다. 남이흥장군처럼 불에 의해서 화상을 당하면 자결이 실패하면 화상흉터를 입기 쉽다. 근래에는 가스폭발이나 주유소등에서 여러 가지 폭발물로 화상을 입기 쉬운데 화상흉터에 대해서는 서양의학적으로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자극해서 재생하는 방법으로 원래 피부 모습에 가깝게 회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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