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목판은 불태워지지 않음과 화상흉터치료
이용희는 김정호의 지도를 대원군에게 바쳤다. 이용희는 김정호가 필시 벼슬을 하게 될거라 믿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칭찬은 그가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고 벌을 주었다. 포졸들은 목판을 죄다 깨고 김정호를 꽁공 묶었다. 포도 대장 이경하가 그를 심문했다.
“왜 지도를 만들었느냐? 왜 국가 기밀을 누설했느냔 말이다!”
“제 어릴 적 꿈을 이룬 것뿐입니다. 한 나라에 형세를 나타낸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김정호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감옥에 키를 쓰고 같혀 있을 때 순녀에게 문방사우를 가져 오라고 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문방사우를 가져와서 먹을 갈았다. 김정호는 글을 쓰고 순녀는 먹을 갈았다. 고문은 더욱 모질어 갔지만 그는 이용희를 원망하지 않았다.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이어 팔도민속지를 쓰려고 하였다. 도마다 1권으로 해 8권을 쓰려고 하였다. 그는 한 2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경하가 친절하게 대해주며 불렀다.
“혹시 풀어주려나?”
하지만 김정호의 생각과 달리 그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김정호는 아첨패들이 종사관을 시켜 벌어진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묏자리 하나 봐 줄 수 있겠소?”
“나는 지도는 만들어도 묏자리는 못 봅니다.”
그 후 또 고문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주릿대 형벌이 가해졌다. 갑자기 뚝 소리가 나며 김정호의 외마디 비명이 났다. 그의 인생은 30년의 고생은 헛수고로 끝났다.
위 내용은 일제가 날조한 소설이다.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가르쳐주기 위해 알려준 역사라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또한 유재건이 지은 《이향견문록》에 죄인을 수록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지며 또한 김정호가 몰(沒; 죽다)로 표현하며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서도 김정호가 옥에 갇힌 기록은 없다. 게다가 최근 연구에서 오히려 신헌 등이 비변사와 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했으리라 여겨지고 있어, 오히려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조선 정부에서 묵인하거나 암묵적으로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
1995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목재 수장대 K열의 K로 구분됐던 유물들은 수장고에서 조금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물이란 표식의 ‘K' 중 K-93은 1923년부터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보관해온 목판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 했을 때는 다른 유물들과 함께 부산으로 옮겨졌고, 이후 경주박물관에 보관됐다가, 1970년대 초 다시 서울로 이관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랫동안, 박물관 수장고 안에서 긴 침묵을 지킨 채 잠들어 있어야 했다. K-93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의 문이 학자들에게 열렸던 1995년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역사문화지리학회’에서는 전국 모든 고지도의 목록을 작성 중에 있었다. 열람이 허락된 기간은 딱 3개월. 만나 볼 수 있는 지도 역시 연구원들이 신청한 목록에 한정돼 있었다. 소재구 소장이 소장의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유물이 하나 있어 그들을 붙잡고 지도를 딱 하나만 더 살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열한 장 목판의 크기는 각각 두께 1.5cm, 가로 43, 세로 32센티미터 였다. 기존의 다른 목판들과 비교하자면 크기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어떤 목판은 완성되지 못한 것처럼 비어 있었고 뒷면에 책을 찍어낼 때 쓰는 줄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이상한 목판을 의뢰했던 건 불 타 없어졌다는 대동여지도 진품이 아닌가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소재구 소장이 이 목판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오른쪽 아래에 표기된 ‘고산자’는 너무나 유명한 실학자의 호였다. 그리고 표제에 선명하게 새겨진 제목은 ‘대동여지도’로 소재구 소장 인터뷰에는 5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에 불태워져 있었다고 기록이 돼 있다. 전 국민이 학교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거야 당연히 그렇게 없어졌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목판을 대동여지도의 복제품이라고 착각해 왔다. 예를 들어 한 면은 함경북도 북청지역을 판각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면 다른 귀퉁이에선 평안도 용천이 새겨져 있다. 특히 경상도 성주의 안언역 위치를 수정한 흔적은 K-93이 복제품이란 전제를 뒤흔든 명백한 증거였다. 만일 이 목판들이 완성품을 베낀 작품이라면 지도를 만드는 도중 수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K-93은 다른 목판에 비해 재질이 유난히 얇고 가벼웠다. 판각에 최소한의 비용만 들였단 증거로 가난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실학자 김정호 선생의 생애와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이었다. 1995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K-93이 진품인지를 최종 확인하기 위해 확대 실견 모임을 개최했다. 조사 과정에서 K-93은 대동여지도 인쇄본인 고종원년갑자본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남은 것은 당시까지 유일하게 전해지던 숭실대 소장 대동여지도 목판과의 비교. 검사 결과, K-93은 김정호가 제작한 진품이 확실했다. 지난 수십년 간 박물관에 고이 모셔왔던 국보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 우리나라 과학 인물 상식중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기 위해 백두산을 7번이나 올랐다거나 전국을 3차례나 답사했다는 이 야기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없다. 김정호가 혼자 힘으로 대동 여지도를 만든 것처럼 알려진 것은 더 큰 오해다. 물론 김정호는 훌 륭한 과학자였지만 대동여지도는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세종 시대 이 후 조선의 지도 제작술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김정호는 과거에 서 계승된 지도제작술과 옛 지도를 한층 발전시켜 '대동여지도'라는 걸작을 만든 것이다.
대원군이 '대동여지도'가 국가 비밀을 누설했다며 지도 목판을 불태우고 김정호를 옥에 가둬 죽였다는 것도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 잘 못된 이야기는 1934년 일제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제는 진실을 조작해 '대동여지도'와 같은 훌륭한 업적을 알아보지 못한 우매한 지도층 때문에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을 심으려 했던 것 같다. 김정호가 옥에 갇혔다는 주장도 확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대동여지도'는 널리 보급됐으며 최근 그 판목이 숭실대학교 박물관과 국립박물관에서 발견됐다.
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교과서 '조선어독본'에식민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제는 “조선인들이 훌륭한 인물이 만든 목판마저 불태워 버린 미개한 민족이다!”라며 진품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이다.
김정호 선생은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고가에 좀먹다 남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 작업을 김백원(김정호의 자)에게 위촉하여 완성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의존했던 방법은 기존에 있던 지도와 지리서들을 연구하고 그 장점들을 두루 모아 집대성하는 것이었다. 1931년 정인보 선생이 동아일보에 대동여지도에 관한 글을 썻는데, 이 때 그는 조선 지도학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로 나흥유, 양성지, 윤영, 정상기, 홍대용, 신경준 등의 인물을 거론하며, 대동여지도는 이를 종합 발전시킨 지도라고 평가했다.
대동여지도 목판은 불타지 않고 선입견 때문에 아직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한번 불타면 사라지는데 화상흉터도 원래 피부 모습은 찾아내지 못할뿐이었지 회복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불에 타서 발생한 화상흉터를 기혈순환을 도와주며 진피 콜라겐을 잘라 복원시키며 BT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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