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4일 목요일

이준 열사는 할복이 아니라 병사 배 흉터치료

이준 열사는 할복이 아니라 병사 배 흉터치료


 이준(李儁, 1859121~ 1907822(음력 714))은 구한말의 검사이자 외교관이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 중 사망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고종 양위 사건)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

 

— 《헤트·화데란트, 1907715일자 기사

 

대한매일신보의 1907718일자 의사가 자결이란 호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전 평리원 감사 이준씨가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거니와 어제 보내온 동경전보에 의하면 해씨(이준)忠憤충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 김윤식의 속음청사, 정교의 대한계년사등이 이를 전하지만 자결설 내용은 신문기사나 풍문이다.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가 펴낸 이준과 만국평화회의의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각국 위원들은 이준 선생을 비롯한 세 특사에게 많은 동정을 보내면서도 형식상의 구비 여건이 불충하다는 이유를 들어 퇴장을 명하였다. 이준 특사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결연히 일어나 일재의 간계와 방해공작을 폭로하고 야만적인 침략을 규탄하고 약소민족의 희생을 묵과하는 강국의 처사를 논박했다.”

일성(이준의 호)은 최후의 비장한 말을 마치자 미리 준비하였던 보검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각국 대표들은 희생이란 말에 다소 의심을 하였지만 설마 하고 있었는데 이준이 별안간 칼을 빼어들므로 너무도 의외의 일이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각국 대표들은 놀라 어리둥절했다. 회의장 내 경호원의 손이 미처 가기 전에 일성은 연설대 위에 선 채로 대한 독립만세! 세계 약소국가 만세!’를 크게 외친 후 단숨에 쥐었던 칼로 배를 갈랐다. 솟구치는 신성한 선혈을 만국 사신 앞에 뿌리고는 쓰러졌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좌석에서 일어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이준을 붙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두 특사는 이준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각국 사신, 보도기관, 방청하던 인사들은 조용히 이준 특사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the 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와 가진 인터뷰에도 할복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준 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기는 하였으나 매우 건강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살설이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 문교부장관의 요청에 따른 조사 결과, 국사편찬위원회는 1962"할복 자살이 아닌 쪽"으로 판단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할복(割腹 (かっぷく切腹 (せっぷく腹切(はらきり屠腹 (とふく) 갓푸쿠·셋푸쿠·하라키리·도후쿠)10세기 이후 일본의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들이 사용한 자살 방법이다. 17세기 이후에는 무사의 명예를 존중한 사형제도로서 형식을 갖추게 된다. 할복 때 무사는 미리 정해 놓은 규칙(배의 가운데의 복부를 깊이가르고 다시 L자로 긋는다)에 따라 그들의 복부를 깊게 가르며, 보조자가 뒤에서 무사의 머리를 베어준다. 또한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표시하거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도 행해졌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패배한 세력의 수장 역시 패배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할복을 시행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 덕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등이 유일하게 할복을 모면하고 영지삭감으로 일단락지어졌으며 이를 제외하면 일본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패배한 성주는 무조건 할복했다.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에서 할복의 이유를 '복부에 인간의 영혼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해부학적인 신앙에서 용사의 배를 갈라 무사도를 지키는 자결방법으로 적절히 여겨졌다' 고 기술하였으며, 할복 제도는 1873(메이지6)에 공식적으로 폐지되긴 했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군인과 우익 인사 사이에서 할복 자살은 계속되었다.

필자가 보기에도 할복의 방법은 일본 사무라이들이 하는 방법인데 일제 만행을 폭로하기 위한 이준 열사가 일본인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또 할복은 목을 베어주는 도우미가 있어야 한다. 또 최익현이 단식으로 사망했다는 것도 틀린 사실이다.

요즘에는 배에 칼자국이 남는 일은 드물지만 메스에 의해서 수술후 흉터가 남는 경우가 많다. 수술방법이 개복수술보다 복강경이나 로봇수술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그것들도 작게나마 흉터가 남는다. 대표적으로 이미지한의원에서 치료하는 복부 흉터는 배에 수술 흉터는 맹장염[충수염]과 제왕절개 수술흉터이며 그 밖에도 암등의 수술흉터가 있다. 이런 다양한 흉터를 수술후 흉터침, , 한약 재생약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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