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4일 목요일

일본의 백제구원군과 백색 붉은색 튼살치료

일본의 백제구원군과 백색 붉은색 튼살치료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제명 여제와 중대형 황자는 대규모 백제구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661년 백제구원군 파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제명 여제가 사망하자 중대형은 칭제(稱制:즉위하지 않고 소복을 입고 정사를 보는 것)하면서 구원군 파견을 주선한다. 그는 1차로 662년 왜국에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일본서기에는 豊璋으로 나옴)에게 170여 척의 배를 주어 귀국시켜 백제부흥군의 임금이 되게 한다.

그리고 663년 무려 400여척의 배와 27,000여명의 대군을 보내 백강(白江:금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과 결전한다. 백강을 붉게 물들였던 이 전투는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는데 패전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이렇게 한탄했다.

주류성이 항복했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라는 이름은 오늘로써 끊어졌다.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 있겠는가?”(‘일본서기천지 천황 297)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과 대신들이 당으로 끌려가고 당병의 약탈로 많은 백제인들이 살륙당하는 와중에, 백제의 옛 장수였던 귀실복신·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부흥군 지도자였던 복신은 당시 왜에 체류중이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옹립해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왜에 원병을 요청했다. 일본서기에는 왜병의 파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부여풍을 호위하기 위한 1만여 인의 선발부대. 선박 170여 척. 6615월 출발.

(지휘관: 아즈미노 히라후, 사이노 아치마사, 에치노 다쿠쓰)

2: 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27천 인. 6623월 출발.

(지휘관: 카미츠케누노기미노 와카코, 아베노 히라후)

3: 이오하라기미(廬原君)가 이끄는 1만여 인. 6638월 출발.

기록상 왜의 원병 파병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백제 멸망 직후에 곧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당은 이르는 곳마다 그곳에 토착해 살던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여 그 세력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것이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것이었으며,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는 일은 곧 그 당과 등지는 일로서 왜로서는 쉽게 결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백제 부흥군 지도자였던 귀실복신이 원병 요청과 함께 당시 왜국에 인질(백제 왕실의 상주대사)로 체류하고 있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한 것은 66010월의 일이었지만, 왜 조정에서 부여풍장을 백제로 보낸 것은 6619월의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정치적 결단이 내려진 뒤, 왜는 백제부흥운동에 파격적인 원조를 실시했는데,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였다. 662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을 보내기도 하고, 두 달 뒤인 3월에는 추가로 피륙 300단을 보냈다. 이는 왜국 외에 외부 후원을 받을 길이 없었던 백제 부흥군으로서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왜가 '백제 지원에 나서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당시 고구려가 66112월에 있었던 당의 침략 시도를 좌절시켰다(일본서기)는 소식을 빠르게 접한 부분도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6621월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군대가 평양(平壤) 근교에서 당병 10만을 전멸시키고, 2월에는 군량이 떨어져 평양 근교에 고립되어 있던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 경내까지 들어온 신라의 군량지원을 받아 간신히 퇴각하는 등의 활약을 보인 점을 의식하여, '고구려와 함께 벌이는 전쟁이라면 손해볼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백제부흥군 지원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6638,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부여풍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부여풍에게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다시금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과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을 기회로 신라는 서둘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한반도에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이때 백제·왜의 연합군은 당의 수군에 밀려 물러나 있다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는 몹시 엉터리같은 작전을 택했다고 한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당서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 참가한 당의 수군의 주력은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수적으로 우세였던 왜의 수군이 당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제의 풍장왕은 몇 사람의 측근만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달아나고, 백강에서 대패한 왜병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왜병과 백제 유민들 중 망명을 원하는 이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간신히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부흥 세력은 궤멸된다.

 

백강 전투(白江戰鬪, 일본어: 白村江백촌강의 전투)6638월에 한반도의 백강(현재의 금강 부근)에서 벌어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신라의 연합군 사이의 전투이다. ·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대륙에 당이 등장하여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새롭게 바뀌는 가운데 일어났던 전쟁이며, 왜도 영토가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국방체제·정치제제의 변혁이 일어났으며, 백제부흥군 활동이 종언을 고하게 되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는 '백강 전투',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 일본 측에서는 '백촌강 전투'로 표기한다.

白江은 백마강(충청남도 부여군 북부를 흐르는 강)으로 백마강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釣龍台)라 하고 강의 이름도 사하(泗河)에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바뀌었다고하나, 백제 말기보다 160여년 앞선 무녕왕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 내용을 보면 왜나라에서는 선조인 백제를 위해서 싸웠고 결국 국제전쟁이 된 것이다. 위 내용을 보면 백색 강에 붉은색 피가 흘렀다는 표현으로 참상을 잘 표시했다. 우리 피부에서도 순서는 바뀌었지만 먼저 피하지방이 늘어나면 그 위의 진피 피부는 압력을 못이겨 찢어지게 되며 적색으로 염증상태로 튼살이 발생하며 나중에 허혈성상태가 되는지 창백해져 백색 선의 모양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 붉은색 튼살이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가 잘 되지만, 흰색튼살도 10-30년이 지나도 치료가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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