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왕후 김씨의 서궁 유폐와 성형흉터치료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년 12월 15일/음력 11월 14일 ~ 1632년 8월 13일/음력 6월 28일)는 조선 선조(宣祖)의 계비이다. 흔히 인목대비(仁穆大妃)로 불리나, '인목(仁穆)'은 죽은 뒤에 받은 시호(諡號)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호칭이다. 선조 때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라 불렸다.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이라는 휘호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이다.
인목대비 폐비 사건 또는 인목대비 폐모 사건은 161 8년 조선 조정에서 대비였던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西宮)에 감금, 유폐시킨 사건을 말한다. 1608년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마음이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5세 된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넘긴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이유로 이이첨, 정인홍, 이산해 등의 공격을 받고 몰락하게 된다. 1614년에는 일곱 명의 서자들이 강도가 되어 상인을 약탈하는 칠서의 변이 발생했는데, 이때 이이첨 일파는 사건을 확대시켜 이들이 김제남과 연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를 근거로 김제남은 처형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형당한다. 그 뒤 역적의 딸이며 역적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대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1617년부터 인목대비의 폐비론이 나타나게 된다. 이후 경연과 정청에서 인목대비 폐비론의 가부를 논하게 된다. 이때 이이첨, 허균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폐비 여론을 주도하였다.
1년간의 논의 끝에 인목왕후의 폐비가 결정되었다. 이때 곽재우, 정구, 송갑조, 이여빈, 이항복 등은 전은설을 주장하여 친모자는 아니지만 선조의 후비와 아들들이므로 친모, 친형제의 의와 다름이 없다며 인목대비 폐비 반대와 영창대군을 구명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또한 남인이었으나 친북인계 인사였던 이덕형 등도 폐비론에 반대하였다. 고산 윤선도와 미수 허목 등도 인목왕후 폐비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다가 과거 시험 응시자격을 박탈당한다. 같은 북인대북이었던 기자헌 역시 폐비론에 반대하다가 같은 북인의 공격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에 감금되었고, 인목왕후의 폐비에 저항한 서인 선비 송갑조는 비밀리에 서궁의 담을 넘어와 인목대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정죄당하게 된다.
인목왕후는 서궁에 갇혀서 나가지 못했다. 인목왕후를 다룬 서궁이란 드라마도 있었지만 화정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정명공주가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보지 못하게 막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위리안치 당한 것이다. 위리안치[圍籬安置]란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 중죄인에 해당하는 형벌로서 가시나무 대신으로 쓴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았으므로 이 형을 받은 사람은 대개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내졌다.
성형수술로 부작용을 겪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성형수술로 신경손상, 흉터등을 겪으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불면, 대인기피증, 식욕부진등 우울감에 빠지기 쉽다.
일반적인 성형외과에서 흉터 부작용이 발생하면 자연히 아물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것이 3개월-6개월을 지나도 흉터가 비슷해 보이면 성형흉터를 가진 환자는 애가 타게 된다. 필자 생각에 6개월 –1년이면 어느정도 흉터가 다 아물고 자연재생이 끝날 기간이기 때문에 이 정도 성형흉터 재생 기간이면 이미지한의원의 성형흉터침, 한약 재생약침, 침등을 받길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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