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1일 목요일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화형과 화상흉터치료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화형과 화상흉터치료


얀 후스(Jan Hus, 1372? ~ 141576)는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론을 기반으로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재에는 18세기 이후에 설립된 모라비아 교회 혹은 체코 개신교라는 명칭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영국인 종교 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84)와 달리 후스는 대중 앞에서 설교를 통해 가르침을 설파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라고 촉구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해서 청빈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여 소귀족들과 도시 민중 등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1412년 후스가 가톨릭 교회의 대사 판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교회는 이에 역시 대응하였으며, 바츨라프 4세는 교회 편을 들어서 결국 후스는 프라하에서 떠나 남부 체코의 코지흐라데크에서 소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이 시기에 후스는 농민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계몽하였으며, 교회를 비판함으로써 교회개혁을 주장하였다.
141410월 스위스의 콘스탄츠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츨라프 4세의 동생인 지기스문트(Sigismund Luxcemburg)가 안전을 보장하면서 후스로 하여금 종교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자 후스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 동의하였는데, 그는 콘스탄츠에 오자마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뜻을 버리지 않는 절개를 보여 141576일 화형에 처해졌다. 1년 후 1416530일 같은 곳에서 후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프라하의 예로님(Jerome of Prague)도 처형당했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체코 땅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415년 가을에는 여러 귀족들이 콘스탄츠 종교 회의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후스의 가르침에 따라 체코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으며, 프라하 대학교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성만찬 때에 신약성서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근거하여 빵과 포도주를 모두 나누었으며(그 전에는 성직자들에게만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후스가 살아 있을때 지지자들이 후스의 허락을 받아 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포도주를 담은 성반은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후스주의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고 1419730일 프라하의 노베메스토에서 얀 젤리프스키(Jan Zelivsky)가 주도하는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이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 의회 의원들을 시청 창문 밖으로 던지는 제 1차 창문투척사건이 발생했으며, 며칠 뒤 바츨라프 4세가 죽자 후스주의자들은 보헤미아를 장악하게 된다.
후스는 성직자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에 해당된다면 교황에게 대항하라고 설교했다.
첫째, 만일 교황이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아는 경건한 자들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전통에만 눈을 돌린다면 이것은 교황을 거절해야 하는 표시가 된다.
둘째, 교황과 영적인 고위층들이 경건한 삶을 벗어나서 세상적인 일에 얽매여 산다면 이것이 교황을 거절해야할 표시가 된다.
셋째, 교황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세상의 장사꾼들을 내세우고 자신의 세속적인 삶에만 욕심을 내어 교회를 압박하는 경우
넷째, 만일 교황이 자신의 명령서를 통하여 구원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탈취한다면 이것이 교황을 향하여 대항할 표시이다.
 
교회의 성직자들을 공격하며 신자들에게 성서를 읽으라고 주장한 존 위클리프의 저서에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의 사제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가 개최중인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종교개혁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공사, 페이지 14
 
얀 후스가 존경했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란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가 죽은후 21년이 지난 1415, 독일의 보덴호수 에서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과에 따라 무덤에서 끌려 나와 유죄 판결을 받고 부관참시를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의 시체를 태운 후 남은 재를 세번 강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오히려 강에서 바다로 흘러 퍼지듯이 종교개혁의 정신은 전세계로 가득차게 되었다.
 
후스와 위클리프를 보더라도 그냥 참수형이나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오히려 명예롭게 죽음을 알수 있다. 중국 벌을 봐도 능지처참이란 방식이 있는데 살을 회처럼 포를 떠서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이 있다. 오히려 賜藥사약을 내려서 독약으로 죽게 하는 것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내용이다. 인체 고통중에 가장 아픈 것은 무엇일까? 화상에 의한 화끈거리는 통증 작열통이라고 한다. 그만큼 화형은 어마어마한 큰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화상으로 기인한 화상흉터는 또 심리적인 트라우마나 타격까지 줄수 있어 더 큰 문제이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이런 화상흉터를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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