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괄과 백기 몽염과 항우의 최후와 인과응보
조괄(趙括, ? ~ 기원전 260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장군이며 명장으로 알려진 조사(趙奢)의 아들이다.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는 처음엔 명장 염파(廉頗)의 지휘로 방어전을 펼쳐 진나라는 곤란에 빠졌다. 전국의 타개를 노린 진나라의 재상 범수(范雎)가 계책을 내놓아 “진나라는 조나라의 장수 염파가 아닌 병법에 뛰어난 조괄을 두려워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나라의 효성왕(孝成王)은 이 소문을 믿고 총대장을 염파에서 조괄로 교체시켰다. 조괄의 어머니는 남편이었던 조사로부터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조괄을 장군으로 쓴다면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들었기에 조괄을 장군으로 기용하려는 왕에게 사실을 말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는 그럼 자신이 조괄이 패배하면 연좌제로 자신의 처벌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까지 애원해 간청함에도 불구하여 조괄을 등용하여 결국 조나라는 멸망당했다.
책상위의 병법만을 이해한 조괄은 염파의 전법을 모두 변경하고 진나라군에게 도전했으나, 역전의 용장이었던 백기의 미끼작전에 걸려 군대가 분열당하고 보급로가 끊겨 대패하고,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기아에 빠지게 되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괄은 직접 포위망을 뚫으려고 출진했으나 대량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총대장이 죽자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나, 이들을 먹일 식량이 진나라군에도 없어 조나라 군사는 백기에 의해 모두 산 채로 매장되어 죽었다. 이 때문에 조나라는 병력이 크게 감소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괄은 여러 차례 “병법을 암기만 할 줄 알고, 그 응용을 알지 못한다”라는 예로써 적합한 인물로 나오게 되었다.
필자는 조괄을 보면 스펙만 쌓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현대 젊은이중 키보드 워리어가 생각난다. 실무적인 경험은 부딛쳐 봐야 알게 되지만 결국 경험자를 우대하여 유경험자만 회사에 발탁하고 책상에 앉아서 방안에서 퉁소나 불어야 하는 방안퉁수가 된 쓸쓸한 자화상이 비추어진다.
조괄의 맞수였던 백기[ 白起미상 ~ BC 257 ]는 공손기(公孫起)라고도 하며 전국 시대 말기 진(秦)나라 미현(郿縣) 사람. 용병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백기는 장평(長平)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에 대승을 거둔 다음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여만 명을 하룻밤 사이에 구덩이에 묻어 죽여 천하를 경악시켰다. 상국(相國) 범수(范雎)도 그를 꺼리게 되었다. 50년 진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했다가 실패했는데, 원래 이 전투에 찬성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병사로 강등되고, 재상 범수와 틈이 벌어져 자결하고 말았다. 무안군이 함양 서문(西門)에서 10리쯤 떨어진 두우(杜郵)에 이르렀을 때, 진 소왕(秦昭王)은 응후를 비롯한 군신들과 백기에 관해서 상의하면서 “백기가 떠날 때 불만에 가득 찬 원망하는 기색으로 말을 했다.”라고 말하고, 사자에게 검을 내리어 무안군에게 자결하게 했다. 무안군이 검으로 자결할 즈음 “내가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武安君引劍將自剄, 曰:「我何罪於天而至此哉?」”라고 탄식하고, 한참만에 말하길“나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장평의 전투에서 조나라 군사 수십만이 항복했지만 내가 속임수를 써서 구덩이에 묻어버렸으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누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良久, 曰:「我固當死. 長平之戰, 趙卒降者數十萬人, 我詐而盡阬之, 是足以死.」 라고 하고서 드디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안군이 죽었을 때에는 진 소왕 50년 11월이었다. 비록 그가 죽었으나 그의 죄가 아니어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고, 고을에서는 모두 그를 제사 지냈다.
조괄은 너무 무능하며 지피지기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몰랐기 때문에 죽게되고 백기는 너무 능력이 뛰어났지만 잔인하였기 때문에 죽었으니 나중에 뉘우쳤지만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항우(項羽,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02년)도 죽기 전에 측근의 전략이나 힘보다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기를, “내가 군사를 일으킨지 8년동안 70여차례 싸우면서 단 한번도 패배한적이 없다. 모든 싸움에 이겨서 천하를 얻었으나 여기서 곤경에 빠졌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버려서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은 아니다. 오늘 여기서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기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것이다.” 그런데 항우는 장감등과 싸울 때 진나라의 투항병 20만 명이 불손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자 전원 계곡에 밀어뜨려 생매장한 죄업이 있다. 필자는 가끔 구제역으로 돼지를 파뭍어 죽이는 장면을 보면 항우와 백기가 항복한 군인을 생매장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구제역에 걸린 돼지를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구제역지역 인근 죄없는 돼지까지 죽이는 것은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방법으로 대량으로 키우고 비위생적인 환경에 집단으로 공장식 사육을 하면서 항생제등을 써서 내성이 떨어지게 하여 전염병이 생기게 한 죄는 분명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진시황 때에 태자인 부소를 섬기며 장성을 쌓은 몽염(蒙恬, ? ~ 기원전 210년)이란 장군이 있는데 기원 전 210년, 시황제가 죽고나서 호해, 조고, 이사의 세 명은 공모해 호해를 황제에 세워 스스로의 권력을 지키려고 하였다. 조고 등은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해, 부소와 몽염에 대해서 자살을 명했다. 몽염은 이것을 수상히 여겨, 진정한 조서일까를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소는 저항하지 않고 자살했다. 몽염은 더욱더 저항했지만 즉위 한 호해로부터의 자살 명령이 와 어쩔수 없이 자살했다. 몽념은 자살할 때에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라고 스스로에 물어 보았다.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장시간 장성을 쌓고 지맥을 끊었으니까.”라고 하고 음독을 했다.
몽염의 말은 전형적인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말한 것이다. 산의 흐름을 용이라고 하는데 그 용의 몸통을 끊으면 天人相應천인상응에 의해서 우리가 재앙을 받는다고 한다. 산에 토목건설을 해서 주민들이 갑자기 암등 질병이 늘었거나 사건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기 몽염열전에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몽염은 진나라를 위하여 산악을 깎아내리고 계곡을 메워 장성의 요새를 쌓고 직통로를 통하게 해 좋았었다. 한 마디로 인민의 노고를 무시하고 혹사시킨 대작업이었다. 생각해 보면, 진나라가 제후들을 멸망시킨 당초라 천하 민심은 안정되지 못했고 부상자 역시 치유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몽염은 명장으로서 그런 일을 당하여 강력히 황제께 간언하여 말리지 못하였고, 인민의 궁핍을 구제하며 노인을 부양하고 고아를 보육하며 민중에게 평화를 주려는 노력 역시 하지 않았다. 오로지 시황제의 야심에만 추종하여 거창하고 고된 공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그들 형제가 사형을 받게 된 이유다. 무슨 지맥을 끊은 게 어찌 죄란 말인가?” 참고로 명나라때 완성된 만리장성은 사기등 원문에 나오지 않고 기원전 214년 경에 완성된 동쪽으로는 요동(현재의 랴오닝 성)에 이르렀고 서쪽은 임조(臨洮, 현재의 간쑤 성 민 현)까지인 긴 성이란 의미인 長城장성만 있고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만들지 않은 허구의 산물이다.
필자가 보기에 蓋棺而定[개관이정]이란 말이 생각나는데 관뚜껑 덮고서야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판정된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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