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3일 수요일

그레타 가르보의 은둔 생활과 성형흉터치료

그레타 가르보의 은둔 생활과 성형흉터치료


그레타 가르보(스웨덴어: Greta Garbo, 1905년 9월 18일 ~ 1990년 4월 15일)는 스웨덴 출신의 여배우이며, 영화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들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비극과 인생이 끝난 이해할 수 없는 여성의 묘사로 알려졌다. 또한 무성과 음성 영화들의 동등한 성공을 거둔 몇 스타들 중의 하나였다.
그레타 로비사 구스타프손(스웨덴어: Greta Lovisa Gustafsson)이란 본명으로 스톡홀름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스웨덴 영화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에 데뷔하였다가,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살과 악마> (1926), <사랑> (1927), <사건의 여성> (1928) 같은 무성 영화들에 출연하였다.
그녀의 최고 음성 영화들은 <로맨스> (1930), <애나 크리스티>와 <마타 하리> (1931), <그랜드 호텔> (1932), <크리스티나 여왕> (1933), <애나 카레니나> (1935)와 <카밀> (1937) 등이 있다. 그녀의 첫 코미디 영화는 <니노치카> (1939)였다. 가르보는 자신의 사생활에 격렬한 욕망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명예의 극치에 설명도 없이 배우 생활을 은퇴하였으며, 조용한 은퇴 생활을 보냈다. 1941년 "마나님은 얼굴이 둘"이라는 영화를 최후로 은퇴 후, 전 세계에서 빗발같이 쏟아지는 출연교섭을 완강히 거절하여 유유자적하였다. 한때는 헐리우드로 그녀를 끌어들인 모리스 스테라 감독, 미남 배우 죤 길바트, 명지휘자 스토코프스키 등과도 로맨스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도 하였으나 끝내 독신주의의 신비로운 베일 속에 파묻혀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스테라 감독이나 길바트를 자살시킨 원인도 이러한 가르보의 냉엄한 매력이었다는 소문도 많다. 가르보는 그가 헐리우드에서 번 막대한 수입은 셋트와 함께 모국 스웨덴에 보내어 유리한 투자를 하며 살았다. 53세였던 1960년에도 아직 스크린에서 활약할만한 육체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90년 4월 15일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그레타 가르보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은 그레타 가르보, 이후는 마릴린 먼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1942년 36살의 나이에 돌연 은퇴 선언을 한 후 85세로 사망할 때까지 50년동안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은퇴 이유는 동성연인이었던 미미 폴락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레타 가르보의 동성 연인이자 같이 왕립학교에서 배웠던 스웨덴의 여배우 미미폴락은 결혼은 물론이고 자식까지 두고 있었기 때문인데 태어난 딸에 대모가 되며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그레타 가르보는 자신과의 동성애 관계의 편지가 들킴으로 인해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매스컴의 관심을 받는 미미 폴락을 지켜주고 싶었고, 결국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은퇴였다. 자신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다면 미미 폴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미미 폴락은 그레타 가르보가 은퇴한 이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이로 인해 고통스런 시간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06년 미미 폴락의 아들은 1990년 그레타 가르보가 미국에서 사망할때까지 자신의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를 공개하며 두 사람이 동성 연인 사이였다고 주장했다.
여배우의 갑작스러운 잠적에 매스컴에서는 그레타 가르보의 은퇴 이유로 성형 부작용, 2차 세계대전중에 나치와 연합군의 이중 스파이설 등 다양한 의혹들을 제기했다.
여기서도 나타나다 시피 성형부작용은 그 당시에도 배우가 잠적과 은퇴를 할만큼 큰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의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성형흉터는 첨단의학으로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한의원에서 성형수술 치료를 위한 흉터침인 OT침과 한약 재생약침, 침등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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