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일 수요일

박수량의 백비와 무자비 백색튼살치료

박수량의 백비와 무자비 백색튼살치료



박수량(朴守良, 1491년 ~ 1554년)은 장성(長城) 출생으로 1513(중종 8) 진사가 되고 1514(중종 9)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지평(持平헌납(獻納장령(掌令사간(司諫)을 역임했다.
1534-5년 함경도 경차관(咸鏡道敬差官)이 되어 안원보 권관(安原堡權官) 전주남(全周男)이 야인(野人)들에게 결박당하여 소와 말을 주고 풀려난 사실을 감추고, 또 절도사도 보고하지 않은 죄상등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이후 1536년 노모의 봉양을 청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받았으나, 삼공(三公)'대간이나 시종이 될 만한 이에게 적절치 않다'고 부당성을 간하자, 모친을 모셔오도록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통정대부로 승진해 병조참지로 임명되었고 또 의항(蟻項) 공사의 찰리사를 맡아 수행하였다. 또 동부승지로 특진되고, 이듬해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맡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의주까지 동행하여 사신을 전송했다. 그 후 호조, 예조, 공조참판(參判), 한성판윤(判尹)을 지냈다.
1546(명종 1)에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지중추부사·형조판서(判書우참찬(右參贊 : 1550)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도총관(都摠管) 등을 겸직, 이듬 해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이 해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해 사임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에 전직되어 고향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1552)다시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로 있다가 죽었다. 사후 왕명에 의해 찬성(贊成:1)으로 증직되었다.
주세붕과 깊이 교유하여 유림(儒林)간에 학자로 존경을 받았으며 신중·치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관리 생활 30여 년 동안 남의 집을 빌어서 살았다. 40여년의 관리생활에서도 집 한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544년 사망시 명종이 형편이 어려워 운구할 형편이 되지않는다는 말을 듣고 관인들로 호송케하고 장사비용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명종이 청백의 상징으로 백비(白碑)를 하사하였다고 하며 현재까지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묘소에 아무 글씨도 없는 한국에서 유일한 백비(白碑)가 서있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그는 38년 동안 벼슬했으나 서울에서 변변한 집 한 칸 갖지 못했을 만큼 청렴했다. 암행어사 탐문에서도 시골집에서 끼니 때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정도다.
그는 64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묘를 크게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예언했다. 명종은 그의 죽음을 슬퍼해 서해 바다에서 빗돌을 골라 하사했다. 자손들은 청백했던 삶을 비문으로 쓰면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알려 누를 끼칠수 있다.”면서 글자 한 자 새기지 않고 비석만 세웠는데, 이것이 백비다. 임금의 하사품인 비석을 세우면서 유언을 지킨 것이다.
선비의 보물상자, 김상홍, 조율, 페이지 40-41
 
앞 면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위를 새기고, 뒷면에는 그 사람의 공덕을 새기는 데, 그 공덕을 새기는 곳에 글자를 새기지 않고 공백을 두는 것을 무자비無字碑라고 한다. 한무제, 명 신종 주익균의 무자비가 유명하다. 건릉 양쪽에 고종과 무측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데 고종의 비는 서쪽에 문치와 무공을 자랑하는 공덕 비인 술성기비術聖記碑가 있고, 무측천은 무자비로서 동쪽에 위치하여 있다. 이것은 너무 공로가 크니 글자를 쓸수 없다고 해서 쓰지 않는 것으로 거만한 자랑과 상관이 있다.
위대한 황제라도 박수량의 백비보다 못하다. 아무튼 사람 피부에도 예전에는 백랍증 백반증이라고 불리는 희게 되는 질병이 존재한다. 또한 처음에는 붉은색으로 시작했다가 백색으로 변화하는 튼살이 존재하는데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이 하나의 솔루션이 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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