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쩐의 전쟁 반복창과 폭식과 거식 튼살치료

쩐의 전쟁 반복창과 폭식과 거식 튼살치료


2015KBS 2TV 여유만만115일 아침 10시 방송은 평민들의 쩐의 전쟁을 주제로 100여 년 전에 분 투기 광풍에 대해 이야기를 전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21세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된 반복창이다. 그는 단 한 번의 거래로 18만 원, 현 시가로 18억 원을 버는가 하면 단 1년 만에 재산을 1000배로 불렸다고 전한다.
그가 돈을 번 곳은 바로 미두(米豆)시장이었다. 아버지는 군수를 하다가 한일합방으로 실직하고 12세 어린 나이에 밑바닥부터 밟아서 벼락부자가 된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가 공개된다. 반복창은 미모, 집안, 학력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1등 신붓감 김후동과 초호화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오는 하객용 열차 2등석과 자동차는 기본, 유명 호텔까지 마련했던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두 번째 주인공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조선 최초 부동산 재벌이 된 김기덕이다. 그는 땅 투기로 무려 600배의 이득을 냈다. 그가 투기에 성공한 땅은 허허벌판 황무지로,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이유를 파헤친다. 1달만에 튤립 한 송이 가격이 2600% 치솟았던 네덜란드 튤립 투기 광풍과 최고가 16억 원이었던 사자개가 단돈 5000원짜리로 전락한 이유 등도 소개된다.
이날 조영구는 21세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됐다가 24세에 빈털터리가 된 반복창에 대해 얘기하던 중 제 주변에 주식해서 돈을 날린 사람이 있다. (주변사람들이) 주식을 해서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돈을 멀었는데 지금은 다 (돈이) 없다. 말로가 안 좋다고 덧붙였다. 윤초롱 강사가 그럼 주식을 하지 말아야 하냐?”고 질문하자, 조영구는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제가 (주식에 대해) 뭘 안다고라며 푸념했다.
 
반복창(潘福昌, 1900~ 1940)은 대한민국의 일제 강점기 시절 미두 시장에서 활동했던 투자자이다. 반복창은 12세 나이로 미두시장에서 명성을 날리던 일본인 아라키의 집에 들어왔다. 아라키는 1886년 인천의 미두 시장이 열리자 미두 중매점을 차려 거래를 대행하거나, 직접 사고팔아 부를 축적했다. 아카리의 하인으로 일하던 반복창은 2년 후 아라키의 중매점 요비코가 되었다. 요비코란 중매점에 모인 미두꾼들에게 인천과 일본 오사카의 미두 시세를 전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미두 시세는 날씨, 거래량, 농사의 풍흉 등에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의 최대 쌀 소비지는 일본이었기 때문에 오사카 도지마 시장의 시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인천 미두시장이었다. 당시 인천과 오사카 사이에는 전화 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전보를 통해 시세를 전달했다. 이 시세를 미두꾼들에게 전달했던 역할을 하던것이 요비코였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미두꾼들에게 시세를 외치고 다니던 소년 반복창은 언젠가 자신도 미두로 큰 돈을 벌겠다는 포부를 갖게 된다.
191 819살의 반복창은 중매점의 시장대리인으로 발탁되어 신분이 상승하게 된다. 반복창이 시장 대리인으로 데뷔한지 4년 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일본은 종전으로 전후 복구 사업으로 대호황을 맞게 된다. 이로인해 소득이 늘어나 쌀의 소비가 늘었고, 가을 흉년으로 쌀값이 폭등하게 되자, 미두시장의 시세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투기꾼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인천 미두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쌀값의 변동폭이 중요한 선물 시장인 미두시장은 미두의 최소 거래량이 100석이었는데 하루 시세가 10원씩만 오르내려도 오늘날 시세로 하루에 1억씩의 이익 또는 손해가 났을 정도로 가격 변동폭이 컸던 것이다.이렇게 미두 시세의 변동폭이 커지자, 전국에서 미두꾼들이 몰려들었고 미두시장은 호황을 맞게 된다. 아라키는 쌀값이 폭등할것이라 예상하여 투기적으로 매수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쌀값은 오르지 않았고 아라키는 손해를 보게 된다. 아라키는 한 번에 만회하기 위해 주위에서 돈을 끌어들였고, 미두 취인소에 증거금을 내지 않고 180만원 어치의 쌀을 매수했으나, 예측은 빗나간다. 더이상 빚을 감당할 수 없던 아라키는 인천 미두시장에서 부도를 낸 후 일본으로 도망을 가게된다. 아라키의 신용을 믿고 거래했던 미두시장도 타격을 입어 폐쇄하게 된다. 그에따라 반복창도 실업자가 되어 시름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석 달 후 조선총독부는 자본금을 100만원으로 늘려 미두시장을 다시 개장했다.
미두시장 개장 소식에 다시 미두꾼들이 몰려들었고 반복창도 자신의 재산 500원 가량으로 미두시장에 뛰어든다. 반복창은 미두 중매점에서 쌓은 노하우로 인해 승승장구하고 큰 수익을 올리게 된다. 반복창은 단 한 번의 거래로 18만원(현재 시세 약 180억원) 가량의 돈을 벌어들이는가 하면,정확히 쌀 시세를 예측하여 그의 재산은 40만원(현재 시세 약 400억원)으로 늘었다. 반복창이 미두로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그를 '미두신'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미두꾼들이 생겨났다. 반복창이 미두시장에 나타났다는 소식만으로 가격이 오르내릴정도로 그의 영향력과 명성은 막강했다.
당시 21살의 청년 반복창은 미두 시장에 뛰어든지 1년만에 조선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미두계의 패왕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 돈으로 인천 외리 바다가 보이는 경동사거리 동쪽 100미터 가량의 위치에 있는 명당자리에 400평의 집터를 사고 20만원을 들여 조선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서양식 저택을 지을 계획세웠다.
19214, 반복창은 김후동과 조선 호텔에서 초호화 결혼식을 올렸다. 김후동은 여고보를 졸업한 신여성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을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부러울것 없던 반복창은 그러나 1922년부터 예측하던 미두 시세가 자꾸 빗나가 손해를 보게 된다.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투기적으로 거래를 하게 되지만 계속 실패하고 불과 2년만에 전재산을 탕진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사기사건에 휘말리는등 시련을 겪어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서른살의 나이로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에 이르게 된다.
반복창이 전재산을 탕진하게 된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있었다. 조선의 쌀, 콩 등의 수탈과 미가조정을 쉽게 하기 위해 미두시장을 설립한 일본은 조선인들의 돈을 합법적으로 빼앗아 갈 수 있도록 미두시장을 이용했던 것이다. 반복창이 크게 돈을 벌자 제 2의 반복창을 꿈꾸며 미두시장에 돈을 쏟아 부은 수많은 조선인의 돈도 일본이 모두 쓸어간 것이다. 몰락 후에도 반복창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푼돈으로 쌀값의 등락을 알아맞추는 합백에 빠져 살다가 정신마저 이상해져 10년동안 비참한 삶을 살다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반복창의 흥망성쇠가 되었던 미두시장은 반복창이 죽고 난 뒤 20일 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복창의 흥망성쇠가 이렇게 짧은 시기에 있으니 흥진비래[興盡悲來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옴. 흥망과 성쇠가 엇바뀜. 興盡悲來 識盈虛之有數(흥진비래 식영허지유수 ; 흥진비래는 찼다가 기울었다 하는 하늘의 정해진 운수임을 알겠다.)<왕발王勃 등왕각서滕王閣序>]가 거짓이 아니다. 반복창이 돈을 잘 벌고 잘 나갔을 때 돈을 모았어야 하는데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자신감으로 결국 공수래 공수거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이렇게 일정하지 않게 들어오지 않는 인풋[수입]에 대해서 대비한다. 즉 예를 들어 아침밥을 늦게 먹고 점심식사 시간이 불규칙하고 저녁에 많이 먹고 하면서 식사 시산과 양이 왔다갔다 하면 몸에서는 음식이 들어오자마자 저축을 해야겠다는 비상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따라서 일정하지 않는 식사시간을 살찌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여행을 가거나 추석등 명절 때 불규칙하게 먹기 때문에 살이 찐다. 필자는 군대를 가서 살을 빼는 사람을 많이 봤는데 운동량이 많아 기초대사량이 늘어서이기도 하지만 군대가 워낙 먹는 시간이 일정해서일수도 있다. 거식증 환자는 폭식과 음식 거부를 반복하다가 결국 나중에 요요현상으로 아주 살이 찌거나
필자 이미지한의원 힐링탕이라고 불리는 감비탕 치료는 항상 일정한 식사시간과 아침 식사 엄수를 강조한다. 물론 저녁식사, 야식, 간식, 술은 안된다.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는데 프로그램만으로 10kg는 시키는대로 하면 빠진다. 이미지한의원에서 다이어트가 잘된 이후에 두 번째 관문은 팽창선조라고 불리는 튼살인데 이 또한 자가치료는 못하고 이미지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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