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동학 혁명의 불씨와 화상흉터치료 BT침

동학 혁명의 불씨와 화상흉터치료 BT침


미륵불 배꼽에 감춰진 혁명의 불씨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보자. 동학의 원료는 최수운(崔水雲)이 경주(慶州)에서 제조했다. 수운은 경주에서 태어나 잔뼈가 굵은 경상도 사람 아닌가. 그런데 이 동학이 폭발한 지점은 전라도이다. 화약제조는 경상도에서 했다. 그 화약이 경상도에서 폭발하지 않고 전라도에서 대폭발했다. 물건은 경상도에서 만들었지만 마케팅은 전라도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어떤 각도에서 해석해야 할까.
왜 동학이 만들어진 경상도에서 폭발하지 않았을까?’는 품어볼 만한 의문이다. 화약이 쌓여 있더라도 이게 폭발하려면 불씨가 있어야 한다. 성냥이나 부싯돌로 불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인화물질이나 불쏘시개가 있어야 한다. 그 부싯돌 역할을 한 장소가 전북 고창의 선운사 도솔암의 칠송대라는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이다. 약간 황토색이 들어간 바위벽에 음각과 양각을 혼합해 새긴 약 14m 크기의 마애불이다. 최근 들어서 미술사학자들이 절벽 단애(斷崖)에 새겨졌다고 하여 미술사적으로 마애불이라고 하지만 원래 이름은 미륵불이고, 미륵불이 맞다. 마애불은 족보가 없는 이름이다. 아마 천년도 넘게 미륵불이라 불렸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해 새긴 부처님이라고 한다. 선운사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절이니만큼 검단선사가 새겼다는 전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여간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사찰의 절벽 미륵불이 동학의 부싯돌 역할을 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조용헌의 휴휴명당, 조용헌, 불광출판사, 페이지 80
 
일진회(一進會)1904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동학교 이용구 등이 조직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 단체이다.
1904818일 한성부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하였다가 820일에 다시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그 해 9월에 동학의 잔존세력을 조직한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 주도하에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의 배후조종하에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이용구(李容九, 1868년 양력 214(음력 121) ~ 1912년 양력 522)23세 때 동학당에 입교, 2대 교주 최시형에게 배워서 손병희와 함께 고제(高弟)가 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 후 교주 등이 잡혀 처형될 무렵 항일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함께 투옥되었으나 곧 사면되었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에 일진회 회장을 지내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찬성 여론을 이끌었다. 19013월 손병희, 손병흠과 함께 대한제국에서 펼쳐진 동학 탄압으로 말미암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손병희의 명교(命敎)를 받고 귀국하여 포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19049월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주관하였다. 1904년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쳤다.
필자는 좋은 뜻으로 시작한 동학혁명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서 한 종교단체의 음모로 일제 프리메이슨 흑룡회[마크는 일루미나티 같음]를 움직여 일진회를 후원하고 결국은 한일병탄의 비극이 탄생했다고 본다. 1884년 갑신정변 개화파도 일본 프리메이슨이 뒤를 봐주는 척하다가 발을 빼서 청나라에게 탄압되어 개화파를 말살시키고 1894년 보수파인 척양척왜를 내세운 동학혁명도 결국은 일본군 개입으로 완전 소멸시켜 결국 일진회에 다 흡수하여 헤겔의 정반합 이론처럼 두 상반된 애국적인 개화thesis와 수구세력antithesis을 이간질해서 다 없앤 다음에 결국은 합synthesis이란 한일합방[강제 국가 병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일진회도 토사구팽당해 충분한 보상도 못 받고 사라졌고 이용구도 자기가 멍청했음을 죽기 전에 인정했다고 한다.
고종이 정말 자기 동학농민 국민을 향해 총질을 하라는 매국노이지만 동학토벌에 개인한다는 명분으로 청국, 일본국의 청일전쟁을 유발하고 결국에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꿀꺽 삼키게 되었다. 필자는 동학혁명이 우금치 전투에서 불발로 그친 상황이 조선에 가장 아픈 역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일제 그 뒤에 서양오랑캐 종교집단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물론 동학혁명은 진승 오광처럼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조선을 바꾸어보려는 밑바닥층에서 의지와 노력 그 열정등은 폄하하지 말고 길이 공적이 남아야 한다.
 
즉 최초의 농민 자주개혁운동이 될뻔한 동학혁명은 의도와 다르게 중국의 의화단 운동처럼 자주국을 세우려는 농민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결국은 그 반동으로 외세 강점을 더 심하게 만든 것이다. 동학혁명으로 재미를 본 그 서양의 종교 세력은 또 서양세력을 없애야 한다고 선동해서 다시 특정 종교가 포교된 지역을 시작으로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다.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은 청나라 말기 1899112일부터 19019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다. 의화단의 난이라고도 하며 1900, 즉 경자년(庚子年)에 일어난 교난이라는 의미로 경자교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건 본격적인 의화단 운동은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이 왕성했던 산둥 성의 북부 지역에서 18984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19006월에 의화단이 베이징에 있는 외국 공관을 포위 공격하자 서태후는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열강에 선전 포고했다. 이에 러시아, 일본, 독일, 영국,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8개국이 파병해서 베이징을 비롯해 양쯔 강 이북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다. 열강은 중국을 분할하지 않는 대신 보존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청나라 왕조와의 협상을 거쳐 190197일에 강화 조약인 신축 조약(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했다. 그 내용은 청나라가 제국주의 열강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열강의 중국 내 군대 주둔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동학혁명이나 의화단 혁명이나 서양오랑캐의 특정 종교세력은 말로 자극해 상대방을 무력 폭력을 쓰게 만들거어 배상을 요구하거나 자해공갈단처럼 억지로 차에 부딛쳐 다친 척하고 결국은 그 치료비와 배상비로 한 나라를 조금씩 삼키려는 매우 나쁜 의도가 담긴 것이다. 그것도 서양 오랑캐가 직접 지배하지 않고 일본을 내세워 간접 지배하고 임진왜란 동아시아 전쟁처럼 같은 민족인 일본과 한국민을 분열시키고 이간질시키고 한국민을 수탈해 일본이 중국 대륙정복을 발판인 반도를 넘어서 중국대륙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침략하게 하여 결국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중국과 일본을 다 무협지에 나오는 대로 동귀어진[同歸於塵 다 같이 죽음]시키려고 만든 것이다. 지금 조어도에서 중국과 일본의 대립, 일본의 개헌과 군사대국화 일본과 한국의 독도나 교과서 문제 모두 서양오랑캐가 뒤에서 일본을 조종해서 다시 1894년의 한중일 대립 상황으로 만들어 이익을 보려는 속셈인 것이다.
현 대한민국의 수구와 진보, 특이한 종교단체가 만들어 시킨 특정 인종이 만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6.25의 남과 북, 지역대립등도 모두 그 서양오랑캐의 이간질 역사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백범일지에도 나오는 동학의 아기접주 김구선생이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피신했는데 서양에서 온 카톨릭 교도였고 동학군을 토벌했었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안진사]가 숨겨준 것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왜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고 한중일의 미완성된 동양평화론을 주창하면서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셨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튼 동학 혁명의 불꽃은 전봉준이 만석보에 물세금을 거두려고 하자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혁명의 불씨가 처음에는 작았지만 조선전역을 활활 타오르게 했는데 우리 집에 생기는 화재도 아주 작은 조그마한 불씨로 출발한다. 이런 화재로 화상이 유발될수 있는데 화상흉터는 이미지한의원의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진피 콜라겐을 자극해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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