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5일 일요일

문짝을 태워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과 화상흉터치료

문짝을 태워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과 화상흉터치료


차일혁(車一赫, 차갑수(호적상 이름),차용철(족보상 이름), 차철, 192077~ 195889)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다. 그는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항일전을 위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쳤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 소탕을 담당하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조선 공산당 총사령관인 이현상 등을 토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70명의 결사대원으로 2천여 명의 적을 격파하였고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도 사살하였다. 그러나, 차일혁은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고..”라는 글을 전북일보에 기고하였다. 그는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을 화장하여 하동 송림에 뿌리며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이로 인해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아서 부대원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이 3개나 수여되었지만 자신은 받지 못하였다.
19515, 전라북도에 새로 주둔한 국군 8 사단(당시 사단장 최영희 준장)과 군경합동 회의 참석차 차일혁은 도계로 갔다. 회의에는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 신상묵을 비롯한 경찰 지휘관들과 최영희 사단장 및 8사단 참모들이 참석했다. 회의 후 따로 모인 전투경찰대 지휘관들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이 명령은 숲이 우거질 시기인 녹음기에 빨치산들이 근거지가 될만한 사찰 및 암자를 소각하라는 것이었다. 화엄사 소재 지역은 8사단 방득윤 대대장이 관할하고 있었고, 명령도 방득윤 대대장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방득윤 대대장은 명령 수행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차일혁 18대대장은 방득윤 대대장에게 해결책을 제안했다.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어 문짝만 소각하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명령을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했고, 문짝만 뜯어내어 소각해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득윤 대대장도 이에 동의했고, 이로써 화엄사는 전체 사찰이 소각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3]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유명한 사찰 등 문화재들에 대한 폭격도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결국 그는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1954년 충주경찰서 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그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기회를 제공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쳤던 독립운동단체로,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진해경찰서장으로 재직시 좌익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이후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 1958년 금강의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38세의 나이에 타계하였다. 자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으로부터 감사장을 수여받았다. 1998년 화엄사는 화엄사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1990년 그의 아들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출간하였다.
2008년 문화재청에서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화엄사 등의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절하여 명찰들을 보존한 공적이 있는 차일혁 경무관에게 감사장을 추서하였다. 경찰청에서는 20118월 차일혁 총경을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하였다.
2008[문화체육관광부(1018일 청주 예술의전당 '2008년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보관문화훈장을 서훈하였다.
20136·25전쟁 60주년사업위원회와 전쟁기념관 등 관계자와 전쟁사 전공학자들로 구성된 이달의 6·25전쟁영웅 선정위원회의 심도 있는 심의와 검증을 통해 올해 이달의 625전쟁영웅’ 12명에 선정되어 국가보훈처 9월의 달력 인물로 공식 지정되었다.
2013년 차일혁 경무관은 전쟁기념사업회에서 고려시대의 최무선 장군을 비롯한 62명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호국의 인물에 경찰이 포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9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20136·25동란 당시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구한 숭고한 뜻을 기려 화엄사에 차일혁 경무관 공덕비가 제막되었다.
20142월 차일혁기념사업회(대표 차길진)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무명용사의 묘를 참배, 헌화하고 독립운동가 출신 전쟁영웅인 차일혁(1920~1958) 경무관의 기념패를 미국 알링턴국립묘지의 국내 전쟁 박물관에 해당하는 메모리얼홀에 입성해 그 뜻을 기린다.
20149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차일혁 경무관의 추모 현양행사가 4일 전쟁기념관에서 거행됐다. 6·25전쟁에서 경찰은 육군 다음으로 많은 전사자 158(경찰은 행방불명자 등을 포함 17000명 추산)을 기록했는데, 전쟁기념사업회는 경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차일혁 경무관을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2015년 호국영웅 10인 중 경찰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된 차일혁 경무관은 칠보발전소를 탈환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표 공적지로 정읍시가 지정돼 63일 차일혁 경무관의 영원우표(永遠郵票) 발행 기념식이 열렸다.
20151115일 오전 11시에 방영된 서프라이즈를 보면 여명의 눈동자 주인공이 차일혁이란 내용이 등장한다. 차일혁은 1951년 남한 유일의 칠보발전소를 빨치산이 점령하자 75명의 대원으로 2500명을 막아낸 내용이 등장한다.
차일혁-화엄사, 그 천년의 고찰을 전쟁의 포화속에서 건져내다.
절을 태우는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19515월 도계 군경합동 회의실
"이거 어쩌지?"
"무얼 말씀입니까?"
"자네 이야기 듣지 못했나?"
"아 예 그이야기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 아닙니까?"
"그래 맞아 화엄사지. 자네들도 알다시피 지금 얼마나 무장공비들이 사찰을 중심으로 득세하고 있는지를..."
"그렇지요."
"그래서 이렇게 고민할 수 밖에 없다네.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떠 오르지를 않아."
"대장님 제게 한가지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절을 한번 불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다시세우는 데는 천년이 걸려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문짝 하나만 태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대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문짝 하나를 태움으로써 상부에는 명령을 수행했다고 얘기 할 수도 있고요...화엄사는 우리의 귀한 문화재입니다. 지금 불을 태우면 이 다음에 전란이 끝나도 다시 짓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알겠네. 그리하지."
1951년은 전쟁중으로 전방에서는 끊임없이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지만 후방에서도 북한은 무장 공비들을 보내 끊임없이 게릴라전으로 우리의 후방을 괴롭히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사찰을 근거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우리군과 유엔사령부는 사찰을 소각할 수 밖에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일선 군, 경 지휘관들에게 계속해서 사찰을 불태우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리산 화엄사는 당시 지리산 전투경찰대 관할에 있었고 여기 대대장이었던 방득윤에게 화엄사 소개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방득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몇몇 경찰들과 따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하나 사찰을 보호하는데 나서지 않았다. 결국 당시 방득윤대장의 부하였던 차일혁총경이 나섰다.
절을 한번 불태우는 것은 한나절이면 충분하지만 다시 짓는데는 천년이라도 부족하다는 본인의 소신이 있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화엄사는 문짝하나 태우는것으로 지켜질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시체제에서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상부의 명령에 불복종할수 밖에 없었던 차일혁총경은 이후에도 감봉등 계속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천은사, 선운사, 쌍계사, 금산사, 백운사등을 구했다.
항일운동기인 1920년에 태어나 1938~1943년까지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중국팔로군과함께 항일빨치산유격전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차일혁 총경은 해방후 경찰에 투신했는데 당시 경찰로는 보기드문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전쟁이 끝난후인 1954년 충주경찰서장이 된 후에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하여 어려운환경의 청소년등의 학업을 도왔으며 이후 조선의용대 출신이라는 점때문에 좌익으로 의심받아 좌천되고 조사도 받았다.
1958년 가족과 물놀이중 타계했으며, 뒤늦게 정부는 2008년 보관문화훈장을 서훈하고 2011년 경무관으로 승진추서 하였다.
 
차일혁은 용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짝만 태우면 빨치산들이 절에 준동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지혜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단 좌익으로 의심받고 인재가 너무 일찍 사망한 사실이 안타깝다.
화엄사 문짝 하나로 전체 절을 불태움을 대응을 했듯이 어떻게 사람으로 보면 절이 액땜을 했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인간세상의 화재는 한번 일어나면 재산상 육체상 커다란 피해를 야기하니 화마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를 BT침으로 치료하니 한번 화상으로 폭풍이 몰아치지만 피해를 할퀴고 지나간 흉터에 대해서 끝까지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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