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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의 정족산성과 솥발 화상흉터치료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에
위치하고 있는 성이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0호 삼랑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강화 삼랑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로 고려시대에는 가궐, 조선 시대에는 사고와 선원 보각이
있었다. 현종 1년(1600년)에 마니산에 사고(史庫)를 옮겨 세우고 실록(實錄)을 감추어 보관한 일로 유명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이
성을 침략한 프랑스 군을 양헌수 장군의 병사들이 물리쳐 이속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양헌수(梁憲洙,
1816년 ~ 1888년)는 조선 말의 무신으로 본관은 남원, 호는 하거(荷居)이며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자 면암 최익현의
동기이다. 1848년 무과에 급제하여, 1865년 제주 목사를 지내며 고을을 잘 다스렸다. 1866년 강화도에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오는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정족산성에 숨어있다가 프랑스 군대가 오자 일제히 공격해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6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다만 프랑스군 기록에선 병인양요중 프랑스군의 피해는 3명의 전사자와 35명의 부상자로
기록되어있다. 양헌수는 그 뒤 황해도 병마절도사와 어영 대장 등을 지냈으며,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결사 반대했으며, 1884년
공조판서를 지냈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정족산에 전등사가 있기 때문에 전등산이라고도 부르며,
‘해동지도’에도 산성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에서는 정족산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정족산사고 [鼎足山史庫]는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자리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에 의해 파괴되어 기록이 많이
없어졌던 마니산실록을 현종 때 완전히 보수하여, 같은 강화도 안에 있는 정족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그곳으로 이전했다. 인조 이후의 실록은
4부씩 인쇄하여 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와 함께 정족산에 각 1부씩 보관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정족산실록은 태백산실록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도서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국(學務局)으로 옮겨졌다. 1930년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교 도서관으로 보관·전환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국보로 보전·관리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실록의 원본으로는 정족산실록과 태백산실록뿐이다. 정족산사고의 자리에는
주춧돌만 놓여 있는데,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하여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족산(鼎足山 솥발산 748m)은 남쪽의 천성산 및 내원사계곡과 묶어서 산행코스로 잡히기도 하지만 정족산 서쪽
능선 끝에서 정상과 새미등을 거쳐 동쪽 끝인 산티에 이른다. 이 산의 유래를 보면 솥의 발 모양의 산이란 뜻인데 정족을 쉽게 생각하면 중국이란
나라에 예전 삼국지 시대에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의 삼국의 솥의 발처럼 떠받치고 있거나, 한국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세나라가 있는
것과 같다. 삼랑(三郞)은 단군의 아들 삼형제를 일컫는 것으로, 강화도 정족산의 정족산성이 "삼랑성(三郞城)"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것도
세명을 뜻한다. 아무튼 솥은 음식문명을 일으켰지만 단점은 화재를 유발하거나 솥을 만져서 화상흉터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조리과정중에 화재나 끓는 물, 기름등으로 화상흉터를 입는 환자를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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