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實學의 槪念 및 그 變遷
‘實學’은 ‘實事求是’의 약칭으로 중국『前漢書』의 “학문을 닦고 옛 것을 좋아하며, 실제의 일에서 옳은 것을 구한다.”는 말에서 연원한다.
한국에서는 매우 오래 전부터 ‘實學’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신라의 신흥 지주계급은 불교와 비교할 때 유교의 충효․윤리도덕이 봉건 통치질서의 유지를 위한 봉건 등급제도의 합법화에 좀더 ‘실용적인 학문’, 즉 ‘實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라․고구려의 통치계급은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아서, 유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고, 불교를 ‘수신의 근본’으로 삼는 유불병흥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14세기부터 程朱學은 불교와의 투쟁에서 점차로 불교를 물리치기 시작하여 정통 통치思想이 되었으며, 조선왕조가 고려왕조를 대체한 이후 관학으로 선포되었다. 조선의 봉건 통치계급은 程朱學을 ‘實學’으로 여기고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였다. 당시 實學의 함의는 윤리도덕에 국한된 것이었는데,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實學의 내용은 봉건윤리도덕 및 그것의 실행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군사 등 각 방면으로 확대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實學이란 위에서 말해온 바 각자에게 유용했던 ‘實用之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 초 조선에서 형성되어 전개된 진보적 사회사조 및 학문연구방법을 의미한다. 당시 양반출신의 선진적인 지식계층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서양 자연과학思想의 영향 아래 程朱學의 청담공론에서 벗어나서 사물 혹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실제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하려고 하였다. 간단히 말해 ‘實學’은 ‘실사구시’를 학문연구의 방법으로 견지하고, ‘실용지학’을 학문연구의 대상과 내용으로 하며, ‘경세치용’을 학문연구의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2. 實學思想의 발생 배경
(1) 사회적 배경
16세기 말엽(1592~98)에 조선왕조가 겪었던 壬辰․丁西의 왜란은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국내에서 오랜 士禍期를 거쳐 士林이 정치의 주축을 이루었지만, 분열하여 朋黨이 일어나 정치적 혼미를 거듭했고, 이에 따라 사회의 기강도 해이해져 갔다. 또한 민중의 생활도 수탈로 인해 궁핍화의 한계에서 이르렀다. 다른 한편 국외적으로도 남쪽에서 일본은 오랜 분열을 수습하여 豊臣秀吉에 의해 무력통일을 성취하였고, 북쪽에서 누루하치가 만주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팽창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주변 국가의 정세가 급격히 변해 가는데도 조선왕조는 이에 대한 적극적 대책을 마련할 아무 준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태 파악조차 철저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 사회는 변화를 막아 정착과 유지에 관심을 갖는 데, 머물러 있었지만, 이 시기의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서양의 근대문명과 접촉이 이루어졌고, 특히 일본과 만주는 정치질서에 통합된 세력이 나타나는 중대한 변화를 이루어 한반도를 압박하였다. 뒤따라 거듭된 戰亂은 국토를 유린하여 농경지를 황폐화시키며, 인구의 격감과 민생의 참혹한 궁핍화로 인하여 義理論을 현실적 문제로부터 더욱 유리시키는 결과로 이끌어 갔다.
현실의 긴박성은 곧 보편적 이념에 앞서 자기의 현실상황에 눈을 돌리게 하고, 정통의 이념과 변화하는 현실 사이의 乖離를 자각하게 하였으며, 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정통이념 밖에서 찾으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2) 학문적 배경
조선 후기 實學派의 형성에는 그 시대사회의 현실적 변화라는 요인과 더불어 그 시대사상의 다양화라는 요인이 작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實學派가 발생한 배경으로 조선 전기에 비교하여 정통의 도학과는 구별되는 陽明學․西學․考證學 등의 새로운 학풍이 17세기를 전후하여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그리고 이들 학풍에 대해 도학파의 기본 입장은 정통주의에 입각하여 거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지만, 實學派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기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나타났다.
첫째로 정통의 도학파에 대한 實學派의 입장과 자세를 검토해 보면, 實學思想의 발생 초기에는 그 뿌리를 도학 속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사회의 모든 유학자가 주자학의 經學的 철학체계에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더욱이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도학파의 정통이념으로서 권위가 강화되고 사회의 통치이념으로서 배타적 압력이 높아져서, 實學派의 인물들은 도학을 부정하면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도학의 정통성을 긍정하는 바탕에서 도학파와는 다른 학문적 관심을 가지거나, 도학을 긍정하면서도 도학파의 태도에 현실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는 데서 實學적 문제의식을 제기 하였다. 實學派는 도학파 속에서 발생하였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도학파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
둘째로 實學派와 양명학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조선시대의 양명학이 南産經 이후 지식인들 사이에 소개되었지만, 양명학파가 형성된 것은 후기의 鄭齊斗 이후이다. 이러한 양명학이 일부의 지식인들에 의해 공감각 적인 이해를 불러 일으켰을 때, 도학의 일방적 지배 아래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가능케 했고, 특히 양명학이 주자학의 규범적 형식성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實學派들에게도 자극을 줄 수 있었다.
셋째로 實學派와 西學의 연관성을 검토해 보자. 도학파가 정통주의적 입장에 사로잡혀 이질적인 思想이나 문화 형태에 대해 극히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데 비하여, 實學派는 새로운 질서와 가능성을 탐색하여 서학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서학에 대한 實學派의 자세는 초기에 제한된 지식의 수용으로부터 점차 서학의 근본 입장에 대한 인식과 수용에로 급속한 진전을 계속하였다.
넷째로 實學派와 考證學과의 관계도 살펴보자. 청나라의 實學이 經學과 史學의 考證的 연구에서 발전하였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청나라 고증학이 조선 후기 實學派에 미친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증학의 객관적 내지 실증적 연구 태도는 實學派에서 經典에 대한 의리논적 내지 성리학적 해석을 벗어나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고증학을 위한 방대한 문헌을 구하기 어려운 데서 오는 현실적 난점과 經學에 대한 관심보다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이 절박한 사회적 여건 때문에, 고증학이 미친 영향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3. 實學 思想의 전개와 實學파의 系譜
1) 17세기
이 시기는 實學파적 성격의 사상이 서로 다른 學問的 관심과 背景에서 개별적으로 發生한다. 壬辰倭亂을 거쳐 丙子胡亂을 치르는 17세기 초기에는 정통적 道學波의 일반적 관심이 禮學과 義理論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일부의 儒學者들은 性理學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의 경제적 내지 사회제도적 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대표적 인물로 韓百謙, 李睟光, 許筠 등이 있다. 17세기 초기의 實學파적 학풍의 發生은 散發的으로 나타나지만, 다음세대에서 더욱 구체화될 문제의식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實學파의 準備期라 할 수 있다.
17세기 후기에 와서 實學파의 성격이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났을 때의 인물로는 유형원과 박세당을 들 수 있다. 박세당에 있어서의 현실적 사회제도에 관한 체계적 관심이나, 주자학으로부터 經學上의 이탈 현상은 實學파의 입장을 좀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이룬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시기를 實學의 萌芽期라 한다.
2) 18세기
17세기에 제기된 實學사상의 發生背景이 되는 제반 사상적 요소들과 새로운 현실적 문제의식들이 정리되어 實學파의 學派的인 확립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 철학의 입장은 아직도 형성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고, 전통의 기존 제도에 대한 비판적 개혁론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實學파의 두 조류는 전반기에 출현한 星湖學派와 후반기에 출현한 北學派로 구분될 수 있다.
3) 19세기
19세기 전반에 정약용과 秋史 金正喜의 활동에서 實學파의 철학적 기반이 확립되고, 19세기 중엽의 崔漢綺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實學파적 철학이 정립되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은 星湖學派에서 나와 西學의 영향을 광범하게 수용하면서, 考證學적 지식까지 받아들여 경학에 대한 새로운 체계적 해석을 시도하였고, 자신의 經學적 입장과의 연관 속에서 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으며, 김정희는 박제가의 영향을 받아 北學派를 계승하면서 淸朝의 考證學을 수용하여 考證學적 實學사상을 전개하였다. 이에 비해 최한기는 기존 전통으로부터의 영향이 極小化되고 西學의 영향도 자연과학을 벗어나서는 거의 용해되어 獨自的인 哲學體系를 구성하는 진전을 이루었다.
19세기 말엽에 開化思想의 출현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제도를 이용하여 自强을 추구하였지만, 마침내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화하면서 實學파의 자기발전도 민족역사의 전통과 함께 단절되고, 學問的 대상으로서만 實學파 내지 實學사상을 문제삼는 것으로 명맥이 이어지게 되었다.
4. 實學思想의 특징
첫째, 實學思想은 ‘實證’․‘實用’을 특징으로 하는 ‘실사구시’의 학문이다. 實學派의 實學思想은 실제를 벗어난 정주학의 청담공론에 반대하고 학문을 사회적 생산과 생활에 응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經世致用’과 ‘利用厚生’을 목적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實學派가 제창한 ‘실증’은 학문연구의 방법이고, ‘실용’은 학문연구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봉건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부국강병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으로서 애국주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實學思想은 민본적 민주사상이다. 이수광은 “백성이 군주의 하늘”이라는 민본사상에 출발하여, 부국강병의 근본이 백성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기타 다른 實學者들도 이러한 민본사상․민주평등사상에 근거하여, 토지제도의 개혁과 신분등급차별의 폐지 등을 주장하고 있다. 實學派의 민본 민주 사상은 유교 중민사상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제기한 평등사상은 객관적으로 상공업 자본의 이익을 미약하게나마 반영함으로써 일정한 진보적 의의를 갖는다.
셋째, 사대주의에 대한 반대와 민족적 자주정신의 강조가 實學思想의 특징이다. 實學思想은 17세기 초 서구의 선진적인 과학문화의 영향을 받아 각성한 양반계층의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이 형성시킨 것이다. 그들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외국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사대주의와 외국을 무조건 본받으려는 모방주의를 극복하고, 독립․자주적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을 연구하고 문학작품을 창작하며 외국의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넷째, 實學派의 實學思想에는 모두 사회개혁사상이 관철되어 있는데, 그 사회개혁의 특징은 옛날 사람들의 도를 빌어 현실개혁을 실행하는 ‘托古改制’의 방법에 있다. 경제개혁의 측면에서 보자면 實學派는 모두 전제개혁을 매우 중시하여 그것을 부국강병의 중심고리로 보았는데, 전제개혁안을 제기할 때 고대 사회의 전제를 미화하고, 이를 통하여 불합리한 전제를 개혁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정치개혁의 측면에서 보자면 實學派는 주로 고대사회의 王道․仁政에 대한 미화와 覇道․暴政에 대한 반대를 통하여 그 정치개혁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實學思想은 기일원론적 특징을 가진다. 實學派의 實學思想은 程朱學의 공소함을 극복하고 실용․실학을 주장하여 이용후생․경세치용에 도달할 목적으로 형성된 것이었으며, 거기에는 정통정주학이 만들어 놓은 각종 폐단을 극복하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비판의식이 관철되어 있었다. 그들은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정주학과 틈이 벌어지고 점점 더 기일원론적, 유물론적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수광은 태고의 혼돈의 물체가 있어서 그것을 ‘太極’이라고 하는데, 하나인 ‘태극’이 ‘음양의 형상’으로 변하고 또 ‘太素(물질적인 요소)’로 변하여 만물을 생성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물질적인 기, 즉 태극으로 보았고, 그것이 세계만물을 창조한다고 생각하였다. 實學者들의 철학사상의 기본 방향이 이렇듯 기일원론임을 분명히 알 수 있으나, 實學者들이 정주학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직 이일원론의 관점이 뒤섞여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종합해 보면, 17세기 초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조선에서 흥성한 實學思想은 그 넓은 내용과 오랜 지속시간, 큰 영향력으로 보아 공전의 것으로 한국철학사상사의 우수한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시대적․계급적 제한으로 말미암아 봉건제도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고 그럴수도 없었으며, 봉건적 思想의식의 테두리를 철저하게 벗어나거나 사회발전의 추세를 분명히 인식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實學思想가들은 봉건적 폐단을 개혁하고 부국강병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봉건적 쇄국정책에 반대하고 개방을 주장하였으며, 외국의 선진적인 과학문화에 대한 학습과 상공업의 발전 및 대외무역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5. 經世致用學派와 利用厚生學派
1) 經世致用學派
조선후기의 實學者 중 토지제도나 행정기구와 같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學派. 이 學派의 주축을 이룬 대표적 학자는 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이익(李瀷) 등이며 이들은 대개가 농촌을 토대로 하여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려고 함으로써 重農主義的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관념적인 性理學이나 형식적인 禮論 따위는 현실적으로 긴요한 학문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졌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민생의 문제가 가장 절박한 것이었으며, 또한 애초부터 사람이 서로 다른 신분으로 태어나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부정하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상의 차이나 빈부․귀천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부분적인 制度上의 改編으로 종래의 전통사회의 고수를 꾀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체제를 全面的으로 改編함으로써 사회를 再建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흔히 이념적인 모델을 周禮와 같은 고대중국의 제도에 두었으나 그것은 그대로 복고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부정의 한 수단이었으며, 구체적으로 제기된 현실적인 문제의 타개가 그들의 목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비판을 통하여 그들 나름의 포부와 이상을 그려서, 종래의 단편적인 시폐론(時弊論)을 넘어 각기 새로운 사회체제를 구상했다. 이들이 한결같이 제도의 전면적인 개편 중에서도 토지제도의 개편을 기본적인 것으로 여긴 것은 그들의 관념이 전통적인 토지 경제에 집착되어 있는 重農主義 思想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倭族의 침구(侵寇)로 인한 田地의 황폐에서부터 시작되어, 戰亂 후에 한층 더 심해진 大土地 점유의 경향과 수취체제의 개편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賦稅의 전세화, 화폐의 惡循環 등의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토지문제를 더욱 긴박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들 사회경제나 정치제도에 광범한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은 기호(畿湖)의 양반학자 또는 전라도 지역의 학자들로 모두가 在野학자였다.
2) 利用厚生學派
조선후기의 實學者 중 商工業이나 기술 도입론에 특히 관심을 가졌던 學派.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서울에 있어서는 정부의 禁壓 하에서도 일반 자유 상인과 도고상인(都賈商人)의 활동이 貢人의 대두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졌다. 도시의 서민은 양반까지를 포함해서 이제 토지경제에만 의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울의 일부 학자 사이에는 상업을 일으키고, 생산도구나 유통수단을 개발하고, 나아가서는 수공업의 발전을 꾀하고, 기술의 개발 내지 도입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업의 진흥과 기술의 도입․개발이었다. 이들은 거의 燕京에 다녀온 北學派들로서 그 대표적인 존재는 박제가(朴齊家)․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 등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다같이 重商論이거나 技術尊重論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 속에서 商工業과 기술을 賤視하는 양반들의 생리적인 職業觀․身分觀에서 벗어나서 근대적인 사상으로 일보 발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6. 實學의 人性論
天(神), 地(自然), 人間의 政治的인 相關關係가 政治思想의 主된 內容이라 할 때에 이러한 天, 地, 人間의 相關關係가 人間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政治思想에서 人性論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을 수밖에 없다. 實學思想에 나타나는 人性論의 전개는 주로 性理學의 人性論을 탈피하여 人性이 變化하는 것이 아니라는 本具的 善遍觀念에서 자유로운 現實的 自存의 個體觀念으로 변화하는 思想的 推移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思想的 推移는 주로 14世紀 後半에 대두된 性理學 자체의 思想的 흐름과 17世紀 이후 서학의 思想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를 實學의 시대구분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實學 第1期의 대표자로는 磻溪 柳馨遠과 芝峯 李睟光을 들 수 있다.
柳馨遠의 實學적 입장은 道學의 거부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유리된 관념을 넘어서 도학과 실제를 일관시키는 것이다. ‘천지의 理는 만물에서 나타나니, 사물이 아니면 이가 나타날 곳이 없고, 성인의 도는 만사에서 행해지니, 일이 없으면 도가 행할 곳이 없다.<磻溪隨錄>’라는 말은 도학파의 그 당시 학풍을 깊이 반성하는 데서 본 것으로, 도학의 實學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李睟光은 기본적으로 朱子學을 존중하는 입장이지만, 性理學의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 심성의 存養에 치중하는 修養論的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실에서 특징을 드러낸다. 심성에 관한 李睟光의 철학적 입장은 心活論을 주장하는 데서 뚜렷이 드러난다. 마음은 개념적으로 분석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 생명체로서 배양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그의 수양론은 心의 배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實學 第1期의 柳馨遠이나 李睟光에서 볼 수 있는 人性論은 性理學의 울을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며, 또, 人, 物의 區分을 명확히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實學思想의 人性論 形成에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實學 第2期의 경우는 星湖 李瀷과 北學派의 思想家로 볼 수 있다.
星湖는 天意와 같은 神秘的인 것을 否定하여 天變地異를 사람의 吉凶禍福과 결부시킴을 반대하였다. 그는 自然科學의 知識을 도입하여 天圓地方說을 반대하여 지구의 上下表面에 사람이 산다는 說을 是認하고 지구의 둘레에 살고있는 이유를 萬物이 지구의 引力에 의하는 원리를 빌어 설명하였다. 그는 또 지구가 달보다 크고 태양은 지구보다 크다는 사실과, 달이 태양빛을 받고 빛을 낸다는 사실, 기온의 변화, 地震, 地殼의 變動, 潮水의 干滿, 雨, 雪, 雷등에 대하여 科學的 이해를 가졌었다. 다시 말해 李瀷은 人性의 特異性은 靈德한 마음의 作用에 있다고 하여 人性에 內在된 理의 絶對性을 거부하고, 性의 可變性을 뚜렷이 지적함으로써 누구나 聖人이 될 수 있는 個人의 平等性을 내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燕巖 朴趾源, 楚亭 朴齊家 등이 속한 北學派는 人間의 「利心」 設定과 「人之理」, 「物之理」의 구분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나타나고, 「義理」의 道德論爭보다는 「富貴」의 現實政策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즉, 實學 第2期에서는 「利」를 위해서는 종한테라도 배워야하며 洋人까지도 초청해야 할 뿐 아니라, 重商의 政策具現이 불가피하다는 「利用厚生」이 人性論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實學 第3期에 나타난 實學思想의 人性論은 茶山 丁若鏞의 경우에 가장 뚜렷한 특징이 있다. 茶山은 反朱子的 人性論이 한결 뚜렷하다. 그것은 「物」에 대한 人間優位論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바, 특히 人道와 物理의 명확한 구별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人道의 遂行方法으로서 「仁」 에서 연유하는 孝, 弟, 慈의 실천을 말하고 있는 것이 朱子思想의 「尊德性而道問學」이라는 修身方法과는 크게 다르다. 茶山은 他人에 대한 사랑이라는 人間 間의 互惠的 實踐을 주장한 테 비해, 朱子는 個人別의 內的 至善追求라는 修身方法을 강조했다.
이렇게 實學 弟3期의 人性論은 性理學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展開過程이 有神論에 바탕을 두기도 하고, 物話論에 바탕을 두기도 하여, 人格性이 강조되는가 하면 自然性이 강조되기도 하는 등 思考의 영역이 매우 넓으며, 思想이 보다 자유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7.실학의 자연철학
원초 유학에서 대두된 자연의 擬人化경향은 성리학에서도 ‘天地之心‘의 天人相感의 사고는 조선의 탈성리학적 실학을 발흥시킨 박세당은 ‘天地之心‘은 ‘理‘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우주 자연과 인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측면은 마음의 측면이 아닌 기의 측면이다. 즉 기 측면에서 天人同質을 전제로 그 기를 매개로 한 인간과 자연의 상호 영향관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기로서의 근본적인 천인동질을 인정하였다고 해서 실학자들의 物我一體觀이 성리학자들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실학자들이 성리학자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를 차별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 시각이 아닌 구체적 시각에서 이들은 物我一體보다는 物我分別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실학에서는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여 상대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정약용은 이러한 경향에서 인간과 만물을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로 자기의식과 자기의지로 판단하고 욕구하며 행동하는 ‘자율적 주제‘이지만 만물은 본능과 필연의 조건에 따라 존재하는 ‘필연적 객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실학에서 자연은 이제 농공 산업을 뒷받침할 ‘도구적 이용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기에 치중하여 자연을 객체시하는 실학의 경향은 자연계를 감각 가능한 경험 사실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사조이다. 그것은 실사구시등 자연에 대한 실증적 사고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몇몇 실학자들은 기를 인정하면서도 음양이나 오행에 대한 종래의 이해를 바꾼다. 그들은 음양은 기의 특성일 뿐 기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지원이나 박제가는 오행을 우주, 자연 형성의 근본요소가 아니라 구체적인 자연물 그대로 이해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에 이르러 실학은 성리학의 주리론적 우주 생성론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성리학의 주기론적 우주 자연론의 형이상학마저 무너뜨린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벗어나 물리적 이해로 접어들게 하는 사고이다.
한편 자연과 자연 법칙을 도덕의 준칙으로 간주하던 종래의 관념도 실학자들에 의하여 부정되기 시작한다. 원초 유학의 관점은, 도덕은 천이 명한 ‘성‘을 따르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사고를 성리학에서는 ‘天則理‘․‘性則理‘라는 명제를 통해 선천적으로 본구한 ‘오성‘의 자연 발로로 ‘오륜‘이 구현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리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까닭에 오서의 본구을 부정한다. 그는 ‘성즉리‘의 명제 자체가 불교의 ‘萬有一體‘사상의 영향에 불과한 것이라 배척한다. 그에 의하면 ‘성은 일종의 嗜好‘로서 소질․경향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이 인성의 필연적 구현이 아니라 인위저인 수립에 의거한다는 이론이다. 실학시대에도 오륜이 단순한 도덕에서 그치지 않고 실상 사회 체제전반을 대표하는 규범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자연성의 부정은 당시의 전근대․봉건적 사회 체제 전반의 붕괴를 예고하는 사상적 단초이다. 실학의 발흥과 그 실학적 자연관이 끼친 영향은 이토록 큰 것이었다.
8. 실학과 동무 이제마의 사상
이제까지 살펴본 실학의 발생 원인과 그 사상의 흐름 그리고 발생시기 학문적 방법을 고찰해보면 실학은 經世的 實用性과 함께 義理的 道德性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즉 학문의 성격은 첫째 실용적 관심, 둘째 비판적 정신, 셋째 실증적 방법, 넷째 개방적 태도, 다섯째 주체적 입장으로 정리된다. 또한 학문방법면에서의 공통점은 첫째 기존의 권위를 거부하는 자유성, 둘째 경험적, 귀납적, 실증적인 과학성, 셋째 공소한 관념을 거부하는 현실성 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東武의 학문은 실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格致藁>에 드러난 經學理論 및 君子小人의 正己知人治民을 다룬 경세학 이론은 마땅히 역사적․철학적 맥락을 가진 실학의 큰 범주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동무의 벼슬이나 저서량이 다른 실학자에 비해 낮거나 적지만 <格致藁>에 담긴 경전해석학 및 독창적인 이론 전개와 <東醫壽世保元>에 담긴 治人治病의 學만으로도 충분히 실학의 한 갈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무는 <격치고>의 첫머리에서 “物宅身也 身宅心也 心宅事也“라 하여 心身과 事物의 妙合을 말하였고, <東醫壽世保元>에서는 ‘醫源論‘등에서는 전통한의학에 대한 개념에 경험을 통해 발달한 학문이라 정의하였으며, 한의학의 바이블이라는<內經>을 비판하여원리는 궁구히 하되 모두 믿을 것은 못된다하여 비판적 연구를 당부하였으며, 또한 기존의 한의학에서 진단 및 치료에 응용되는 五行이론과 脈등에 대한 사상의학적 이론적 뒷받침이 없으며 그또한 맥에 대해 궁구히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실학이 가지고 있는 실용성 경험적 비판적 자유성등이 함축되어 나타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東武의 思想 淵源은 學的으로는 孔孟儒學이지만 시대적으로는 율곡에서 시작한 實事求是學의 연면한 傳統, 특히 그 중에서도 정약용과 한석지, 기정진등의 인물과 學問的․思想的 親綠性을 갖고 있다고 하겠고, 또한 東武는 實學의 여러 주제들을 완전히 自己化함으로써 사상적 체계라는 분석 틀을 創新하였다.
그러면 그의 철학적 성격과 기조는 어떠한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보여주는 主氣論的 관점을 주지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듯하다. 그의 <東醫壽世保元>에서 사상인을 나누고 인체에 대한 사상적 분류를 시도한 것은 본성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네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설명한 것이므로, 신체를 논지로 전개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동무를 主氣論家로 해석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는 理氣論이 나오기 이전에 先秦時代 聖人들이 역설했던 本性全德을 회복하는데 가장 큰 목표를 두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民衆들을 바르게 다스리는 유교적 理想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동무는 性命과 知行, 敎學과 愛敬, 好善과 惡惡 등 兩面的 兼修를 항상 강조하되 中庸 혹은 時中의 도리를 竝擧하였고 종국에는 太極之心으로 귀결토록 하였다.
<格致藁>에서는 理氣가 병용된적은 없고 理도 利(欲)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어서 理氣論的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東醫壽世保元>에서는 心과 四藏(肺脾肝腎)과의 관계에 있어서 理氣에 개념은 心-浩然之理, 四藏-浩然之氣 정도이고 心-太極, 四藏-四象으로도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동무의 철학적 성격은 性을 중심으로 하여 誠에 돌이키도록 하였고 나아가 中庸을 이루어 정기와 지인을 달성하였으며 <格致藁>와 <東醫壽世保元> 전체을 통해 天人을 다시 中央太極之心으로 合一 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동무의 사상은 크게는 실학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철학적 바탕을 보면 또한 다른 면이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점은 <格致藁>의 제목처럼 전통 사상의 재해석 혹은 종합의 글과 <東醫壽世保元>과 같은 실학적 사상이 풍부히 묻어나는 글을 남긴 것을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동무의 사상의학이나 그의 철학적 사고가 고유하고 독창적이다라고 말하는 이유가-물론 그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철학과 의학 등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고유함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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