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의 한국 역사와 문학에 대한 영향
-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를 중심으로
◀ 목 차 ▶
Ⅰ. 연구 방향
Ⅱ. 역사에 대한 영향
1. 史書로서의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2. 體制상의 영향
3. 「史記」에 나타난 한국 고대사회에 관한 史料
Ⅲ. 문학상의 영향
1.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문학적 성격
⑴ 「三國史記」의 문학적 성격
⑵ 「三國遺事」의 문학적 성격
2. ‘傳’에 대한 영향
⑴ ‘傳’의 성립
⑵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傳
3. ‘讚’에 대한 영향
Ⅳ. 참고문헌
Ⅰ. 연구 방향
「史記」는 위대한 역사서이자 문학서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창작 당시까지의 역사를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하여 체계적이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정리하는 동시에, 그 문장도 생동감있고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史記」 탄생 이후 오늘날까지 2천여년간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학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또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도 ‘위대한 역사서이자 문학서’라는 평가에 상당한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本稿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학과 문학에 대한 「史記」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같은 漢字 文化圈에 속하고 지리적으로도 인접해있기 때문에 中國과 우리나라의 交流 歷史는 상당히 뿌리가 깊다. 그리고 「史記」의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交流史 연구에 있어 일익을 담당하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本稿에서는 특별히 우리나라 고대 문화의 위대한 所産 중의 하나인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로 고찰 범위를 한정하여, 이들에 대한 「史記」의 역사적, 그리고 문학적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역사에 대한 영향
1. 史書로서의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三國史記」는 高麗 중엽인 1145년에 편찬된 현전하는 最古의 史書이다. 전통사회에 있어서 역사편찬은 개인의 저술이 아니었고, 따라서 「三國史記」 역시 金富軾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奉命撰이며 공동저작이다. 더구나 역사 서술이 春秋筆法에 따라 述而不作의 作史態度에 따라 기존문헌의 轉載에 불과했으므로 편사관들의 창작물이 아니다. 다만 책임편수관이었던 金富軾이 당시 정치 실권자인 門下 侍中(監修國史)이었고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던 장본인이었으므로 이 책 속에는 당시의 모든 것이 반영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부적으로는 치열한 門閥貴族家門의 갈등과 외부적으로는 女眞의 군사적 압력을 받고있는 위기상황을 목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이 책을 편찬하게 된 동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三國史記」는 편사관들의 저작물이 아니라, 12세기 高麗 왕조의 역사적 산물이며, 당시의 문화수준에서 전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종래에는 ‘儒敎 중심의 事大主義史書’라는 극단적인 비판을 받아왔으나, 그러한 비판에 앞서 이 책이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모습만이 아니라 12세기 현상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再照明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이에 반해 「三國遺事」는 一然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私撰書로써, 「三國史記」가 편찬된 지 136년 후인 1281년에 완성되었다. 一然은 正史를 기록한다는 제약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선택된 史料들을 수집하여 일정한 체제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서술하였다. 여기에는 강한 목적의식이 반영되고 있는데, 「三國史記」가 유교적이고 합리적인 사실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대한 반발로 「三國遺事」에서는 비합리적이고 불교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리적인 서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一然의 주된 관심은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들에 놓여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 一然 자신은 神異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一然이 자신의 저술을 「三國遺事」라고 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三國史記」에 빠진 것을 보충한다는 겸양을 표방한 것이지만, 실은 「三國史記」에 대한 비판 속에서 저술되었음을 말해준다. 「三國遺事」는 전체가 이러한 방침 하에 저술된 것이다. 「三國遺事」는 우리나라 역사의 시발점을 고조선에 두고 단군왕검의 건국신화를 기록함으로써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한 점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2. 體制상의 영향
「史記」는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대 帝王 및 중요한 史蹟을 기록한 本紀가 12편, 역대 제왕과 제후국의 대사를 연대기적으로 조리있게 정리한 表가 10편, 경제 문화 등 전문 역사를 논술한 書가 8편, 제후왕국의 흥망성쇠를 기술한 世家가 30편, 영향력있는 역대의 인물 전기 및 소수의 외국사와 민족사를 기술한 列傳이 70편에 달한다. 그 중에서도 제왕의 일을 編年紀事한 ‘本紀’와 중요한 인물들의 傳記가 중심이 된 ‘列傳’이 핵심을 이루어 이를 ‘紀傳體’라 부른다. 紀傳體란 즉 “人”을 제1의 위치에 두고 “事”를 그 속에 융합한 것이다.
「三國史記」는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列傳 위주의 중국문헌과는 달리 本紀가 28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志가 9권, 列傳이 10권, 表가 3권을 차지하고 있다. 「史記」의 체제를 모방하여 三國 歷代 帝王의 사적은 本紀에, 年代는 表에, 政治制度는 志에, 名臣의 사적은 列傳에 수록하였고, 中國 正史의 체제와 같은 형태인 紀傳體로 쓰여진 것이다. 조선시대 權近(1352~1409)의 「進三國史略箋」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
金富軾이 體制(凡例)는 司馬遷의 「史記」의 法을 취했으나, 大義는 간혹 春秋와 다른 점이 있었고, 한가지 사실이 여기저기(三國의 각 本紀)에 중첩되어 있다.
또한 그의 「三國史略序」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
金富軾이 三國史를 만드는데 司馬遷의 「史記」를 모방하여 나라별로 썼고, 本紀 列傳 志 表도 있어 50권이나 된다.
이상의 기록만으로도 「史記」는 「三國史記」의 체제상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三國遺事」는 王曆 紀異 興法 塔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善의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크게 분류하면, 年表인 王曆과, 역사적인 神異事를 적은 紀異와, 그밖의 불교 관계기사를 실은 나머지 7편으로 3大分할 수 있다. 王曆은 제왕과 제후국의 대사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는 「史記」의 年表와 성격을 같이하고 있으나, 「史記」의 年表가 단순히 제왕의 즉위와 재위연대를 기록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三國遺事」의 王曆은 여기에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도 덧붙여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三國遺事」는 체제상 「史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年表의 성격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고, 소량의 불교관계 史料를 「史記」에서 인용하고 필요에 따라서 이를 訂正하거나 補充을 하고 있으므로, 역시 얼마간의 영향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史記」에 나타난 한국 고대사회에 관한 史料
「史記」에는 기원전 5~4세기경 ‘예맥’이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고, 夫餘와 高句麗가 그 종족에서 파생되었다는 기록이 「三國史記」에 남아있다. 戰國 말기 이후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지역에 대한 記事를 상세히 서술한 기록을 살펴보면, 「史記」 <朝鮮列傳>에는 “연나라의 전성기 때에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에 소속시켰는데, 한 초에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삼아 연에 속하게 하였다····· 점차 진번 조선의 오랑캐들과 연 제지역으로부터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고 도읍을 왕검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써 이 시기의 고조선이 구체적으로 沛水 以東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고조선의 사회 경제 군사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史書인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편찬 시기는 中國의 最古 史書인 「史記」보다 1200여년 늦기 때문에, 三國 이전에 대해서는 中國의 史書를 많이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三國遺事」의 紀異篇에서는 古朝鮮(王檢朝鮮) 衛滿朝鮮 마한 二府 七十二國 樂浪國 渤海 五伽倻 北夫餘 東夫餘 高句麗 변한 百濟 진한 등까지 우리 민족의 거주문화권으로 망라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史記」의 관련 기록을 참고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Ⅲ. 문학상의 영향
1.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문학적 성격
⑴ 「三國史記」의 문학적 성격
金富軾은 高麗 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그의 20권의 문집은 현전하지 않지만, 「東文選」 등에 수록된 작품수로 보아 당대의 일인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시를 제외한 산문은 대부분 실용문이었고, 낭만적이고 정서적인 면보다는 실제 생활과 밀접한 소재를 택하고 있으며, 중국의 인물과 고사 등 典故를 들어 해박한 학식을 드러내고 있고, 또한 문학을 통해 儒家的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三國史記」는 이러한 특성이 잘 반영된 저작이다.
「三國史記」는 사실상 金富軾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왕명을 받아 10명의 보좌관을 포함하여 총 11명의 編史官에 의해 편술된 것이다. 「三國史記」가 편찬되었을 당시 金富軾은 71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과연 그가 직접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論贊과 志의 서론부분’은 그가 직접 쓴 것이 확실하며, 나머지 부분은 보좌관들이 자료를 수집한 뒤 편집한 것을 金富軾이 최후로 修正 加筆하면서 취사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三國史記」 중에서는 論贊이 들어있고 文藝文에 가까운 列傳이 특히 문학적 가치가 높다. 列傳에서는 때로는 記事文의 형식을 빌어 인물에 대해서 묘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자의 상상이 가미된 서사체의 문장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서사체의 문장 표현은 후에 假傳의 표현형식으로 발전되고 고소설에 접맥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장수법으로 인해서 서사문학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물의 傳記 직후에 삽입된 論贊 부분에서는 미사여구를 나열하고 원칙론을 펼치는 등 매우 뛰어난 문장의 표현을 자랑하고 있다.
⑵ 「三國遺事」의 문학적 성격
「三國遺事」는 忠烈王 7년(1281)경에 완성된 불교신앙 관계를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이다. 一然 생존 당시의 문학풍토는 戰亂과 專制權力의 亂脈相 아래 극심한 혼란 속에 이질적 문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詩歌文學의 경우는 상류층에는 景幾體歌 하류층에는 俗謠라고 지칭되는 歌謠文學이 유행하고 있었고, 散文文學에 있어서도 稗官說話文學이 성행하고 있었다. 稗官雜記類는 高麗 서사문학의 중추를 이루는 것으로 그 중 寓意的 諷刺的 諧謔的인 假傳이 유행하였다.
「三國遺事」에 실린 문학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主觀的 記述이라고 할 수 있는 一然의 個人的 창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客觀的 記述이라고 보여지는 一然이 다른 典籍에서 채집했거나 인용한 자료들이다. 「三國遺事」의 문학성을 논하는 데서 마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神異의 기록에 관한 것이다. 「三國遺事」에 실린 神異性이 說話文學과 어떤 함수관계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一然 자신의 창작인 讚이 붙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一然은
그러한즉 삼국의 시조는 모두 神異에서 출발되었는데 어찌 족히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에 신이한 일들을 諸篇에 싣는다.
라고하여 神異性에 대한 자신의 記述 의도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卷三부터 卷五에 이르는 佛敎關係 記事에서도 대부분이 神異的 사실에 대한 인물과 사건의 소설적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이는 「三國遺事」에 실린 神異의 기록은 一然에 의해 채집된 민족 고유의 전승설화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一然은 전승설화를 문자로 정착시키면서 여기에 자신의 사고를 반영하여 기록한 문학자이며, 「三國遺事」는 그러한 기록의 소산인 일종의 문학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傳’에 대한 영향
⑴ ‘傳’의 성립
‘傳’이란 인물의 事迹을 적어서 후세에 전하는 것으로 史書의 列傳이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傳은 엄밀한 의미에서 漢文學 文體의 한 形態인데, 그 기록의 事實性을 중요시해왔기 때문에 史官들의 손으로 씌여진 史傳이 가장 보편적인 傳의 한 형태로 고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史書의 편찬과정에서 列傳의 내용이 보강되면서 史傳이 중요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공식적인 傳의 기술방식이 高麗 후기에 士大夫층의 文人들에게 널리 流布되어 漢文學의 한 양식으로 일반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傳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한 인물의 事蹟을 기록한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인물의 설정 동기와 의도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게 되는데, 인물이 역사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거나 후세에 널리 전할 덕망을 소유한 사람일 경우에는 이러한 사실 자체가 중요시되어 史官의 공식적인 史書에 기록된다. 列傳이라는 史書의 일부를 바로 이러한 예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인물의 事蹟을 그려 나간다는 것은 역사기술을 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그 인물에 대한 주관적 평가작업이라고 본다면 傳은 일종의 문학적인 형태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⑵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傳
中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傳의 형태가 나타나게 된 것은 史書의 출현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傳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三國時代에 각기 自國의 역사를 편찬할 때부터라고 추측된다.
高麗시대에 金富軾의 「三國史記」가 편찬될 무렵에는 이미 傳의 형태가 史傳으로서의 격식을 엄격히 고수하고 있었다. 「三國史記」는 君后의 善惡이나 臣子의 忠邪나 國家의 安危나 人民의 理亂 등을 모두 나타내어 나라의 역사를 이룩하여 이를 후세에 남겨주는 교훈으로 삼겠다는 의도에 의해 편찬되었고, 이러한 의도에서 列傳을 갖추게 되었다. 역사란 帝王의 治績을 연대별로 정리한 기록일 수만은 없고, 각 시대마다 활약했던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까지 알아야 그 폭과 깊이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金富軾의 생각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列傳을 통해 다루어진 인물은 정치는 물론 여러 분야의 인물들이 두루 다루어졌고, 행적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도 사건의 내용을 실감있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列傳은 역사의 기록이면서도 文學의 영역에 그만큼 가까워진 것이고, 한 인물의 일생을 어떤 구체적인 관심에 의해 기술하는 ‘傳’의 서술방식 자체가 어떤 격식을 갖출 수도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三國遺事」는 개인의 私撰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正史를 편찬하는 표준적인 체제인 紀傳體를 취하지 않고 작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三國遺事」의 구성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는데, 그 중 역사적인 神異史를 적은 紀異편은 종교적 신앙을 북돋워주기를 바라고 있는 기록으로 일종의 傳으로 볼 수 있다. 紀異한 기록이란 비합리적인 사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儒敎의 합리적인 사실만을 취한 「三國史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쓰여졌다고도 할 수 있다. 「三國遺事」에서는 高僧傳에 해당하는 분야가 강조되고 있는데, 高僧傳은 내용이 다분히 종교적인 사실에 치중되어 그 紀異함을 내세우고 있는 점을 볼 때, 史書의 列傳이 지니는 공식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살펴본 바와 같이 「史記」의 列傳은 우리나라에서 ‘傳’이라는 한 문학쟝르가 성립되는 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양대 史書의 列傳에만 초점을 맞추어 傳을 살펴보았지만, 高麗 후기에는 史官이 아닌 개인 文人들이 자신의 주관적 관점으로 한 인물을 평가한 傳과 사물을 의인화한 ‘假傳’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하여 그 문학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3. ‘讚’에 대한 영향
‘讚’은 크게 中國 古文體에서의 贊과 불교에서의 讚으로 그 개념을 규정할 수 있다. 먼저 中國 古文體에서의 贊에 대해 살펴보면, 司馬相如가 荊軻를 찬미한 것을 그 시초로하여 司馬遷의 「史記」와 班固의 「漢書」에서 그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史記」의 論贊은 ‘太史公曰’로 시작되는데, 司馬遷은 篇末 혹은 때때로 서두에서 그 편의 주제나 주인공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司馬遷이 論贊의 형식을 사용한 이유는, 우선 「左傳」의 관례에 따라 平言을 간단히 기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論贊의 형식을 이용하여 자신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비평을 자유로이 하고, 비평과 본문의 서술을 분명히 구분함으로써, 역사의 객관성을 침해하지 않는 동시에 원하는 대로 자신의 주관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三國史記」는 中國 正史의 체제와 같은 형태로 쓰여졌다고 앞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論贊이라는 褒貶 위주의 평론을 갖추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三國史記」에서 이런 論贊은 일률적으로 ‘論曰’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되며, 산문의 형식을 취하여 金富軾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列傳에는 8則의 論贊이 散在해 있다. 이러한 評讚을 인물의 전기 직후에 삽입해 놓고 있는데, 이는 모두 金富軾이 직접 쓴 것으로 보여진다.
「三國遺事」의 讚은 記事에 대한 一然 자신의 의견을 운문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총 49수의 讚이 실려 있는데, 48수는 7언 4행시, 1수는 4언 8행시의 漢詩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讚은 문학가로서의 一然의 모습을 단적으로 밝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一然은 讚의 기록을 통해서 神異性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상과 깊은 佛心의 平淡을 표현하고 있다. 「三國遺事」의 讚은 비록 형식면에서는 「史記」의 論贊과 방식을 달리 하지만, 각 篇에 대한 작가의 견해와 사상을 밝히는 목적있는 글이라는 점에서는 「史記」 이래의 論贊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Ⅳ. 참고문헌
1. 버튼 왓슨 著. 박혜숙 譯.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한길사. 1995
2. 高敬植 著. 「高麗時代 漢文學硏究⑴」. 集文堂. 1995
3. 申瀅植 著. 「三國史記 연구」. 一潮閣. 1981
4. 李康來 著. 「三國史記 典據論」. 民族社. 1996
5. 白山資料院 編. 「三國遺事 硏究 論文集」. 1986
6. 韓國史硏究會 編. 「韓國史學史의 硏究」. 乙酉文化社. 1986
7. 李佑成, 姜萬吉 編. 「韓國의 歷史認識 上 · 下」. 創作과 批評社. 1995
8. 강만길 外 著. 「韓國史 卷1 -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1」. 한길사. 1994
9. 강만길 外 著. 「韓國史 卷2 -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2」. 한길사. 1994
10. 강만길 外 著. 「韓國史 卷23 - 한국사의 이론과 방법」. 한길사. 1994
11. 논문/ 申瀅植. 「三國史記의 現代的 照明」.
12. 논문/
趙恩貞. 「史記의 문학적 특성 · 성취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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