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8일 수요일

신촌 이미지 한의원 02-336-7100 추천책 도올논어

나의 결론은 매우 진솔하다. 墨孟으로부터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이르는 모든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小說이라는 것이다. 小說을 놓고 정밀한 역사적 사실을 論究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小說이란 본시 작은 이야기다. 삶의 자질구레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大說 아닌 小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란 본시 픽션과 넌픽션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픽션과 넌픽션이 모두 인간의 의식의 사태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말할 때는 픽션이 넌픽션이 되기도 하고, 넌픽션이 픽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소설이기 때문에 너무도 小해서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說인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孔子에 관하여 최후로 쓰여진 장편 소설이다. 그 이전의 단편소설을 묶어 장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물론 장편소설을 쓰는 가운데 사마천의 케리그마(선포)가 개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의 모든 공자 논의의 조형이 되었다. 그것은 최후의 장편 소설이며 최초의 장편 소설인 것이다.
나는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내용을 逐字的으로 신봉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작품을 대단하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공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할 때 일단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논의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공자세가라는 小說의 벽을 뚫고 어떠한 공자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는가 하는 것이 결국 세가 이후의 모든 논의의 과제상황인 것이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가장 정확한 實相에 도달하려는 끊임 없는 노력은 가상한 것이지만, 그 노력은 결국 定論이 있을 수 없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규명보다는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나의 이해의 구조가 궁극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 이전의 문헌으로 우리가 공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나는 묵자, 맹자, 장자, 예기 이 네개의 책을 들겠다. 이 네개의 서물은 모두 그 나름대로 확고한 공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장자라는 서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유가와 대립하는, 유가와 전혀 무고나한 독자적인 도가적 사상체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 속에는 공자에 관한 수없는 알레고리가 있다. 그러한 알레고리를 통하여 반사적으로 자기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마구 戱化 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무대위에 올려진다. 때로는 도둑놈으로, 때로는 창녀로, 때로는 겁쟁이로, 때로는 달변의 유세객으로, 때로는 진지한 구도인으로, 한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둔갑된다. 그러나 나는 장자 속에 그려지고 있는 孔子의 소설 속에서 매우 진실한 孔子의 상을 본다. 이것은 좀 범인들이 생각키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의 서향속에 좀 머리를 묵힌 자의 독백이다. 공자는 공자는 디펜드하려는 자들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는 공자의 비판자들 속에서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다. 顔回 속에는 孔子가 보이지 않는다. 孔子의 모습은 오히려 子路속에 있다. 子貢이나 宰予 속에 공자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묵자는 공자를 극렬하게 비판하지만 그 연설을 뒤짚고 보면 묵자야말로 공자의 충실한 후계자임이 분명해진다. 묵자는 공자의 충실한 신도였다. 공자의 집단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내어 일어난 어떤 패시피스트적인 용병집단이었을 것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결코 공자의 세계에서 멀리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다. 묵자가 말하는 兼愛나 節用은 그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벗기고 보면 이미 孔子의 핵심적 사상에 속하는 것이다 묵자는 孔子의 핵심사상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독자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孔子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하는 공자는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서 희화된 孔子의 외피들이다.
이러한 묵자의 확고한 안티테제로서, 楊墨에 대한 유가의 적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孟子야말로 孔子의 최대의 이단일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감언한다. 孟子가 유교의 적통일지는 모르지만, 孟子야말로 孔子의 최대 이단이다 라고.
맹자에게는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의 孔子가 없다. 仁義라는 도덕주의적 사상의 주체로서 추상화 되어있고 논리화 되어있고 형해화 되어있다. 孔子는 삶의 예지덩어리가 아닌, 맹자 자신의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이념일 뿐이다. 孟子의 이러한 추상적 공자상은 曾子에게서 받은 것이다. 曾子는 孔子의 14년 유랑장정의 고난길에 참여한 적이 없는 후기의 어린 제자이다. 曾子는 孔子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曾子가 孔子를 만났을 때는, 孔子는 이미 한 면만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높이 솟아있는, 너무도 인간적일 수 없는 거목이었다. 曾子는 孔子의 추상적 한 측면만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아이였다. 孟子는 曾子를 이어받아 孔子의 大說을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孟子의 大說은 본래의 小說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논어의 틀이 微子편을 만든 사람들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선생의 학설을 깊게 공감한다.(孔子傳, 東京:中公叢書. p.273).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微子 편은 분명 논의 상층대에 속하는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莊子 학파의 사람들에 의하여 날조된 이야기들일 것이다. 孔子나 子路가 장자가 구현하는 어떤 은자들의 모습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들은 분명 후대의 날조일 것이지만, 그 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은 孔子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삶의 전환, 사상적 大悟의 계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孔子는 끊임없이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었다. 무지의 자각을 외친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의 무지 속으로 함몰되고 말았을지언정, 孔子는 죽을때까지 일순간도 자신의 무지를 벗어나려는 好學의 노력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러한 사상적 飛翔의 한 차원을 微子는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생생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적인 공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만약 논어가 적통임을 주장하는 亞聖 孟子 계열에서 편집되었더라면 훨씬 더 경직되고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서물이 되었을 것이다. 論語 속에는 제자백가의 모든 원형이 숨어있는 것이다. 論語는 결코 유교만의 성전이 아니다.
장자가 희화하고 있는 孔子의 모습은 孔子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바로 孟荀 계열에 의하여 도덕주의적으로 고착화되어버린 孔子에 대한 모멸감의 분출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장자가 말하는 모든 논리는 노자를 원형으로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살아있는 공자의 원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장자의 자유분방한 설화문학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공자의 살아있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공자가 젊은 시절에 周나라의 수도 洛陽에 가서 老子에게 禮를 물었다 하는 이야기도, 그 老子가 오늘날의 도덕경의 저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孔子 사상에는 이미 道家的 본질이 함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이야기나 장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같은 평면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이해의 한 지평이다. 孔丘가 말하는 仁이나 莊周가 말하는 坐忘이나 縣解를 모두 그 깊은 내면에서 상통하는 가치로서 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郭店楚墓竹簡의 출현은 노자라는 텍스트에 관한 BC 300년 이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는 놀라운 사실 이외로, 14편에 달하는 방대한 유교전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하고 있다. 이 14편 중의 한 편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예기의 緇衣와 거의 일치하는 고본형태라는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오늘날 이 14편의 성격이 대강 예기의 저본이 된 古文 記 二百四篇류에 속하는 문장일 것이라고 비정되고 있다. 즉 郭店楚簡의 출현으로 예기가 漢代에 성립한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깨어버렸다. 예기의 원본들이 이미 BC 4세기에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郭店竹簡에서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論語의 몇구절들이 있는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논어의 파편의 부분적 존재가 이미 기원전 4세기에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論과 語의 성문화 작업이 이미 기원전 4세기경, 상당히 오래전부터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추측케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1973년) 발굴된 定州漢簡 논어 만 해도 명백하게 張侯論 의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古本임으로 논어의 원형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된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의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孔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다? 이 질문에 가장 포괄적인 대답을 제공하는 전기문학서로서 우리는 사마천의 공자세가를 논구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 속에도 살아있는 공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자의 삶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나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孔子의 삶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세가보다도 더 늦게 편찬된 것이지만, 王肅의 孔子家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자 19세에 宋나라의 幷官氏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아들 伯魚(뿨위)를 낳았다. 공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대의 國君이었던 魯나라 昭公이 사신을 보내어 접시에 커다란 잉어(鯉魚) 한마리를 담어 보내왔다. 공자는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昭公이 보낸 잉어를 보고 잉어(鯉)라고 이름지었다. 伯魚는 鯉의 자이다. 그래서 지금도 曲阜에 가면 孔府家의 宴席에는 잉어요리가 올라오지 않는다. 孔氏들이 어쩌다 타지에서 잉어를 먹게 되면 그들은 지금도 그것을 잉어라 부르지 않고 紅魚라 부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곡부에서 지금도 사실 그대로 신봉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孔子 전기의 작가들이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청년 孔子의 지위가 國君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中庸의 저자 子思의 아버지의 이름이 현실적으로 鯉라는 사실에서 추론해 보아도 이런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공자는 20세경에는 季氏의 일개 家臣인 陽虎에게도 문전박대를 당할 정도의 士에도 못미치는 賤民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 자신이 자신의 과거 시절을 회상하여 나는 젊었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吾少也賤. 子罕 6). 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고, 사마천도 공자는 어렸을 때 가난했고 또 천한 사람이었다(孔子貧且賤)라고 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어떻게 해서 스무살의 천민 공자가 곡부의 판자촌 어느 한 구석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그 나라의 國君인 昭公이 경축의 사신을 보내 성대하게 은쟁반에 담긴 잉어 한마리를 선사했겠는가?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시골 사람들이 애를 낳으면 산후조리가 어려우니까 잉어를 한마리 구해다가 포고 고아먹는 것은 우리 어릴 적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습속의 하나였다. 아마도 공자부인이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기에 건강이 좋질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다가 딱한 주변의 당골네나 촌장이 잉어나 한마리 고아 먹으라고 주었을 것이다. 賤民 孔子는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부인에게 잉어 한 마리 고아 멕이고 아들 이름을 잉어라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아들 이름이 잉어(鯉)라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사고방식이 즉물적이고 천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어릴 때 천민들의 자식들 이름을 보면, 개땅쇠, 말똥이 그런 류의 이름이 많았다. 우리 동네 행길가 끝에 살던 오두막집 자식의 이름이 붙뚜리였는데 그 이름의 유래인 즉, 자식을 낳아 놓으면 하두 어디로 돌아다니다가 없어지곤 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요번에는 집에 좀 꼭 붙어있으라고 붙뚜리라 했다는 것이다. 붙뚜리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의 삶이 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이 얼마나 곤고로운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孔子의 이름이 丘(언덕)이다. 그 아비 叔梁紇과 어미 顔徵在가 尼丘山에서 빌어 낳았다 해서 丘라 했다는데, 기실은 그 孔子의 머리 생김새가 펑퍼짐한 尼丘山의 언덕 모양을 닮아 머리 꼭대기 정수리 부분이 좀 움푹 파이고 주변으로 두상이 퍼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丘라 했다는 것이다(生而首上圩(오목할 우; 土-총6획; wéi, xū)頂, 故因名曰丘云. 世家). 사마천의 이와 같은 명료한 기술에 의하여 말하자면 공자의 이름은 언덕대가리, 가장 친근한 우리말로는 짱구(丘)다. 아버지의 이름은 孔짱구, 아들의 이름은 孔잉어 짱구의 아들 잉어의 탄생을 놓고 國君 昭公이 경하의 사절을 보냈다는 것, 그래서 家語의 표현을 빌리면 榮君之貺(줄 황; 貝-총12획; kuàng)(임금의 경하를 영예롭게 생각)하여 잉어란 이름을 지었다 운운하는 이런 식의 기술의 천박한 신화적 양식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기술양식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짱구와 잉어라는 父子의 이름이야말로 우리가 그 출신의 비천함을 알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한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國君의 공경의 대상으로 기술되는 사태는 후대의 공자인식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孔子가 말년이나 사후에 점한 어떤 위치에 의하여 그 삶의 모든 사건이 유기적으로 일관되게 해석되어야만 했던 어떤 신화적 인식의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孔子가 35세 때, 季平子와 郈(고을 이름 후; 邑-총9획; hòu)昭伯이 닭싸움(鬪鷄)을 벌렸는데, 서로 야비한 짓을 하다가 화가 나서 큰 싸움으로 비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소공은 후소백편을 들어 계평자를 쳤는데, 계평자는 孟孫氏, 叔孫氏와 연합하여 소공을 쳤다. 소공은 이에 크게 패하여 齊나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孔子가 齊나라로 간 사건과 竝置시키고 있다. 사실 닭싸움과 孔子가 35세라는 사실은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가의 기술방식은 마치 공자 35세 때 어떠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시점의 사실이 공자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昭公이 제나라로 敗走한 사실과, 孔子가 젊었을 때 한 때 齊나라로 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두 사실을 교묘하게 竝置시켰다. 그래서 마치 孔子가 敗走한 國君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계씨의 독재로 어지러워진 魯나라를 떠나 國君을 보좌하기 위하여 齊나라로 간 것처럼 위장시킨다. 그러나 孔子는 대부간 닭싸움에의 불필요한 개입으로 패주했어야만 하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소공을 보좌하러 같이 齊나라로 가야만 할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孔子가 그 후 제나라에서 한 행위들, 高昭子의 家臣이 되어 제나라의 景公과 通하려 했다든가, 제나라의 太師에게 韶음악을 배웠다든가 하는 일련의 사건은 패주한 魯나라 昭公을 보좌한다고 하는 명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孔子가 昭公을 따라 제나라로 간 것은 소공이 십오년전에 아들 낳았을때 잉어를 보내 준 그 감격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을까? 소공과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암시로서 잉어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가?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바로 세가의 공자 기술이 이렇게 정당화될 수 없고 필연적 인과 관계를 갖기 어려운 사태들의 그럴듯한 몽따쥬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기술 속에서 살아있는 리얼한 공자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기 단궁의 기록에 의하면 孔짱구는 잉어를 낳은 부인 幷官氏와 이혼했다. 그 이혼한 부인(出母, 정확하게 내쫓긴 부인의 뜻)이 죽었을 때 일년이 지나도록 잉어가 넘도 슬피 울었다(期而猶哭). 잉어가 그토록 슬피 운다는 소리를 듣고 공짱구는 화가 나서 너무 심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잉어는 곡을 뚝 그치고 말았다. 그뿐인가? 잉어(鯉)는 또 그의 부인과 이혼했다. 이혼한 부인은 衛나라로 가서 庶氏와 다시 결혼했다. 그러다가 衛나라에 가서 再嫁한 그 잉어의부인, 그러니까 中庸을 지은 子思의 엄마가 되는 셈인데, 그 부인이 죽었다. 그러자 子思가 그 소식을 듣고 曲阜 孔氏의 사당에서 슬피 울었다. 그러니까 子思의 門人들이 子思에게 와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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