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2편 - 박현 선생님 강의 (바나리 펌)
제 10장
원문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이 드러나듯 원래 모습대로 보고 그 출발점을 보고, 과정상의 얽혀 있는 구조를 한눈에 꿰뚫어보며, 어디에 가서 안주하려고 하는지 그 지향점을 살피면.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 어찌 숨기겠는가?”
설명
「人焉廋哉」의 언(焉)자는 어찌 언자이므로 의문사입니다. 「수(廋)」는 숨기다란 뜻이므로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란 의미인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이라고 조건문이 왔습니다. 여기에서 ‘보다’는 것과 관련해서 「視」, 「觀」, 「察」의 세 단어가 나오고, 소(所) 뒤에 써 이(以), 말미암을 유(由), 편안할 안(安), 세 글자가 나오므로 개념을 정리해야겠습니다.
□ 視
視其所以에서 「시(視)」자가 나오는데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여러 글자 중에서 대표적인 동사입니다. 이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보려면 글자의 모양새를 먼저 보면 됩니다. 이 글자는 두 글자(示. 見)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볼 「견(見)」자가 구성된 것을 살피면 눈 「目」 밑에 있는 것은 사람 인(人)과 같습니다. 밑에 붙은 이것이 독립해 있을 때는 전부 사람인과 같습니다. 사람 「人」이라는 것은 사람의 원초적인 모양새를 말합니다.
여기에(八) 사람이 팔을 달면 이런( )모양이 됩니다. 등대고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등을 대고 둘이 앉으면 바로 이 글자가 됩니다. 이 글자를 요즘 글자로 옮기면 북녘 「북(北)」자가 됩니다. 북녘 북(北)자를 그래서 등질 배, 패배할 배라고도 읽습니다. 「北」만 가지고 배신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반대되는 사람이 팔을 마주하고 잡고 앉은 것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 반대로 그려 놓으면 팔을 서로 마주 잡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우리가 아시아할 때 쓰는 버금 「아(亞)」자가 됩니다. 버금 아자는 사람 둘이 서로 마주보고 손잡고 있는 것입니다. 으뜸과 버금할때의 버금입니다. 「버금」이라는 것은 뭔가 비교 대상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왼쪽에 있는 사람이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나 어금 버금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원래 모계(母系)제 사회에서 그 여자가 거느리고 있는 두 명의 남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큰 남편이나 작은 남편이나 서로 어금 버금 이렇게 정답게 살라는 의미의 「亞」자입니다. 그렇게 보면 북녘 북(北)자는 정 반대의 개념이 됩니다. 그래서 패배하다, 등 돌리다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어쨌거나 둘 다 사람모양의 여덟 팔자를 기본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덟팔자로 나오는 것도 과거 전부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볼 見자 밑의 八자도 사람 人이란 뜻이고, 사람의 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이 보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의 눈으로 감각을 하다 무엇을? 그 대상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에 해당하는 글자가 바로 앞에 있는 「示」입니다.
제가 왜 글자모양 이야기를 드리느냐 하면 근래 글자모양을 다루는 책을 받았는데 하도 황당한 해석이 많아서 이렇게 글자 이야기도 풀어가며 하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원래 이 글자(示)는 과거에 이렇게( ) 생긴 글자입니다. 세 개가 받치고 있고 그 위에 알이 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신이 하나의 상위에 올라온 것을 말합니다. 뒤집어 말하면은 신이 현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이 현신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視」입니다. 원래 視의 개념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그럼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이 현신해서 무엇을 봤느냐? 所以를 보았습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서 본 것입니다. 바 所자의 뒤에 써 以자가 여기서는 동사가 되는 것입니다. 「所以」라는 것은 여기서는 「所始」와 같은 표현이 됩니다. 무엇으로 시작했는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所出로 쓰면 개념의 오해가 올 수 있습니다. 所出이라는 것은 생산한바가 되므로 所始라고 하는데 所出이나 所始나 원래는 의미가 같습니다. 여기서는 이것을 所以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어디서 출발했는가? 그가 출발한 바, 비롯한 바를 視하라.
□ 觀
그가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視하고 그 다음에 「觀」하라. 觀도 살펴보겠습니다. 뒤에 있는 볼 見자는 앞서 설명했습니다. 앞에 있는 것(雚)이 문제입니다. 맨 위의 초(艹)두 변은 지금 이렇게 그림을 두 개(艹)를 그리지만 과거에는 이렇게( ) 되어 있었습니다. 위에만 있었는데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이른바 산양 족을 가리킵니다.
산양 족은 우리 고대 종족의 한 계보입니다. 그리고 밑에 새 추(隹)가 붙습니다.
결국은 새도 족칭, 산양도 족칭이므로 이 두 개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두 개는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두 族, 집안이 맺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집안이 맺어지는 걸 원 우리말로 ‘누비’라고 합니다. 두 집안이 맺어지는 것, 두 사물이 맺어지는 것을 우리말로 그냥 맺음이라고 하지 않고 ‘누비’라 부릅니다. 요즘 입고 있는 옷 중에서 누비옷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누비의 원 의미는 ‘더덕 더덕 기운 것’이 아니라 ‘맺어진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아직 누비와 관련되어 남아있는 단어로 「누비혼인」이 있습니다. 누비혼인이라는 것은 자기 딸이 처가 집의 누구한테 시집가고 처가 집에서 자기한테 장가오고 왔다 갔다 해 가지고 서로 섞여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혼인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을 가리키는 대목이 두 개(口口)입니다. 위의 산양족과 아래 새족이 있으므로, 새 족과 양 족이 결합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무언가 사물이 결합되어 있는 것(雚)이 눈에 형상을 드러내는 것(見), 그것이 볼 관(觀)자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물과 어떤 사물이 결합을 했는가. 그 사물의 결합관계를 눈으로 보는 것이 觀입니다. 어떠한 결합관계, 그 과정상의 결합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觀其所由, 어디로부터 말미암고 있는가, 어디를 경유하고 있는가 하는 과정을 관하라. 사람을 觀한다 하면 사람이 이러 저러하게 섞여있는 것을 한눈에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찰하다 할 때의 관이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것을 한눈으로 드려다 보고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합적인 것을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한자로 「講」입니다. 강의하다 강회를 하다 할 때의 講이란 이런 개념입니다. 왼쪽의 말씀 言변을 뺀 오른쪽의 글자가 원래 어떻게 생긴 것인가를 살피면 됩니다. 構造할 때의 構에도 들어있는 글자인데 이 두 글자를 상형화 시키면 이렇게( ) 됩니다. 이 한 글자( )가 오늘날의 발음으로 칭(稱)입니다. 칭하다 할 때 칭으로 앞에 벼화(禾)가 붙든 안 붙든 칭인데 우리말의 ‘칭’하고 똑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칭칭 동여매다. 우리말의 칭칭이 여기서 옵니다. 우리말의 칭칭이 순 우리말이 아닐 수도 있고 반대로 칭이란 한자어의 발음이 순수 한자 발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음가는 원래 같습니다. 원 우리말이냐 아니냐가 참 모호한 말들 중의 하나입니다. 두 개중 하나만 보면 되는데 칭이란 것은 파오의 지붕( )과 파오의 기둥( )을 가리킵니다. 두 개의 기둥을 엮어서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것을 일러서 칭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구조와 구조를 서로 엮어놓아서 그것을 하나의 지붕 아래에 통합시키는 것, 그것을 칭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이러한 것을 구조와 구조, 하나의 지붕에 어떻게 구조가 되어 있고 구조가 되어 있는 가를 이해하는 거 그 뼈대가 되는 것을 개념(言)으로 정리되면 「講」이 되고, 하나의 재료로서 어떻게 칭칭 묶을 것인가를 재료에 대해 생각하면 구조 「구(構)」자가 됩니다.
칭칭 동여매져 있는 구조를 한 눈에 들여다보고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觀」입니다.
□ 由
觀其所由에 말미암을 「유(由)」가 나오는데 由의 원래 글자는 이런( ) 모양입니다. 글자가 끝까지 다 이어지면( ) 신(申)이 됩니다. 음가로는 ‘쉰’이 되고 쉰은 원래 ‘쇤’과 같습니다. 밝음이라고 말하는 신, 이 申은 오늘날 이 神과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아래로 다 뚫리지 않으면 由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신이 그 몸을 다 뚫고 가지 못하고 걸쳐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에 제가 받은 어떤 책에서는 說文을 끌어대어 좀 황당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자가 이른바 솥 구(臼), 확 구. 돌 확자입니다. 요즘 절구를 가리킵니다. 솥 통, 절구통 등을 상징화 시켜 놓은 것입니다. 이 절구통을 다시 옛 사전인 설문에 찾아보면 사람의 머리, 人頭也라고 되어 있습니다. 申자를 설명하면서 돌절구에 막대기가 꽂혀져 있는 것으로 보고, 돌절구를 여성의 성기로 보고 막대기는 남근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있습니다. 설문의 설명 문장에 從臼自持也로 되어있으니 남근으로 해석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중국 사람은 절대로 못 푼다. 조선 사람만이 이 발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이렇게 설명해 버리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발음을 굳이 조선말에서 가져와 중국 사람의 사전에 실으려면 조선말로 된 남자의 성기와 여자 성기를 이르는 표현이 설문에 모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한자로는 이미 여근이다 남근이다 표현할 수 있는데 설명하면서 구태여 이런 표현을 썼을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從臼自持也란 사람 머리가 있으면 거기에 따라서 저절로 지탱되어 있는 것이란 뜻이며, 그것이 申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를 꿰뚫고 저절로 머릿속을 지탱시키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신이 완전히 머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아직 중간쯤 들어가고 있는 것, 어정쩡하게 있어 아직 신이 나간 것도 아니고 들어간 것도 아닌 것. 그것이 바로 말미암을 「由」인 것입니다. 즉, ‘과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觀其所由란 어디를 경유하고 있는가 하는 그 과정, 칭칭 동여매 있는 그 구조의 과정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察
察其所安, 「察」이라는 것은 위에 일단 갓머리(宀)가 있습니다. 갓머리를 빼놓고 밑에 있는 건 제사 제(祭)자 입니다. 제사제자에도 마찬가지로 볼 시(示)가 들어가 있지요. 갓머리(宀)와 볼 시(示)자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옛 글자는 이렇게( ) 되어 있는 글자입니다. 이것은 제기를 가리킵니다. 또는 제기를 얹는 도마를 가리킵니다. 옛날에 도마라는 것은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얹어 놓는 판을 가리켰습니다. 지금도 제사 지낼 때는 흔히 도마에 얹으라고 합니다. 도마 밑에 있던 볼 시(示)자는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 ) 모양이었습니다. 이것은 三神을 의미합니다. 있지요. 이 두개가 합쳐지면 제사 제(祭)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는 도마를 놓고 그 앞에 삼신을 앉혀 놓은 것입니다. 察자는 마찬가지로 ‘보다’할 때 신이 드러나는 모습을 말합니다. 살피다라는 이 의미는 공간적으로 쪼갤 수 없는 것을 쪼개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察其所安. 어디에 안주하고 있는가, 즉 목적지가 어디인가. 어디에 안주하려고 하는가를 살피면 사람이 어떻게 숨기겠는가 어떻게 숨기겠는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세 가지를 보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만을 본다던가 두 개만을 본다면 모두 드러나지 않고 속일 수도 있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視其所以. 그 출발점을 신이 드러나듯 보고, 원래 모습대로 보고. 觀其所由, 그 과정상의 칭칭 얽혀 있는 구조를 한눈에 꿰뚫어보며. 察其所安, 어디에 가서 안주하려고 하는지 그 목적을 살피면. 人焉廋哉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 어찌 숨기겠는가? 이런 해석입니다.
일부 번역본에는 숨길 廋자를 잘못 마를 수자로 이해해서 사람이 어찌 마르겠는가? 사람이 어찌 마르겠는가? 라고 해석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전후 문맥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안회를 이야기 한 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종일토록 지켜보니까 어리석은 것 같더라 근데 나가서 하는 모습을 보니 회는 어리석지 않더라. 판단의 기준이 여기 있습니다. 안회가 어디서부터 마음을 냈으며, 그 마음을 어찌 내어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사는 바를 어디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인가 그러면 사람은 숨길 수 없다, 숨길 수 없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하나 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하나 됨을 만드는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11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제 11장
원문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가올 미래를 아는 사람은 가히 공동체의 일을 맡을 만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설명
□ 故
溫故而知新이면 可以爲師矣. 溫故而知新은 워낙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溫故, 연고가 있는 것. 연고가 있다는 「故」자와 옛 「古」자는 다릅니다. 이 故는 故鄕할 때 쓰입니다. 우리는 故鄕, 중국사람은 故土라 합니다. 古人은 돌아가신 분. 故人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옛사람, 옛 도읍지 할 때 古, 故를 쓰는 차이는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古」는 나와 일정 연고가 없는 객관적인 것을 뜻합니다. 「故」를 쓸 때는 나와 연고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옛 고(故)는 연고 故자로도 쓰입니다. 古는 나하고 연관이 있든 없든 객관화된 과거를 의미합니다. 지나간 과거의 어떤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하고 관련 있든 없든 옛날 사람, 옛날 도시 할때는 古人, 古都가 되지만, 나와 상관 있는 경우는 故人, 나와 상관 있는 옛 분. 故鄕, 나하고 연고가 있는 鄕. 故土, 나하고 연고가 있는 장소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나와 관련된 과거입니다. 과거의 무한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 溫故知新
溫故는 따뜻하게 복습한다, 익힌다란 의미입니다. 아무런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연고가 있는 과거를 익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원칙이 先近後遠이 되는 것입니다. 가까운 것부터 먼저 익혀나가고 먼 것은 그 다음입니다. 바로 나하고 연고가 있는 것부터 익히는 것입니다. 역사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모든 것을 살필 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觀으로 살펴서 한 눈에 얽혀있는 복잡한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溫故하고 知新 다가올 미래를 안다면,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다면. 그 주체는 물론 현실에 있는 사람입니다. 可以爲師矣. 可, 무엇이라 할 만 하다. 以爲, 무엇이라 여길 만 하다. 師, 스승이라 여길 만 하다. 스승이 될 만 하다가 아니라 스승으로 삼을 만 하다란 뜻입니다.
□ 師
스승 「사(師)」도 살펴야하는 개념입니다. 師의 왼쪽 부의 옛 글자는 이런( ) 모양이었는데 초엽, 잎사귀 엽(葉)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른쪽의 巾은 잎사귀를 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채엽을 하고 있는 채엽인을 가리킵니다. 그 위의 一은 이른바 우두머리, 지휘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잎사귀 또는 곡식을 채취하고 있는 우두머리가 바로 「師」입니다. 이 개념과 관련되어 이런 글자가 있습니다. 맑은 대쑥 설(薛). 이것은 강조하려고 풀 초까지 붙인 것입니다. 맑은 대쑥, 나라이름 설(薛)인데, 이 설이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차’의 순 우리말입니다. ‘설날’도 한자로는 茶日이란 의미가 됩니다. ‘차’의 원래 음가가 설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고어에는 이것을 ‘차’라 했다, 차를 가리켰다란 문장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운남 등의 소수민족들은 차를 차라고 발음하지 않습니다. ‘보이차’라고 하지 않고 ‘보이설’이라고 합니다.
師는 어떠한 일을, 노동을 지휘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모든 공동체의 일을 지휘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師는 영어의 teacher로서 모르는 것을 말하는 사람,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인데 비해, 과거의 師는 공동체의 일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식해도 師가 되지 못할 수도 있고, 무식해도 師가 될 수 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아는 것이 없어도 그 공동체의 일을 잘 지휘해서 빈틈없으면 지도자라 할 만 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닌 것입니다. 그러려면 溫故知新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몰라서도 안 되고 그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 못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그처럼 될 수 있는가란 의문이 제기됩니다. 공동체의 일을 지휘하고 옛일과 다가올 일을 일체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조건의 사람이어야 하는 주체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제 12 장
원문
子曰 君子 不器
(자왈 군자 불기)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뜻을 받들어 가는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사유화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설명
□ 器
君子 不器라 했습니다. 천군의 아들, 공도자, 하늘 뜻을 받들어 가는 사람은 不器. 그릇이 아니다. 君子不器 는 많이 알려진 문장입니다. 일반적으로 군자는 어떠한 용도에 한정되지 않고 끊임없는 유연성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좀 더 정밀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릇 「器」에 대한 의미파악이 필요합니다.
器자는 네 개의 口사이에 큰 대를 넣었습니다. 대(大)가 되었다가 나중에 개 견(犬)자를 넣기도 합니다만 본래는 큰 大자입니다. 큰 大 와 器 의 의미는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물건 담는 그릇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릇은 그릇이되 그릇에다가 무엇을 써넣은 것을 말합니다. 반명(盤銘)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릇에 있는 새겨놓은 것. 쇠그릇이라면 쇠그릇에 새겨놓은 것, 銘文을 새겨 넣거나 무늬를 새겨 넣는 것만이 기(器)입니다. 아무런 문양이 없는 것을 器라 하지 않습니다. 器라는 것은 名을 새긴 것인데, 명이란 것은 자신의 이름값인 것입니다. 과거의 그릇에 새긴 것은 거의 자기 이름입니다. 그처럼 자기의 것은 무엇이고 너의 것은 무엇이고, 이런 것은 이런 것이고, 내 것 네 것을 딱 갈라서 고정화시키는 것이 「器」인 것입니다.
군자는 그릇에 담기지 않는다, 단순히 고정된 물건이 아니다란 의미가 아니라 이미 있는 물건을 너의 것, 나의 것 구분해서 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것이 내 것 될 수 있고 내 것이 네 것 될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를 달리 《예기》에서 말하기를 君子則市也. 군자는 바로 시(市)다, 저자다라 표현합니다.
군자라는 것은 방금 나온 공동체의 스승, 「師」입니다. 잎사귀를 따는 우두머리에 하늘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하고 교환하는 것까지 전부 하나로 총괄하는 것인 市가 잘 돌아 가면 과거에는 이를 성인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공평무사하게 누구도 손해 보지 않고 누구도 득을 보지 않는 완전한 오고감이 이루어지는 것, 그러면서 굳어지지 않고 네 것 내 것이 구분되지 않아 모두 우주의, 하늘의 질서에 따라서 교환될 수 있는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에 군자는 바로 시장이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市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장소를 일러 商이라 하였습니다. 은나라라는 이름은 외부인들이 불렀던 이름이고 은나라의 원래 이름은 商나라입니다. 장사꾼 나라라는 의미인데, 이처럼 시장을 완벽하게 조정하는 하늘의 뜻을 받들겠다하고 약속의 나라입니다.
상이라는 음가와 관련해서 볼 수 있는 단어로는 언덕 「峠」이 있습니다. 시장이 있는 위치라는 어의적 파생단어입니다. 또한 오늘날은 음가가 다릅니다만, 과거 음가가 같았던 것이 바로 「成」입니다. 시의 기능이 잘 이루어지면 번성한다는 뜻으로 현재 발음은 성「cheng」이지만 과거 음가는 똑같이 ‘샹’입니다. 市의 오늘날 발음은 ‘시’, ‘스’ 등이지만 과거에는 ‘쉬’였습니다. 중국 사람중에도 오늘날 ‘쉬’라고 읽기도 하고 ‘스’라고 읽기도 합니다.
君子 不器는 내 것, 네것 새겨서 자기가 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못 쓰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하의 만물은 주인이 없는 것이란 뜻입니다. 만물이 주인 없으면서 사람 필요 필요에 따라 알맞게 돌아가는 것, 그래서 ‘내 것’이다 하고 표시하지 않는 것을 일러 君子는 不器다 상징적으로 썼습니다. 군자는 그릇에다 자기 이름을 쓰지 않는다. 군자는 만물을 굳히지 않는다. 이것이 원래 君子 不器의 의미인데 오늘날 일반적인 의미대로 해석해서 ‘군자는 굳어 있는 그릇이 아니다’ 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공동체내에서 사유화(私有化), 독점, 굳히기를 통해 남 못쓰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 내 것이다 라고 금그어 만물을 소유하지 않으면서 만물이 모두에게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주체만이 溫故而知新을 통해 공동체를 공평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요(堯)임금은 높게 평가하지만 순(舜)임금은 높게 치지 않습니다. 요임금 시절의 것은 음악이든 다른 것이든 하나도 부정을 하지 않습니다. 순임금의 것은 부분 부정을 하고 우(禹)임금은 상당히 많은 것들을 그르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의 전적(典籍)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도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도지》에 따르면 우(禹)와 순(舜)은 공동체의 반역자이고, 우(禹)는 그 반역자 중에서도 아주 왈패 반역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부도지》에서는 요(堯)도 반역을 시작한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君子 不器라는 것을 유연성이다라고만 해석하면 10장, 11장과 연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글자의 원 뜻을 살펴 들어가면 이해가 비교적 쉬워집니다.
제 13 장
원문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
(자공문군자 자왈 선행기언 이후종지)
해석
자공이 군자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선생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가진 가치관을 실현하라. 그러면 군자의 길을 저절로 좇아가게 될 것이다.”
설명
□ 先行其言 而後從之
공자께서 君子 不器라 하니 자공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군자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라고 대답합니다. 先行, 먼저 실행하라. 其言, 너의 개념을, 네가 갖고 있는 가치관을 실행하라. 先行其言 而後從之. 그러면 그 후에 좇을 것이다. 이를 흔히 잘못 해석하면은 이렇게 됩니다. 先行, 먼저 행동하라. 其言 而後從之. 그 말은 이후에 그 행동을 좇을 것이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문장의 해석이 왜 일반적으로 잘못되었는지 문장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先, 부사. 行, 동사. 其言, 그 말. 而, 접속사. 從之.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先行에서 끊긴다면 그 다음 문장은 其言從之나 而其言從之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而가 其言 뒤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其言이 先行의 목적어 내지 목적어에 상응하는 내용을 가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其言을 선행하란 이야기입니다. 먼저 실천하라. 무엇을? 네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개념을 실현하라. 而後從之. 그러면 좇아질 것이다. 뭐가. 군자의 길을 좇아갈 것이다. 그러면 군자의 길로 나가게 될 것이다. 군자가 무엇이냐 묻지 말라. 군자가 이런 것이다 말하지 말라. 네가 가진 가치관을 실행하라. 그러면 군자의 길을 저절로 좇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공자가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군자에 대한 설명이 계속 나옵니다. 주체의 문제가 계속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로부터 주체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 14장
원문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자왈 군자 주이불비 소인 비이부주)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군자는 우주에 가득 차 치우치지 않아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적인 개인은 치우쳐서 비교의 대상이 될 뿐 우주를 가득 메울 수 없다.”
설명
□ 比
「比」에 대해서 견주다는 비교를 말씀드리면서 두 개의 비자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이 「比」는 개념상 비교를 해 보는 것이라 말씀 드렸습니다. 비교후 좋고 나쁘고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비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개성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우주가 꽉 차있고 그것이 전체집합이라면 인간이 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느 인간도 이 우주를 꽉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나름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주라는 넓은 시공간을 무대로 하고 있고, 인간이라는 種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과거에서부터 온 것, 현재에서부터 온 것 심지어 미래에서부터 온 것, 자신이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과거이면서 미래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개성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개성이 있기 때문에 비(比)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比 해서는 안 되며 군자는 忠하라, 우주를 자기 마음속에 꽉 채워라. 그리고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도록 텅 비어 열어놓으라. 삶은 열어놓고 우주를 가득 채우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자는 우주를 두루두루 하고 어느 한쪽에도 不比, 치우치지 않는다. 비교의 대상이 되지를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사인, 사적인 길을 가는 사람은. 「私」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私道, 개별적인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를 가는 사람을 일러 小人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특별히 작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개성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치우쳐 있기에 개성이 있으며 작다는 뜻입니다. 비교의 대상이기 되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고 작은 것입니다. 따라서 사적 개인은 比 . 어디어디에 치우쳐서 비교의 대상이 될 뿐 두루두루 하진 않는다.
比자의 원형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亞자 역시 이야기하였습니다. 比자는 사람이 나란히 똑바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北자에서 등 돌리고 있던 하나를 돌려세워 가지런히 시켜놓았습니다. 그리고서 차례로 비교하는 것 그것이 비(比)인 것입니다.
제 15 장
원문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배우기만 할 뿐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생각을 모두 차단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외부에 들어오는 생각에 이리저리 끌려갈 뿐 하늘길이 무엇인지 배우지 않아 중심을 잡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다.”
설명
□ 思
學而, 배우고 不思, 「사(思)」하지 않으면. 배우기만 할 뿐 思하지 않으면 則罔, 이것은 허망한 것이다. 思를 생각하다만으로 해석하면 쉬운데 원래 뜻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思란 들어오는 생각입니다. 배우라 그리고 생각하라 그래야 허망하지 않다. 사람이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허망하다 라고 여기서 이야기했습니다. 「思」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생각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차단한다는 것은 배우기만 할 뿐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자극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세상의 수행입니다. 수행 자체에만 매달릴 뿐 세상, 자신의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이야기들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즉 세상에서의 도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허망하다 그러므로 도피하지 말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思而不學, 밖으로 들어오는 생각에 여기저기 끌려다니기만 할 뿐 不學, 스스로 무엇이 하늘 길인지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은 위태로운 것이다. 일반적인 해석으로 파악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허망한 것이다. 배우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서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문을 닫아걸고 있다면, 즉 안으로 주체를 세운다는 명분 하에서 폐쇄하고 있다면 허망한 것이며, 또한 바깥에서 들어오는 모든 조건에 일일이 개방해 반응만 할 뿐 중심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것은 위태로운 것이다.
□ 殆
殆자의 좌측 변(歹)이 죽을 사(死)와 같은 것입니다. 우측의 태(台)는 음가를 나타내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태는 이것(歹)의 의미가 중심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北자에 서 유추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에는 두 가지 가 있습니다. 죽을 사(死)의 옛 글자 모양은 이것( ) 입니다. 이것( )은 산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하고 이것( )은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는 것을 뜻합니다. 죽을 올(兀). 되살아 올 화(化), 그것이 죽을 사자의 의미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오고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을 死자의 위 一자는 죽음과 삶에서 같은 목적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殆란 바로 망칠 것이다. 태어난 건 바로 죽을 것이다. 안 될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허물어 질 것이다. 외부의 조건에만 따라갈 뿐, 시세에 따르고 유행을 따라갈 뿐 중심을 세우지 않고 간다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패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군자의 길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殆의 의미입니다. 앞서 말한 사람이 등 돌리리고 있는 것, 서로의 갈라섬, 이것이 죽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나중에 사람이 죽어 가야 되는 목적지를 가리키는 글자로 변화되면서 방위로서 북쪽이 됩니다. 북쪽이란 의미가 먼저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 북쪽을 가리키는 한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제 16 장
원문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자왈 공호이단 사해야이)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구하여야 할 바른 질서가 아닌 다른 것에 종사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일일 뿐이다.”
설명
□ 攻
攻乎異端 斯害也已라는 표현은 글자를 맞추려고 고생을 한 문장입니다. 본래는 攻異端 하면 됩니다. 그런데 異端을 강조하기 위해서 호(乎)라는 전치사를 넣었습니다. 어디어디에 종사한다면, 異端에 종사한다면, 異端을 자꾸 파헤치기 시작한다면 등의 뜻인데 이를 위해서는 攻을 살펴야 합니다.
「攻」은 공격하다로 많이 쓰입니다. 공격하다, 공력(功力) 등 여러 의미로 쓰입니다만 뜻은 하나입니다. 天地를 하나로 연결시키려는 행위를 가르킵니다. 천지를 연결시키고 있는 역할을 말하므로 ‘무언가를 이으려고 하는 인위적인 행위’를 뜻하게 됩니다. 그것을 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공인(功人)들인 것입니다.
□ 異端
攻乎異端. 이단에 종사하는 것, 사(斯). ‘이것은’ 이란 뜻으로 앞의 것을 받고 있습니다. 이단에 종사하는 것은 害也已. 해롭다. 여기서는 「害」의 의미와 함께 「異端」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異는 다르다는 뜻인데 이것은 원래 「도철」이라고 하는 괴물을 상형한 글자입니다. 그 후 다르다란 의미로 전환되었는데 원래 상형자의 의미로 쓰였을 때에는 도철이라는 괴물인데 도철은 남방의 농신(農神)을 가리킵니다. 북방의 농신은 신농(神農)입니다. 남방의 농신은 바로 異입니다. 글자를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밭 전(田)자에다가 공공할 때 共자 들어갔습니다. 공공이 사람 이름입니다. 바로 《사기》에 나오는 「共公」이라는 벼슬이름이면서 그 벼슬을 맡아 했던 인물의 이름입니다. 이 공공이 남쪽으로 가서 정착해서 신으로 추앙받는데, 신농이 나중에 소머리, 사람 얼굴, 말의 형상이 되었듯이 이 사람도 나중에 괴물로 설화 되어 버립니다. 그 이름이 후에 異 라는 글자가 처음 생깁니다.
북방신이 주신(主神)이 되고 북방 신을 중심으로 중국의 하족의 계보가 짜여지다보니 異가 괴물이 되고 다른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설화상 모습으로 보면 신농도 괴물이고, 공공도 괴물인데 공공은 남방계에 정착을 했고 신농은 북방의 신이 되었는데 공공은 정상적인 계보의 신이 되지 못한 채 괴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괴물이 된 남방계의 이름들 중 대표자가 바로 도철입니다.
다르다라는 의미면 비교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과 다를까. 여기에서 문제의 소지가 나옵니다. 《부도지》를 보면 비교 대상이 또 하나 있습니다. 《부도지》에 有戶氏(유호씨)라는 종족이 있습니다. 유호씨 만이 정통이고 그 외 집단은 이단입니다. 즉 부도지에 따르면 신농, 도철 등이 반대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부도지에서 유호씨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을 따르면 신농의 농은 鬼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귀신 할 때 귀로 쓰이지만 원래는 계통의 이름입니다. 중국인은 괴물이란 의미로 오늘날 쓰지만 그냥 한 계통의 족칭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시아 대륙을 휩쓸던 세 개의 거대한 계보들에서 나타난 이름들입니다. 유호씨의 이름은 다중에 「亶」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따라서 亶, 農, 異 라는 것은 전부 계보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도의 중심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도의 중심과 다른 것에 종사하지 말라는 겁니다. 異의 端에.
端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단을 끝이라고 하였는데 정점, 클라이맥스를 말하기도 하고 출발점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끝점을 말하기도 합니다. 앞에 말한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이 세 가지 삼단입니다. 말미암을 유자를 빼고 나면 以, 安이 끝 양단입니다. 따라서 양단이라는 입장에서 해석하면 무엇인가의 끝을 잡지 않고 엉뚱한 곳에 설정을 둔다 는 식으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엄밀하게는 이 세 가지 과정이 이루어낸 총체적인 것, 역사, 문화, 총체적인 시스템을 단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음가는 엄밀하게는 유호씨의 ‘단’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공자의 사상은 이것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공자의 사상은 신농씨의 사상과 계보를 따르고 있습니다.
攻乎異端 할 때, 오늘날의 이단, 사이비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 害
「害」란 희생으로 바쳐진 것이 효과가 없음을 말합니다. 대가없는 희생을 하라 라는 말뜻이 있듯이 이 글자가 희생을 쪼개는 것, 분할 할 「割」과의 상관관계가 생성될 수 있습니다.
「端」과 「亶」은 음가가 같다고 했습니다. 《부도지》에서 단은 후에 「城堭(성황)」이라고도 표현 합니다. 즉 성황을 받아들이는 지역이냐 아니냐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나중에 兩端이 天地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乾坤(건곤)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공자는 천지라는 단어는 썼지만 건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乾坤(건곤)이라는 표현이 춘추시대에 쓰였던 표현임은 다른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乾坤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天地라는 개념을 씁니다. 天地는 하늘, 땅을 가리키는 개념에서 나중에는 天과 地가 철학적 개념으로 추상화되면서, 天이 구체화 되면 乾, 地가 구체화 되면 坤 이라는 형태로 쓰입니다만 천지, 건곤의 글자의 출발점은 서로 다르고 음가 자체도 다릅니다. 결국 출발 때 뜻 자체가 다른 말인 것입니다.
「乾」은 앞의 문자인 ( )이 중요한 부분이고, 坤은 글자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乾자의 오른쪽 부분인 「乞」의 고어형은 이런( ) 형태입니다. 위에 있는 것은 사람 인(人)이고 밑에 있는 것은 을(乙)은 새를 말합니다. 즉 이것은 귀방(鬼方)이 아닌 인방(人方)의 새 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방의 새 토템 족인 것입니다. 고구려나 신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새 족을 의미합니다. 귀방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 ) 우리말로 ‘한’ 또는 ‘칸’과 같은 겁니다. 이것의 옛 고어는 이런( ) 모양으로서 해를 두 손으로 받들고 있는 형태로 오늘날 영부(靈符)에 남아 있으며 또한 중국의 갑골문에도 남아 있습니다. 후대에 가면 아래에 있던 두 손이 알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가서 이( )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즉 위의 十과 아래 十은 모두 원 고어에서 알을 받치고 있던 두 손인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칸이라는 의미가 바로 공동체의 대표를 뜻합니다. 바로 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라가 인격화된 것이 한인 것입니다. 따라서 乾은 인방 새 족의 칸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태양」입니다.
坤은 땅이란 의미입니다. 땅(土)에다가 이건(申) 신이지요. 땅에 신이 내리 꽂힌 게 곤인 것입니다. 이 음가와 통하는 것도 오늘날의 우리말로는 ‘꽂히다’. ‘꽂다’등이 있습니다. 내리꽂다 할 때 「꽂」과 그 의미가 같은 것입니다. ‘꽂다’라는 동사형은 「고」의 음가에 그 중심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고’란 여러번 살펴보았듯이 고시붐비, 고심비 등의 우리말 고어와 ‘고주몽’의 ‘고’ 등 제사장과 관련되어 있는 말로서, ‘사랑하다’, ‘제사장’등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고’의 고자도 같은 고자입니다. 이 ‘고’에 명사형 또는 형용사형의 받침 ‘ㄴ'이 붙은 것이 ’곤‘입니다. 乾이 ’한‘이고, 이 한은 태양을 의미하는 ’하‘에 ‘ㄴ'인 인격 명사형이 붙은 것이듯이 이 곤의 ‘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건곤으로 읽습니다만 원래는 간곤, 한곤, 칸곤인 것입니다. 이러한 간곤의 개념을 주로 쓰는 것이 이른바 인방이고, 천지를 주 용어로 쓰는 것이 귀방입니다.
斯害也矣. 이것은 아무런 효험이 없는 짓이다란 의미입니다. 엉뚱한 것에 종사해 보라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 것 같느냐? 이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24장 마지막 구절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이 있습니다. 제 귀신이 아닌데도 祭之,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이고 見義不爲, 義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는 표현과 연결되는 것인데 그때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한의사 한분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이 한의학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할수록 자기가 사기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마 정직한 자기 관찰일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이야기를 말씀 드렸습니다. 영추경을 보든 태소를 보든 소문을 보든 반드시 《설문해자(說文解字)》를 가지고 글자 하나 하나의 개념을 모두 다시 찾아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현재의 글자 개념대로 해석을 하면 당시 사람들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못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 시대 이전 사람들의 개념을 보려면 그 글자를 한나라 시대 이전에 쓰이던 개념대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옛 문헌들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축(祝)자의 뜻은 그냥 축하한다란 의미가 아닙니다. 영어의 congratulation과 다른 의미입니다. 원 의미를 살피려면 옛 문자를 살피면 비교적 쉽게 접근 할 수 있습니다. 축의 원 고어는 ( )입니다.
왼편은 삼신(三神)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른쪽은 무릎을 꿇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향해서 기도를 올리는, 축을 하는 것이 祝의 원의미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매우 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기본적인 글자들의 내용이 그렇게 달라져 버립니다.
《논어》를 보면서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지금 문자를 해설하면서 해석해가는 이유는 제가 최근에 선물 받은 책에 충격을 받아서 입니다.
자로가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子貢問曰 賜也 何如 子曰 女器也 曰何器也 曰瑚璉也 “선생님 저는 어떻습니까?” 라고 묻지요. 자기의 평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가 너는 그릇이다.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내용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일반적 해설으로 살펴보면 공자가 군자, 사람이란 그릇이 되선 안 된다. 딱딱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해놓고 제자에게 “너는 그릇이다.”라고 평가를 했다면 이것은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한번 그릇으로 굳어진 자는 다시 유연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썼던 器가 오늘날 쓰는 철학적인 개념으로서 ‘굳은 자’라면 “너는 여기 있을 필요 없어, 가!” 라는 대답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 어떤 그릇입니까?”하고 질문하니 “참 보석 같은 호박으로서 만든 그릇이다”라고 답을 했는데 이것은 자로가 “저는 어떻게 금을 그었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설문(說文)》대로만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자로가 갖다가 “제가 뭘 했는데요?”, 何器也? 제가 어디다 금을 그었다는 말씀입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로는 깡패였습니다. 자로의 평생 소망이 좋은 옷이나 수레가 있으면 친구하고 같이 나눠 쓰고 다 떨어지면 유감이 없겠다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공동주의자인 그에게 갑자기 공자가 ‘너는 이미 내 것 네 것 금 그었다’하니 황당해가지고 덤빈 것입니다. “제가 어디다 금 그었습니까? 何器也?”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가 瑚璉(호련), “너 보석은 어찌했느냐?” 엄밀하게는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르게 해석을 하면 이렇습니다. 何器也, 제가 어떤 정도의 그릇인가요? 너는 보석그릇이니라. 얼핏보면 말은 되는데 엄밀하게 그 의미를 따지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요즘의 해석을 너무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적절히 섞어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그 의미를 추구하려면 그 글자의 원 의미대로 돌아가면 됩니다.
따라서 나중에 한문을 한글자라도 제대로 알려면 설문이 필요합니다. 설문해자는 발음도 쉽고 보기도 아주 쉽습니다.
제 17 장
원문
子曰 由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해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로야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해 알려주랴? 지라는 기관이 작동하면 아는 것이요, 지라는 기관이 작동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설명
由는 자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로야. 誨女知之乎. 이것은 제가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誨자도 글자를 보시면 쉽게 그 의미가 파악되는 되실 것입니다. 말씀 言에 붙어있으므로 개념을 하나하나씩 알려주는 것이 誨가 되는 것입니다. 너에게 일러주랴. 知之, 知라는 것에 대해 알려주랴? 단순이 앎에 대해 알려주랴 하면 之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즉 지라는 기관이 작동하면 아는 것이요 지라는 기관이 작동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지다.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드렸으므로 이정도로만 해석하겠습니다.
□ 子
「子」를 여기서 선생이라고 표현합니다. 후에 가서 ‘아들’이라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데 원 의미는 영어의 son의 개념이 전혀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누군가를 기준에 두고 아랫사람을 말하는 칭하는 개념인데,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사위 서(壻)와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사위가 아들이고 원 아들은 아들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son은 과거에는 남입니다. 과거 「子」는 사위의 개념입니다. 과거의 모계사회에서는 사위가 아들인 것입니다. 아들은 남에게 주어야 하므로 별 볼일이 없었습니다. 사위는 데리고 왔으므로 자기 식구입니다. 모계사회에서는 남자가 출가하면 출가외인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추구해야 하는 것은 모계도 부계도 없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부도’세상입니다. 부도에서는 부계도 모계도 부정합니다. 어느 것 하나를 쏠리게 하는 것은 전부 부도의 길이 아닌 걸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부도지 18장, 19장의 요지입니다.
여자는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중심의 사회이므로 여자는 똑같이 女입니다. 지금 남자는man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개념이고, 子는 son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되어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아들은 그냥 하나의 사내일 뿐입니다. 男은 그렇게 쓰였습니다. 제 一子, 첫 번째 사위, 제 二子 두 번째 , 제 三子 세 번째 사위. 제 一男 첫 번째 아들, 二男 두 번째 아들. 지금도 한자로 표현할 때, 결혼이나 장례식에 가면 일남, 이남 합니다.
이렇던 원 개념이 공자시대에 오면 혼동되는데, 그 당시가 부계로 잡혀가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나라 시대만 하더라도, 초기에 무슨 子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姓이 두 번까지 바뀝니다. 황제도 성이 바뀌고 신농도 바뀌었는데 그 당시에 있는 사람들의 성이 모두 바뀌어 버립니다. 어디 희수에 있는 누구에게 장가가고 나서 성이 희로 바뀌었다. 원래 성은 헌원이었다. 공손이었다. 공손에서 희수로 바뀌었다. 장가를 다른 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냥 공손이라고 하는 집안에 男으로 태어나 희라고 하는, 제비라고 불리는 집안에 사위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子字를 붙인다면 희자입니다. 헌원은 희자지요. 권력은 사위인 남자가 가지므로 이 집안이 별 볼일 없는 것 같아 권력을 만들어 보려고 다른데로 장가를 가는 것입니다. 이미 이 시대의 인간들은 전쟁을 해야 하므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 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소전씨의 자손인데 나중에 보면 유응씨의 자손으로 되는 것은 것은 모두 당시에 모계 부계가 뒤섞여 있어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이 이해가 안 되면 고구려 왕계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고구려 왕계는 전부 어머니가 누구냐가 아니라 자기 마누라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라 초기도 그랬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가면 집안들이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 엉키게됩니다. 두 공동체가 연맹, 혼인을 맺어버리면 누비혼인이 되어버립니다. 누비혼인하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이 생깁니다. 신라 초기 왕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부계의 성이 전혀 승계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계로 굳어져 가는 것을 《부도지》에서는 매우 못마땅해 하며 그것이 결국 인간들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라의 김씨가 권력자로 등장하는 순간부터 부도지 역사는 서술을 끝내고 소부도지로 넘어갑니다. 김씨가 등장하면서 완전 부계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글자 자체를 가지고 살피다 보면 재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설문》에 근거해야 합니다. 설문에 어떤 글자가 나오면 그 글자를 뒤지고, 설명에 모르든 글자가 나오면 또 찾고 해서 계속 찾아 들어가야만 합니다. 물론 설문의 설명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한가지 일관된 논리로 설명을 하려면 설문의 설명내용도 역시 설문 안에서 찾아야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이상한 오역의 예들과 금문에 대한 엉뚱한 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申이라는 것은 원래 남자 성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라는 식으로 가니 과거에는 성석을 숭배했던 이유가 이런데 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조상 조(祖)자의 발음의 이유도 그곳에 있다. 이런 식으로 자꾸 만들어 가면 소설이 되는 것입니다. 기본사전을 뒤져보지 않으니 창작 이론들이 난무하게 되고 조상들을 원숭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글자를 한자 한자 짚어보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8장의 子張 學干祿에서 「干」, 「祿」는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다의 「疑」도 따져보아야 하는 글자입니다. 「여(餘)」자, 과우(寡尤)의 허물 「우(尤)」자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글자입니다. 《논어》의 글자들을 모조리 따져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글자들은 가급적 살펴보며 해석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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