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1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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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經󰡕을 읽어야 하는 이유
사람은 정情을 가진 존재다. 정 때문에 웃고 운다. 정 때문에 인생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정이 없으면 인생 자체가 영위되지 못한다.
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순수한 느낌에서 나오는 순정과 이기적인 계산에서 나오는 욕정이 그것이다. 순정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욕정은 추하다.
사람들은 본래 순수한 정으로 살아가는 순수한 존재였다. 그러다가 순수한 정을 욕정으로 변질시키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난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순수한 정이 욕정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시詩는 이러한 마음의 표현이다. 시는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욕정으로 변질되는 것을 참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를 읽으면 정이 순화되고 느낌이 순수해진다. 정이 순화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정을 순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시를 읽는 것이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시에서 일어난다興於詩”고 했고, 그 아들에게 먼저 시를 읽도록 권했다.
시집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 󰡔시경詩經󰡕이다. 󰡔시경󰡕 읽기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02 󰡔시경󰡕의 성립
󰡔시경󰡕은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시작되는 중국 서주西周에서부터 춘추 초기까지 불렸던 노래 가사의 모음집이다. 내용은 궁중의 향연이나 제례에서 불리던 노래 가사나 민간에서 불리던 민요의 가사로 국풍國風 160편․소아小雅 80편․대아大雅 31편․송頌 40편 합계 311편인데, 이 중에서 소아小雅 6편은 편명만 있고 가사가 없으므로 실제로는 305편이다. 국풍國風은 각국의 민요, 아雅는 조정의 음악, 송頌은 종묘 제사 때 연주하던 음악의 가사다.
󰡔시경󰡕은 원래 󰡔시詩󰡕라고만 불렸던 것이었으나 전국시대 말기부터 ‘경經’이란 말을 많이 쓰게 되어, 각 경전에 경經을 덧붙여 부르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러나 ‘시경詩經’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송대 이후로 보인다.

03 󰡔시경󰡕의 편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옛날에는 시를 채집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왕이 그것으로 풍속을 보고 득실을 알며 스스로 고정하였다” 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시는 각 지방에서 불리던 노래 가사를 채시지관采詩之官이 채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시의 원작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특히 국풍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채시지관采詩之官이 모은 시가 3000여 편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 중에서 잘된 것 300여 편을 골랐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공자가 3000편을 300편으로 줄였다는 刪詩說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어 왔다. 김학주 역의 󰡔시경󰡕의 설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현의 󰡔시보서試譜序󰡕에서 공영달孔穎達은 다음과 같은 소疏를 쓰고 있다. “옛 글에 인용된 시들을 보면 지금 시경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없어진 것은 아주 적다. 그러니 공자가 수록할 때 10분의 9를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고시古詩가 3000여 편이 있었다고 쓴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좌전左傳󰡕에 인용된 것을 보면, 현재 󰡔시경󰡕에 보이는 것이 156개, 없는 것이 10개, 󰡔국어國語󰡕에 남아 있는 것이 22개, 없는 것이 1 개, 󰡔예기禮記󰡕에는 남아 있는 것이 103개, 없어진 것이 세 개 정도 인용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공영달孔穎達의 견해에도 일리가 있다.
둘째, 󰡔좌전左傳󰡕 노양공魯襄公 29년에 계찰季札이 노魯나라에 와서 관악觀樂하는 기사가 있는데, 이 때 계찰季札이 본 가무歌舞는 이미 현재의 󰡔시경󰡕 내용과 비슷하다. 그 때 공자는 겨우 여덟 살이었으니 산시刪詩를 했을 가능성이 적다.
셋째, 󰡔논어論語󰡕에는 「위정현爲政篇․자로편子路篇」 등에 ‘시삼백詩三百’이란 말이 보인다. 공자가 이처럼 여러 번 ‘시삼백詩三百’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썼다는 것은 이 때 노나라에 통행되던 󰡔시경󰡕이 삼백 편 정도였음을 말해준다.
김학주 역 󰡔시경󰡕에서는 이상의 세 가지를, 공자가 산시刪詩했을 가능성이 적은 이유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열거한 것만으로는 공자가 산시刪詩하지 않은 이유가 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에 발표된 대중가요를 보면 수천 곡이 넘지만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불리는 노래는 겨우 몇 백 곡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생각해보면 당시 만들어진 시가 3000여 편이었다 하더라도 많이 유행하던 시는 대개 300여 편이었고, 공자가 그 300여 편을 주로 시경에 편입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300여 편의 시는 공자가 정리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삼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경󰡕은 공자에 의해 정리된 것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정현鄭玄은 󰡔시보詩譜󰡕에서 당시 주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지 않던 노송魯頌과 상송商頌을 공자가 󰡔시경󰡕에 편입시켰다고 한 것은 󰡔시경󰡕이 공자에 의해 정리된 것임을 확실케 하는 증거가 된다. 노송魯頌은 공자의 조국인 노魯나라의 송頌이고 상송商頌은 ‘구야丘也는 은인殷人이다(󰡔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라고 한 공자의 말에서 보면, 공자의 조상들의 조국인 은殷나라의 송頌이기 때문에, 정현鄭玄의 말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04 󰡔시경󰡕의 체제
󰡔모시서毛詩序󰡕나 󰡔주례周禮󰡕 「태사직太師職」에는 시의 육의六義에 대한 설명이 있다. 말하자면, 시의 체제와 제작원리에는 풍風․아雅․송頌․부賦․비比․흥興의 여섯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풍風․아雅․송頌은 시의 체제와 형식으로 분류한 것이고 부賦․비比․흥興은 시의 제작원리와 서술방식을 가지고 분류한 것이다. 육의六義의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풍風 각 나라에서 불리던 민요에 해당
아雅 조정에서 향연이나 제례를 거행할 때 불리던 노래
송頌 종묘 제사 때 연주되던 음악의 가사
부賦 사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
비比 직접적인 비유로 표현하는 것
흥興 먼저 다른 물건을 말하여 읊으려는 내용을 끌어 일으키는 것

05 󰡔시경󰡕 연구의 약사
삼가시三家詩
한대漢代 초기에 󰡔시경󰡕을 전한 사람으로 신배공申培公, 원고생轅固生, 한영韓嬰 세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이들의 󰡔시경󰡕을 삼가시三家詩라 부르게 되었다. 삼가시는 모두 금문今文이었다. 한대漢代의 경전에는 금문경전今文經典과 고문경전古文經典이란 것이 있었는데, 금문경전今文經典은 당시에 전해지던 경전으로서 예서로 기록되었고, 고문경전古文經典은 공자 고택의 벽에 숨겨져 있다가 발굴된 것으로 전해지는 경전으로 과두문자蝌蚪文字로 기록되는 등 기록된 문자도 다르고, 내용이 다른 부분도 많았다.
신배공은 노魯나라 사람이어서 그의 시설詩說을 노시魯詩라 한다. 그는 순자荀子의 제자인 부구박浮丘泊에게 배운 일도 있으며 한문제漢文帝 때에는 한영과 함께 시경 박사가 되었다. 이 노시魯詩는 서진西晉시대에 이미 없어졌다.
원고생은 제齊나라 사람이어서 그의 시설詩說을 제시齊詩라 한다. 그는 한경제漢景帝 때에 󰡔시경󰡕으로 박사가 되었다. 제시齊詩는 魏代 때 이미 없어졌으므로 그 상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한영은 연燕나라 사람으로 한문제漢文帝 때 박사가 되었으며, 경제景帝 때에는 상산왕常山王의 태부太傅를 지낸 사람이다. 그의 시설詩說을 한시韓詩라 부른다. 한시韓詩는 당나라 또는 북송 때까지 전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외전外傳 10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삼가시三家詩는 비록 전해지지 않지만, 후인들이 여러 전적에서 그 유설遺說들을 모아 대체적인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중 청대淸代 진교종陳喬樅의 󰡔삼가시유설고三家詩遺說考󰡕, 왕선겸王先謙의 󰡔시삼가의집소詩三家義集疏󰡕는 유명하다.

모시毛詩
삼가시三家詩가 이미 없어졌으므로 송대 이후로는 고문 경전인 󰡔모시毛詩󰡕만이 세상에 행해지게 되었다. 현재의 󰡔시경󰡕이란 바로 이 󰡔모시󰡕를 말하는 것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삼가시를 서술한 뒤에 “또 모공毛公의 학이 있는데 스스로 자하子夏의 소전所傳이라 했다. 하간헌왕河間獻王이 좋아했지만, 학관學官에 채택되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모시󰡕29권․󰡔모시고훈전毛詩故訓傳󰡕 30권을 저록著錄했는데, 이 중 󰡔모시고훈전󰡕이 바로 오늘날의 󰡔시경󰡕이다.
모공毛公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에서는 초趙나라 사람으로 소개했으나, 전현鄭玄은 󰡔시보詩譜󰡕에서 “노魯나라 사람 대모공大毛公은 고훈故訓을 지었고 소모공小毛公은 박사가 되었다”고 했다. 또 진晉나라 사람 육기陸璣는 󰡔모시초목조수충어소毛詩草木鳥獸蟲魚疏󰡕에서 “모형毛亨이 고훈전故訓傳을 지어 초趙나라 모장毛萇에게 전했다. 당시의 사람들이 형亨을 대모공大毛公, 장萇을 소모공小毛公이라 불렀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 가지고는 모공毛公이 어떠한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정현鄭玄의 󰡔시보詩譜󰡕에 의하면, 󰡔모시毛詩󰡕의 맨 앞에 대서大序가 있어 시의 전체 뜻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자하작子夏作이고, 각 시의 첫머리에 소서小序가 있어 각 시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자하子夏와 모공毛公의 합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육기陸璣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毛詩草木鳥獸蟲魚疏󰡕에서는 “자하子夏는 시 삼백 편의 서序를 썼고, 한대漢代의 위굉衛宏이 모시서毛詩序를 썼다”고 했다. 또 󰡔후한서後漢書󰡕 「유림전儒林傳」에는 위굉衛宏이 모시서毛詩序를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송대宋代의 왕안석王安石은 “소서小序는 각 시의 작자들이 썼다”고 했고, 정이程頤는 “대서大序는 공자가 썼고 소서小序는 국사國史가 썼다”고 했다. 이 외에도 모시서毛詩序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분분하다. 송宋의 구양수歐陽修는 󰡔모시毛詩󰡕의 서序를 비판했고, 왕질王質은 모시서毛詩序를 반대했다. 특히 정초鄭樵는 모시毛詩의 서序는 시골 망령된 자의 작이라 하여 배척했다. 주자도 서序를 무시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모시정전毛詩鄭傳
후한後漢의 대학자인 정현鄭玄이 󰡔모시󰡕에 대한 주를 달았는데, 이것이 󰡔모씨정전母氏鄭傳󰡕이다. 󰡔모시정전毛詩鄭傳󰡕이 세상에 유행하자, 삼가시三家詩는 점차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제시齊詩는 위魏나라 때 없어지고, 노시魯詩는 서진西晉 때 없어지고 한시韓詩는 당대唐代까지 전한 듯 하나 그 역시 없어지고 󰡔한시외전韓詩外傳󰡕만이 오늘날 남아 있다.

시경집전詩經集傳
송나라 때 주자는 당나라 말기에 시작된 새로운 유학의 학풍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만들었다. 그는 사서와 삼경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시도했는데 시경에 대한 그의 주가 이른바 󰡔시경집전詩經集傳󰡕이다. 󰡔시경집전󰡕이 나오자 󰡔모씨정전母氏鄭傳󰡕과 더불어 󰡔시경󰡕 연구서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이 외에도 청대 및 한국과 일본에서 많은 시경의 연구 서적이 쏟아져 나왔으나 일일이 열거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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