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일 목요일

현대 미술 회화의 역할

회화의 역할






19세기 예술가들은 신학적 해석을 탈피하고, 원근법을 뛰어넘는 복합적인 공간을 상상하였다. 시각으로 포착 가능했던 그림은 1900년 우리의 시계를 무한대화할 발전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베르그송과 프로이트 플랑크 아이슈타인 등의 사상가는 모든 자연 법칙에 적용되는 고전적 이성의 법칙과 다른 독특하고 본질적인 방법으로 자아의 알 수 없는 영역까지 미치는 신비로운 움직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의 발전과 이론으로 시공간적인 의식을 낳게 하여, 회화의 일루젼의 능력을 회생시키고 미술작품의 유기적 실재를 강조하고자 하였다. 화가는 그림을 오브제로 여기고 창작의 절차, 작품의 진화과정, 작업시간과 재료를 보여준다. 실험적인 방법으로 풍경화에 몰입함으로써 화가는 원근법의 한계를 넘어서고 자연의 묘사에서 순수회화로 넘어가게 되었다.



모네는 실험적으로 빛과 대기에 의해 변모하는 사물에 주제를 설정하고 집중적으로 작업했다. 그는 서양회화의 기본인 명암의 대조를 온랭의 조화로 바꾸어 나가고 부드러운 혼합에서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는 시각에 의한 병치혼합으로 옮겨감으로써 점묘화법을 탄생시킨다. 모네는 색의 터치로 메꾸어지는데 각각 터치는 자율성을 지닌다. 그는 색채를 통해 그림을 하나의 실재로 제시하고 동시에 구성요소의 하나인 색채를 강조한다.



쇠라와 신인상파 동료들은 색채의 체계적 사용을 통해 과학적으로 색채를 물질화 시킨다.



쇠라의 그림은 비구상은 아니나 방식은 추상적이다. 그는 수학적 구조를 통해 색채를 물리학적으로 다루면서 조형적 조화에 이르고자 했다. 쇠라는 형태를 조화시킬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회화방식을 찾아내려고 했다.



쇠라의 동료인 앙리는 예술의 효과를 조절하기 위해 예술 자체에 과학적 규범을 적용시킬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과학의 사회적 역할이 지금 시기에서 더욱더 크다고 주장했다.



모네는 건초더미, 포플라, 성당 수련등 걸작을 기점으로 비구상의 문턱에 다다르며, 주제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색채를 고양시킨다. 그는 전체적 풍경을 잡기도 하고 세부를 확대해 그리면서 고전적 화폭으로부터 대형화폭까지 동일한 주제로 작업을 한다. 모네는 빛의 순간적 움직임들을 보다 정확히 고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자신이 작품과 일체가 되는 느낌을 주게 했다. 그는 사실적 그리는 규범에 벗어나고자 한 것은, 즉각적으로 정확히 자연을 분석하기 바랬기 때문이었다. 자연을 색채로 치환한 모네의 방식은 1945년에야 따시즘과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시도는 칸딘스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건초더미를 보고 칸딘스키는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칸딘스키는 마네 그림을 보고 그림은 엄청난 위력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대상은 중요성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마네는 보이는 것을 중시하였지만 창작에 있어서 계획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주장했다. 마네는 먼저 머릿속에 그림 구상을 해야 하고, 예술이란 자연을 의도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옮겨놓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회화가 일루젼에서 벗어난 가능성은 화가가 표현적 가능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전개되었다. 고갱은 조형예술가들에게 음악가의 자유를 주장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고갱은 작품에 왜 그런가라는 설명을 요구할 필요가 없으며, 음악과 같고 자신은 일종의 교향곡과 화음을 만든다고 의견을 밝혔다.



칸딘스키와 클레 등은 추상작업을 정당하기 위해 음악의 자율성을 사용한다. 고갱의 신봉자이자 나비파의 젊은 화가인 드니는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질서에 의해 모여진 색채들로 덮혀 있는 평면이란 정의를 하였다.



회화에서 주제를 초월하는데 세잔느는 인상주의를 영구한 것으로 만들기 원했고, 예술은 자연과 동등한 조화란 선언을 했다. 그래서 재현 미술의 역사에 균열이 생기게 했다. 세잔느는 자연과 회화 사이의 의존관계를 깨었으나, 주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메를로 퐁티는 세잔느가 감각과 사고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고, 그는 외양과 인상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세잔느는 물질의 질서를 회화화하려고 했다. 그는 사물의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구분하고자 했다.



세잔느는 회화 구성요소의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주면서 작업을 한다. 세잔느는 작품들을 미완성 상태로 놓아두어 비판을 받았지만, 회화적 사실에 대한 그의 탐구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잔느는 묘사대상에서 항상 포착할 수 없는 부분, 변화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잔느는 세계의 광대함과 생명력,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 세잔느는 선, 면, 공간과 구성, 색채를 통해 자연이 감추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표현하고 해석과 표현방식에 대해서 문제점도 제기했다. 세잔느는 작업과정을 예술은 자연과 접촉할 때 생성, 적용된 이론에 근거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여인 몸의 곡선을 언덕의 곡선과 연결시키며 형태와 색채의 우열에 관한 논쟁을 뒤엎었다. 그는 색채가 조화를 이룰수록 데생 또한 정확해지고, 색채가 풍요로와질 때 형태 또한 충만해진다.



드니는 세잔느의 예술은 즉흥적인 미술의 출현으로 아카데미즘과 방법론이란 전통이 파기되었던 시기에 사고를 경험보다 중시하면서도 감수성의 본질적 역할을 잃지 않고 있었다고 헌사하였다.



재현의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자, 회화의 표현성을 의식한 마티스 입체주의 화가에 의해 재현의 변화가 가속되었다. 야수주의 화가들은 1905년 등장하자마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야수주의 화가들은 사물의 복원보다는 사물들이 불러일으킨 충격과 동일한 충격을 관객에게 주고자 하여 색형의 조화를 통해 감각의 종합물을 한정된 화폭에 놓는다. 마티스는 형태가 연상시키는 것은 무가치해질 정도로 형태와 색채 간의 균형을 얻고자 끊임없이 실험한다. 그는 그림 속에서 구성요소들은 주역이든 조역이든 그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작품은 전체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소한 세부에 신경을 쓰면 필수적 세부마저 놓치게 된다고 기고했다.



마티스는 하나의 작품은 전체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고, 예술작품의 완성은 미리 예견되어질 수 없다고 하였다. 마티스는 추상의 문턱에 도달하며 작품의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고유의 색들을 다른 색으로 바꾸었다. 마티스는 표현성이 강한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색채들을 잘 조화시켜야 하며, 교향악에서 악기 동시 연주와 마찬가지라고 말하였다. 마티스는 구상은 그와 세계와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티스는 추상은 미술가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유혹 때문에 실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세잔느의 명제를 확장시켜서 생기를 부여한 브라크와 피카소는 흑인미술을 접하고 입체주의의 분석적 단계에 이르면서 회화에 미치는 구성의 근본적 중요성을 입증한다. 그 자신은 대상을 지워간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대상이 조형적 시도의 출발점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정물을 선호하였고, 예술이 구상적 차원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정물을 대상으로 작업함에 따라 그들은 풍경의 시각적 공간보다 정물의 촉각적이고 물질적인 공간을 더 가까이 하였다.



조형적 리얼리티는 일루져니즘을 대체하고 그들은 실제의 사물을 화면에 도입했다. 브라크는 대조를 통해 화면 속에 사물들과 화면 바깥의 실재 사물들을 명확히 구분해주고 있다고 했다.



1912년 브라크와 피카소가 작업의 발전과정상 불가피한 꼴라쥬를 시작하여 그후 입체주의는 종합적인 단계에 접어든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해석하기보다 조형적 가능성을 바탕으로 감각의 총체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아쌍블라쥬를 통해 진정한 조형언어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통일성과 공간의 유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 없이, 그림이란 시각이 포착하는 것을 복원하는 것이란 관계를 설정해 실재의 사물들로 오브제 회화을 만들어 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악보와 신문을 그리는 대신 직접 갖다 붙이는 방식을 쓰는 등 형식과 내용간의 관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실재와 재현된 것과의 거리는 없어졌다. 그들은 회화의 실재는 그 실재와 떨어진 어떤 것의 환영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 오브제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브라크는 그림을 그림은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글은 쓰는 것은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림은 자체의 논리, 질서, 독립성을 부여받았고, 회화는 그 자신에게서 존재 이유를 찾는다고 했다. 형태의 암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암시가 그 요소들과 분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회화는 그 자신에게서 존재 이유를 찾는다고 결론 내렸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