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6일 월요일

신촌 이미지 한의원 02-336-7100 추천책 살아 있는 날의 선택

살아 있는 날의 선택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일반적으로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대응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문제에 주의하되 해결 노력 없이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문제를 외면하고 가급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고, 셋째는 문제를 주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문제에 있어서 ‘죽음에 주의하며 걱정만 하기’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죽음 외면하기’와 ‘죽음에 주의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중에서는 어떤 것이 바람직할까요? 이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갈리는데 그것은 죽음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달리 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입장을 각각 ‘똥설’과 ‘된장설’ 정도로 명명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구린 냄새가 나고 본래 더럽다고 느낄 만한 것이기 때문에 똥을 더럽다고 느끼는 것처럼 ‘똥설’에 따르면 우리가 죽음에 대해 불안과 공포, 고통을 느끼는 것은 죽음이 본래 그럴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죽음의 이런 본질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주의하고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단지 걱정과 불안의 횟수만을 더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구린 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일단 그 맛을 알게 되면 즐겨 찾게 되는 된장처럼, ‘된장설’에 따르면 죽음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고통 역시 이 본래 그럴 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죽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그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주의하고 그 정체를 정확히 알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렵거나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죽음을 외면하기만 하면 죽음은 계속해서 무섭고 험상궂은 외피를 벗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똥설’과 ‘된장설’ 중 어느 것이 옳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똥설’에 따라 죽음을 외면하기보다는 일단은 ‘된장설’에 따라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 보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죽음을 외면하게 되면 죽음의 정체를 밝힐 수 없어 ‘똥설’과 ‘된장설’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죽음 문제 해결 이상의 의의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사고가 삶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주의는 현실을 넘어선 차원으로 사고를 비약하게 해 줍니다. 지상에 머물던 시선을 돌려 먼 곳의 별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세상에는 더 이상 신비한 것도 완전한 것도 없다는 ‘인생 뭐 있어?’의 심정인 사람들도 죽음에서는 깊은 심연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근원의, 궁극의 성찰
죽음은 ‘모든 것은 낡고 흩어지게 된다.’는 자연법칙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법칙이 어떻게 관철되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죽음이 반드시 심각한 부상이나 질환 다음에 발생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체에 아무 이상이 없는데 갑자기 죽는 경우는 없죠. 멀쩡하게 있다가 갑자기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어떤 심각한 질환이나 부상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은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질환이나 부상이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기계가 멈추기 위해 낡는 것이 아니라 낡기 때문에 멈추는 것처럼 우리는 죽기 위해 병들거나 부상당하는 것이 아니라 병들거나 부상당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이나 부상 중에서도 회복 불가능한 정도의 심각한 상태만이 죽음을 발생시킵니다.
우리가 죽음을 끔찍하게 여기는 원인 중 하나는 그것을 질환이나 부상과 한통속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묶어 생각하니까 질환이나 부상에 따르는 고통과 괴로움이 죽음 자체의 속성이기도 한 것처럼 간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은 질환이나 부상의 단순한 결과일 뿐입니다. ‘사람이 병을 이겨내지 못할 때 그의 삶에는 종지부가 찍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죽음이 찾아온다.’라고 보아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질환이나 부상에서 회복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 후 모든 것을 끝내는 역할을 합니다. 질환이나 부상이 주는 극심한 고통과 비참함 속에서 인간을 구해 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족 중 누군가 병마와 힘겹게 싸우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줄곧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 점에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낡게 마련이고 따라서 인간은 언젠가는 심각한 병이나 부상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질환과 부상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공포와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이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어 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해 울분과 공포, 혐오를 느끼기보다는 고마움과 든든함을 느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날 이후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죽음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의미를 유한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허무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이 삶과 이 지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죽음으로 끝나는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면, 그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일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삶은 의미가 있다고 인정하려면 그 영원한 삶을 이루는 유한한 삶의 시간들 역시 의미가 있다고 인정해야 하지요. 유한한 삶의 가치가 0이라고 했을 때 이 0에 0을 무수히 더한 영원한 삶의 가치도 0이 되고 마니까요. 이렇게 유한한 삶이 무의미하다면 죽음 없는 무한한 삶도 무의미할 수밖에 없으므로, 죽음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둘째, 죽음은 우리와 우리 삶의 ‘있음’은 붕괴시킬 수 있지만 ‘있었음’은 붕괴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 버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우리 삶은 이 세상에서 단지 유한한 시간 동안 지속될 뿐이지만 그 유한함 속에서도 절대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이란 이 세상의 삶이 끝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 가질 수 있는 선의 실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이 우리의 삶을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삶에 대해 큰 허무감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평상시에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리는 삶, 소유한 물건, 사람들과의 만남 등이 자기에게 당연한 것이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계속되리라는 착각 속에 살아 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 괴리가 깊은 허무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현재의 삶과 그 삶을 이루는 것들을 죽음 앞에서도 허무해질 수 없는 중요성과 가치를 가진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을 허무하고 무가치하게 느끼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죽음을 망각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감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 우리는 주어진 삶의 순간순간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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