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생각한다
인륜이 무너지면
부모에게는 효도할 줄 알고, 형제에게는 우애를 지킬 줄 알고, 부부간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음을 알고, 친구에게는 신의를 지킬 줄 알고, 임금에게는 의리를 지킬 줄 아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당초 멀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부모를 나의 몸과 다르게 생각하고, 형제를 처자식보다 멀게 생각하고, 부부 사이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친구를 저잣거리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길에서 만난 사이쯤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부모를 나의 몸과 다르게 생각하면, 살아 계실 때는 섬기지 않게 되고 돌아가셨을 때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된다. 형제를 친자식보다 멀게 생각하면 윤리가 무너져 같은 핏줄끼리 잔인하게 싸우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부부가 서로를 원수처럼 생각하면, 도덕이 깡그리 사라져 금슬이 깨지고 상대방을 미워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친구를 저잣거리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면, 함정에 빠진 벗에게 돌을 던지고 서로가 서로를 해치게 된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길에서 만난 사이쯤으로 생각하면, 종국에는 나라를 팔아 간악한 욕심을 채우는 등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인륜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흔들리고 망하게 되는바, 위에 있는 사람들이 몸소 실천하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백성이 무슨 수로 바른 데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 인륜이란 거창하고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말한 글이다. 인간답게 사는 법에 대한 소박한 생각을 담은 글이지만,경제 성장에 몰두한 나머지 도덕 불감증에 걸려 버린 우리 사회에 일깨우는 바가 적지 않다.
지혜로 빚어낸 아홉 편의 이야기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침묵해야 할 때 말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자, 그런 사람이야말로 군자이다.
군자의 침묵은 유원한 하늘 같고 깊은 연못 같고, 흙으로 빚은 소상(塑像) 같다. 군자의 말은 주옥 같고, 난초 같고, 종과 북 같다. 유원한 하늘은 바라보매 그 끝자락을 알 수 없고, 깊은 연못은 굽어보매 그 밑자락을 알 수 없으며, 흙으로 빗은 소상은 마주하매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없다. 주옥은 임금의 관에 구슬 장식으로 쓰일 수 있고, 난초의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데 쓰일 수 있으며, 종과 북은 천지신명에 바칠 수 있다. 그러니 보배스럽고도 귀중하지 않겠는가. 침묵할 때는 문드러진 나무 둥치 같고 말할 때는 꼭두각시 같은 자를 나는 보고 싶지 않다.
* 말해야 할 때를 알아서 적시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은, 지극히 말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말을 잘 한다 해도, 말로써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야 할 때를 침묵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말 잘하는 것이다.
달빛․ 산빛․ 꽃빛에 젖어
산중 생활의 즐거움
뜻 가는 대로 꽃과 대죽을 키우고, 마음 가는 대로 새와 물고기를 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중의 소박한 경제이다.
어느 맑은 밤 편안히 앉아 등불을 은은히 하고 차를 끓인다. 세상은 온통 고요한데 시냇물 소리만 졸졸졸 들려와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채 건듯 책을 읽어본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 빗장 걸고 방을 치우고선 눈앞에 가득한 책을 흥 나는 대로 꺼내서 본다. 사람들의 왕래가 뚝 끊겨 온 세상이 고즈넉하고 온 집안이 조용하다.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텅빈 산에 겨울이 찾아와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싸락눈 날리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바람결에 흔들리고, 추위에 떠는 산새가 들판에서 우짖을 때, 방안에서 화를 끼고 앉아 차 끓이고 술 익힌다.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문 닫고 마음에 맞는 책을 읽는 것, 문 열고 마음에 맞는 벗을 맞는 것, 문 나서서 마음에 맞는 경치를 찾는 것. 이것이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산중 생활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얽매이는 마음이 생기면 시정인의 삶과 다를 게 없고, 서화 감상은 아취 있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탐욕이 생기면 장사치와 다를 게 없다. 한 잔 술 기울이는 것이야 즐거운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남의 흥취에 끌려 다닌다면 갑갑하기 그지없고, 즐겨 손님을 맞는 것이야 화통한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속된 사람과 엮이게 된다면 괴롭기 그지없다.
손님 가자 빗장 내렸는데 선들바람에 해가 진다. 술동이 건 듯 열어 보니 시 구절 이내 이뤄진다. 이야말로 산속 사람이 고대하던 순간이리.
뽕나무 숲과 보리밭이 위아래에서 경치를 뽐내는데, 따스한 봄날이면 까투리와 장끼 지저귀고, 비 오는 아침이면 비둘기 울음 소리 들려온다. 시골살이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이로다.
흡족하게 풍류를 즐겨도 시간이 지나면 서글픈 맘이 생긴다. 하지만 고요하고도 맑은 경지에서 노닐면 시간이 갈수록 깊은 맛이 난다.
* 이 글에서 신흠이 말하고자 한 산중 생활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나를 속박하는 욕심과 허영에서 벗어나 담박하고 가벼운 나를 찾아가는 즐거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산중 생활이라도 얽매이는 마음이 생긴다면 시정인의 삶과 다를 게 없다는 말에서, 작가가 추구하던 바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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