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22일 일요일

신촌 이미지한의원 추천책 광기와천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에게 삶은 위대한 공포였다.

▪ 폭군 아버지와 도전하는 아들
히틀러는 누군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까 봐 두려워했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기원을 캐낼까 봐 두려워했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독일에 맞붙은 오스트리아의 인 강 기슭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끔찍이도 가난하게 자랐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 한 뒤 그는 오스트리아의수도 빈으로 가 구두제조공의 견습생이 되었다. 머리 좋고 야심이 컸던 알로이스는 얼마 뒤 세관공무원이 되었고,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승진을 거듭해 마지막에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까지 올라갔다. 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세 번째 결혼한 클라라 푈츨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돌프를 낳기 전에 이미 세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어린 아돌프를 몹시 애지중지 키웠다. 그 뒤 아돌프의 남동생 에드문트와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지만, 에드문트는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초등학교 시절 아돌프는 우수한 학생의 완벽한 전형이었다. 성적표는 항상 ‘최고 점수’로 가득했다. 초등학교 시절 최우수 학생이었던 히틀러는 실업학교 1학년 때 낙제해 진급을 하지 못했다. 영재가 한순간에 백치가 된 것만 같았다. 히틀러는 뒷날 『나의 투쟁』에서 아버지가 자기를 관리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거기에 저항하느라 공부를 팽개쳤다고 말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처럼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던 히틀러의 아버지는 출세의지만큼이나 강한 지배의식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압제적일 경우 자식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고, 오이디푸스 시기를 순조롭게 극복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압도적인 두려움 때문에 의식 깊숙이 가라앉고 일종의 죄의식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제 시작된 악순환은 아버지의 매질과 자식의 반항으로 더욱 나쁜 방향으로 흘렀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자세가 나타났다. 둘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다다랐던 1903년 알로히스 히틀러가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했다. 히틀러의 내면에는 무성한 죄의식의 숲이 펼쳐졌고, 허약한 자신을 경멸하는 자기 부정의 나무들이 들어섰으며, 폭압적인 아버지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공포의 안개가 흘렀다. 1905년 히틀러는 폐결핵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실업학교 4학년을 겨우 끝낸 상태에서 그대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폐결핵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 삶의 밑바닥에 내던져진 몽상가
열여섯 살 히틀러는 린츠의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환상의 세계를 더듬었다. 그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화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기가 속한 비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속박 없는 멋진 삶으로 상승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최선의 길이었다. 1907년 가을 그는 아픈 어머니를 뒤로 하고 수도 빈으로 떠났다. 미술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2차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성공해서 돌아가리라는 결심은 한순간 물거품이 됐다. 미술아카데미 교장은 그에게 그림보다는 건축을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1908년 2월 히틀러는 다시 한 번 미술아카데미에 도전하려고 빈으로 갔다. 그해 9월 시험에서 그는 또다시 낙방했다. 두 번 낙방이면 재응시할 자격도 없다. 그는 환멸의 쓴 눈물을 삼켰다. 동경은 원한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중에 징집 영장이 나왔다. 그는 어떻게든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몸을 숨겼다. 그 시절 히틀러의 삶에 모범이 있었다면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 경우였다. 바그너가 젊은 시절의 좌절과 비참함을 딛고 위대한 명성을 얻었듯이 히틀러도 언젠가는 화가나 건축가로서 높다란 명예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거의 환상에 가까운 희망을 품고 있었다.

▪ 두려워 혐오스러운 유대인
이 시기에 히틀러의 관심은 압도적으로 예술에 기울어 있었지만, 이 ‘세기말 빈’의 정치적 공기에 그의 머리도 서서히 물들어갔다. 반유대주의라는 공기였다. 이 늙은 제국의 수도 빈은 여러 민족 구성원들의 집합처이자 경쟁장이었다. 그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맹렬한 성취욕과 교육열로 독일계가 장악한 경제․사회․문화의 핵심으로 질주했다. 이들은 고학력 직업에서 눈부시게 성공했고, 언론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금융산업과 토착산업에까지 점령할 듯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유대인에게 추월당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경쟁심과 질투심, 나아가 증오심을 느꼈다. 히틀러가 빈에 머물던 시절 유대인 문제는 커다란 정치적 쟁점이었고 반유대주의는 일종의 유행어였다.

▪ 히틀러를 구원한 전장의 한계체험
1913년 5월 스물네 살의 히틀러는 자신에게 환멸과 좌절만 안겨준 빈을 떠나 독일 남부의 뮌헨으로 갔다. “빈은 가장 괴로운 인생의 학교였다. 나는 반쯤 어린아이였을 때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냉정하고 진지한 인간이 되어 이 도시를 떠났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 시기의 자신을 반쯤은 운명의 주인이 된 듯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상은 여전히 운명에 쫓기는 우울한 존재였다. 아마도 병역기피가 뮌헨으로 간 일차적 이유였던 것 같다. 히틀러는 독일 정신이 퇴락한 오스트리아제국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이 시기에 확고한 게르만 민족주의자, 반오스트리아적 독일 민족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 󰡒선동가 히틀러 탄생󰡓
1919년 9월 히틀러는 생긴지 1년 이 채 안 된 독일노동자당이라는 조그만 뮌헨 지역당의 토론 행사에 참여했다. 선전부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지겨운 토론회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히틀러는 참석자 중 한 사람이 바이에른을 독일제국에서 분리해 오스트리아와 통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벌떡 일어서 그 주장을 사정없이 반박했다. 토론회가 끝난 뒤 당의 창설자인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1884~1942)가 다가와 그에게 『나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소책자를 주었다. 며칠 후 그는 ‘독일노동자당에 가입되었다’는 내용의 엽서와 당원증을 받았다. 반쯤의 당혹감과 반쯤의 호기심을 안고 그는 아주 허름한 음식점에서 열린 당위원회 모임에 참석했다. 그것은 당이라기보다는 ‘비밀결사와 초저녁 맥주모임의 혼합체’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는 습성 그대로 히틀러는 ‘가입이냐, 거절이냐’ 문제로 며칠 동안이나 평정을 잃었다.

히틀러는 쉰 다섯 번째로 독일노동자당의 당원이 되었다. 당에 가입하자마자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선전 담당 일을 맡았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그는 끊임없이 일을 만들었다. 조용한 토론모임 같았던 당은 갑자기 솟아난 활력으로 술렁거렸다. 1919년 10월 16일 당은 새입당자의 의견을 따라 최초의 공식 집회를 열었다. 111명이 참석한 이날 저녁 집회에서 히틀러는 두 번째 연사로 연설했다. 연설이 끝날 무렵 작은 맥주홀 안에 모인 사람들은 전기가 오르는 듯 흥분했다. 막연히 느끼기만 했던 일이 현실을 통해 입증되었다.

▪ 지도자의 탄생
입당한지 다섯 달 만에 히틀러는 최초의 대중집회를 열었다. 당은 벌써 히틀러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갔다. 뮌헨 맥주홀에서 열린 제 1회 대중집회는 2000여명을 헤아리는 청중을 불러모았다. 홀 안의 상당수는 공산주의자를 비롯해 집회를 방해하려는 세력이었다. 히틀러는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은 청중의 감정을 고양시켰고, 선동가의 자기 상승으로 이어졌다. 연설이 끝났을 때 “내 앞에는 새로운 확신, 새로운 신념, 새로운 의지로 결합된 사람들로 가득찬 홀이 있었다.”

이날 독일노동자당은 25개조 강령을 발표했다. 모든 독일인을 대독일로 통합하고, 굴욕적인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하며, 유대인을 독일 민족에서 배제하고, 모든 부당이익을 몰수하며, 대기업의 이익을 노동자에게 분배한다는 것을 강령은 포함했다. 비록 히틀러 자신이 직접 만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날 발표된 강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 Arbeiterpartei : NSDAP)‘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 당은 약칭으로 ’나치(Nazi)‘라고 불렸다.

히틀러의 무기는 말이었다. 그의 모든 힘은 말에서 나왔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은 결코 거위 깃털 펜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다. 종교적․정치적 방법으로 위대한 역사적 격변을 일으킨 힘은 영원한 ‘말의 마력’뿐이다.” 히틀러에게 이념이란 단지 몇 개의 원칙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므로, 언제나 그에게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선전의 기술과 대중의 동원이었다.

▪ 정치의 미학화, 정치의 연극화
히틀러가 원한 것은 단순한 독재, 단순한 권력이 아니었다. 1934년 8월 마침내 늙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했다. 히틀러는 대통령 권한까지 넘겨받았다. 1인 지배 총통국가가 완성됐다. 외교상으로도 그는 치밀하고 과감한 행보로 자신의 보폭을 넓혔다. 그의 명성은 나라 밖으로도 널리 퍼졌다. 히틀러를 만났던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도 그의 논리와 명징성, 정신적 능력에 경탄했다.

▪ 지그프리트의 최후
1938년 히틀러는 신중한 평화주의자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열차시간표 맨 앞에 쓴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단행했다. 3월 12일 히틀러는 독일 국경을 넘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들어가 곧바로 린츠에 입성했다. 이어 10월에는 독일계 주민 350만 명이 거주하는 체코 수데텐 지역이 독일에 통합됐다. 이듬해 3월 히틀러는 체코의 본토마저 병합시켰다. 히틀러의 시간표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더 있었다. 영국과 동맹을 맺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히틀러의 뜻을 완강히 거부했다. 사태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대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초조감에 쫓긴 히틀러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고 일주일 뒤인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로 선전포고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듬 해 5월 히틀러는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치고 곧바로 프랑스를 향해 진격했다. 모든 것이 역사상 유래가 없는 진격전이었다. 한 달 만에 파리가 무너졌다. 6월 24일 히틀러는 정복자로서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을 통과했다. 그의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한 달 전 영국의 새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1874~1965)은 취임 연설에서 자신은 이 나라에 “피와 고난과 눈물과 땀밖에는 제공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처칠의 등장은 유럽에 작은 희망의 신호였다. 처칠은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확고한 결심을 의회에서 밝혔다. 히틀러는 다시 한 번 타협책을 찾았으나 완고한 영국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히틀러의 시간표를 따르면 마지막 열차가 떠나야 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소련 침공 명령을 내렸다. 더 큰 모험, 더 큰 위험, 더 큰 공포에 뛰어드는 것만이 자기 내부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기라도 하는 양 그는 마지막 도박에 절망적으로 판돈을 걸었다.

이 전쟁은 히틀러가 망상 속에서 그렸던 거대 생존공간 확보 전쟁이자 공산주의에 대한 세계관의 전쟁이었다. 모든 유대인, 모든 아시아 소수민족, 모든 공산당 간부, 모든 집시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야수의 냉혹함으로, 또 얼마 뒤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기계적 정확성으로 특수부대는 이 인간 살육 작전을 수행했다. 믿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승리가 계속됐다. 그러나 초기의 진격전은 시간이 갈수록 둔탁해졌다. 예정보다 두 달이나 지체된 10월 2일 마침내 모스크바 공격이 시작됐다. 곧 찬비가 내리고 얼음이 얼더니 매서운 북극의 추위가 닥쳐왔다. 월동 준비가 안 된 독일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소련의 ‘붉은군대’가 반격에 나섰다. 그 무렵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는 전쟁의 전환점을 이루는 사상 최악의 격전지가 되었다. 전략적 거점이자 스탈린이라는 이름으로 두 나라에 모두 심리적 거점이기도 했던 이 도시를 두고 독일과 러시아는 총력전을 치렀다.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를 지키던 독일군이 항복함으로써 전세는 일순간에 소련 쪽으로 넘어갔다. 이제 동부와 서부 모든 전선에서 독일군의 위축이 두드러졌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1907~1944)대령이 히틀러 암살을 기도했다. 히틀러는 경미한 상처만 입었을 뿐 무사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 사건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다시 한 번 섭리의 개입과 구원의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구원은 오지 않았다.

1945년 4월 16일 소련은 250만 병사로 베를린 공략에 나섰다.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망가진 폐허의 도시 지하 벙커에서 히틀러는 죽음을 결심했다. 그는 최근에 벙커로 온 그의 애인 에바 브라운(Eva Braun․1912~1945)과 결혼식을 올렸다. 4월 30일 오후 히틀러는 부인이 된 에바 브라운과 벙커 안에서 자살했다. 유사 이래 가장 광포한 상상력을 정치 현실에서 펼쳤던 인간,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세계를 열광시키고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인간, 아돌프 히틀러의 출현과 몰락으로 인류는 끔찍하고도 아득한 새로운 체험의 지평 위에 놓였다.


문학적 풍경
프란츠 카프카 - 존재의 감옥, 변신의 욕망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1883~1924)는 오스트리아제국의 건실한 시민이었다. 고속 승진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유능한 관리였다. 키 182센티미터의 늘씬한 몸을 깔끔한 복장으로 감싼 멋있는 청년이었다. 친절함과 관대함을 잃지 않는 예의바른 신사였다. 그의 외모 어디에서도 ‘카프카적인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반듯한 남자의 내면에 그토록 어둡고 불길한 세계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시간이 나면 산책을 하고 카페를 찾고 벗들을 만나는 동안에도 그는 항상 가슴속에 벌받을까봐 무서워 훌쩍거리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그는 성년의 숲을 두려움에 떨며 방황하는 미성년이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면 그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그 아이를 불러냈다. 그리하여 20세기 문학을 상당 부분 규정지은 유례없는 이미지들이 어둠의 정적 속에서 태어났다.

커다란 유충이 되어 자기 방에서 말라죽는 그레고어 잠자(『변신』), ‘물에 빠져 죽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순순히 집행하는 아들(『선고』),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체포되는 요제프 K(『소송』), 성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해 제자리걸음만 하는 토지측량사(『성』)……. 그의 모든 작품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는 자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입구를 찾지 못한다. 아무 데도 막힌 곳이 없는데 그 어디에도 뚫린 곳이 없다. 보이지 않는 족쇄, 보이지 않는 창살, 보이지 않는 담장에 그는 갇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악몽이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에게 할당된 삶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이 타고난 작가의 운명이었다.

댓글 없음: